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257화 (256/259)

77. 천하의 모든 것 (1)

“사업당 별감 서림이, 천하대회를 준비하는 일을 위하여, 경오년 12월 8일 또는 1571년 1월 3일. 

귀국의 무한한 번영을 삼가 기원합니다.

대전란이 마침내 끝나고 화약(和約)을 한양에서 맺기로 한바, 이를 기리고자 아(我) 사업당은 이른바 천하대회를 열어, 만국의 뛰어난 물산을 서로 견주고 교역을 트는 큰 마당을 열고자 합니다.

이는 실로 온 천하 만국의 일이니, 참여하여 이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국인(國人)은 귀국의 사람이든, 귀국을 거쳐가는 타국의 사람이든, 그 신분과 출신에 무관하게 모두 도중에 가로막히는 일 없이 뜻대로 통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협조를 구합니다.

청(請) 조험시행 수지관자(照驗施行 須至關者) 

우관(右關, 공문의 끝을 알리는 상투어)

( ) 년 ( ) 월 ( ) 일

대월국(大越國) 관자(關者, 관계자)

협조(協助)”

여기까지 읽어 내려간 사내는, 주변의 얼떨떨해 하는 고관들은 일별치도 아니하고 마저 저의 할 말을 이어갔다.

“이러한 일을 담당하는 관부의 우두머리가 나아와, 여기 빈칸 날짜를 오늘자로 채우고 – 히즈라력(이슬람력)을 쓰든, 서방인들의 책력을 쓰든, 이곳 책력을 쓰든 무관하외다 – 거기서 왼쪽, ‘협조’ 옆에 본인의 직함과 성명을 쓴 뒤 서명하면 되오.”

허수아비 임금도, 조정의 새 실권자 정송(鄭松, 찐 뚱)도 모두 이곳 동경(東京통킹, 現 하노이)의 궁궐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작년에 작고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호르의 술탄으로 올랐으며, 가장 존엄한 말라카 공화국에서도 새로 시장으로 선출된 – 전후 경제복구와 포르투갈 본국과의 교역 보장이라는 공약 덕택이었다 – 무자파르(Muzaffar) 샤로서는, 상대가 일국의 임금이든 실권자든 딱히 주눅 들 이유가 없었다.

곧 한양에서 만국 사이의 법으로 공표될 바에 따르면, 개명된 법도에 따라 국인의 총의로써 세워진 나라와 그 군주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 하였다. 허나 더 중한 것은, 그의 뒤에는 말라카 국인의 총의뿐 아니라 – 아버지 대에 상당히 많은 분표를 사두기도 했던 – 사업당이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중국 글로 쓰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라틴어로 된 공문도 같은 내용으로 한 부 더 가져왔으니 거기에 서명해도 된다오.”

딴에는 호의를 베푼다는 듯한 무자파르의 말에, 대월국 신료들은 그들의 임금 대신 정송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어리둥절해 하고, 누군가는 곁가지로나마 바깥 천하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일을 들어 알았기에 이 기회를 어찌 쓸지를 두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송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것은 오로지 근심뿐이었다.

아, 그의 아버지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얼마나 걱정했던가? 

느닷없이 한인들과의 북쪽 국경에서 도적이 창궐하여, 그쪽으로 도주했던 그들의 숙적 막씨(莫氏)가 허망하게 무너질 때, 허수아비 임금을 비롯한 모두가 환호하였으나 이미 병이 깊었던 아버지만은 표정이 밝지 못하였다.

‘이 싸움으로 너무나 오래 시일을 끌었다. 실로 앞날이 두렵구나.’

그날 연회에서 아버지는 저를 몰래 불러내어 말씀하셨다.

‘백성을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그것은 유자(儒者)들의 몫 아니더냐?’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막씨 역적의 뿌리는 완전히 뽑혔고, 그 마지막 후손은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도망치던 중 도적에게 당해 비참하게 죽었다. 이제 다시금 여씨(레 왕조)의 아래에, 그들 정씨(찐 씨)가 이끄는 나라가 바로 서게 될 터였다.

‘너는 이미 나이가 스물을 넘었고, 나는 너의 재주를 알기에 분란의 소지를 남길 것을 알면서도 네 녀석의 모자란 형 대신 네게 바로 조정의 모든 실권을 넘겨주고자 한다. 그렇다면 네 녀석은 마땅히 아들이자 조정의 다음 동량으로서 천하의 큰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더냐?

거대한 폭풍이 이미 온 세상을 뒤엎었다.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닥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쉴 새 없는 마른 기침 사이로, 미약하게나마 간간이 섞여나오는 실망. 그것을 놓치지 않은 정송은 그 자리에서 엎드린 뒤 과감한 제안을 올렸다. 

‘이 아들,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닷새 뒤까지 그 근심의 뿌리를 알아와 아버지께 다시금 여쭙겠습니다. 바라건대 아버지께서는 그때 대책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정송은 이튿날 도성의 모든 유자들과 세상일에 밝은 상인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 귀에 전해진 바깥 천하의 모든 일을 들었다. 그로부터 헛소문과 진실을 가려내고 그렇게 얻은 조각을 짜맞추었다.

그리고 그는 깨우쳤다. 그들 대월국이 갈라져 싸우는 동안 무섭게 변해버린 세상의 법도를. 

그저 그런 나라 있다고만 알고 있던 조선국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뻗어나가 마침내 대명까지 바꾸어버린 그 무서운 폭풍을. 

그리고 그 폭풍을 일으켰으며, 그 폭풍 자체이며, 폭풍을 선도하며 또 그 뒤를 따르기도 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소문의 열 중 하나라도 진실이라면... 대체 이런 자들을 어떻게 막아야 한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어쩌면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송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아버지는 약조한 닷새가 다 지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제 자신 하나만 남았다.

“그... 이러한 서신을 받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오. 우리 대월은 오직 예를 지켜 수호(修好)할 뿐인데, 조선은 먼 나라로 그저 가끔 사신끼리 명국에서 만났을 뿐이오. 말라카나 조호르라는 나라는 더 말할 것도 없소.”

정송이 침묵하는 사이, 끝내 누군가 더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반론을 허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답변.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이 아니오. 사업당에서 그저 협조를 청하며 보내는 글이외다.”

“그 사업당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나라 사이의 법도조차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오? 그 주인이 무슨 임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사업당의 주인은 바로 그 사업에 밑천을 대는 분주들이자, 그들이 모은 밑천, 그리고 거기서 올리는 이윤 그 자체요.

조선의 임금, 조호르의 술탄인 나, 중국 땅의 학자들과 멀리 북쪽의 족장까지, 우리 모두가 분주이자, 이윤의 논리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오. 이를 막는 것이야, 그대 나라에서 알아서 할 바지만, 그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우리 사업당 소관일 것이외다.”

그리고 그 사업당은, 끝내 천하를 뒤덮는 전란을 일으켰고, 거기서 승리했다. 고작해야 나라 하나, 아니, 저들 완씨(응우옌 씨)에게 물려준 나라의 남쪽 절반을 제한 나머지 덩어리만으로는 그 힘에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말라카와 조호르에서 사업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가 아닌, 한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핏줄을 타고 태어난 군주로서 조언하겠소. 

사업당을 거스르지 마시오. 흐름을 거스르지 마시오. 그대들의 항구를 열고, 그대들 땅의 부가 더 큰 부에 합류하여, 더더욱 큰 재보로 불어나도록 하시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손해를 본다면, 그로 하여금 훗날의 이익을 생각하며 감수하게끔 만드시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불만을 품는다면, 더 큰 화란이 바깥에서 닥쳐올 것을 두려워하며 먼저 그 불만을 억누르도록 하시오. 

사업당은 모두를 번영으로 이끌 것이오. 그대들의 의사는 중요치 않소.”

눈앞의 이방인 군주의 말투는 강압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건조하였다. 마치 천하에서 가장 진부한, 모두의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기에 더 이상 대단한 소식거리도 되지 못하는 지루한 말을 읊조리는 것처럼.

그리고 이 자리의 다른 이들과 달리, 정송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저 말밖에 답이 없음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몇 달의 시일이 더 허락되어 오직 이 일에만 마음을 쏟아부을 수 있었더라도 저기서 별반 다른 답을 낼 수는 없었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정송은, 장고를 끝내고 한 발 앞으로 나아와, 그의 허울만 좋은 임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신 정송이 아뢰옵나이다. 조호르 국주(國主)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옵소서.”

이미 그 무렵에는 동경의 모든 상인들의 눈길을 끌어모을 만한 재보를 선보이며, 간만에 광동 해안 따라 이곳 앞바다까지 온 자유민주당 사람들이 다가올 천하대회와 그곳에서 있을 일확천금의 기회, 사업당의 분주가 될 기회에 대해 떠벌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임금이 무슨 어명을 내리든, 그것은 그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을 사후에 추인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주님의 해 1571년 여름, 마드리드 시내에는 청초한 노랫소리와 더불어 낯선 선율이 울리고 있었다. 

“하니양 장터에 가시나요?

인삼, 도자기, 찻잎과 향료.

거기 사는 한 사내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이는 지금도 나의 진실한 사랑이랍니다.”

가락은 스코틀랜드 민요에, 잉글랜드 사람이 번안한 가사를 다시 에스파냐 말로 옮겨 부르고, 반주는 화북에서 이호(二胡, 얼후)라고도 부르는 남호(南胡) 선율.

“그에게 내 몫의 수익을 전해달라 해주세요.

금은과 시계, 유리와 보석.

하니양 장터에서는 몇 곱절로 비싸게 팔 수 있답니다.

그래본들 무엇도 내 사랑만큼 값지지는 않겠지만요.”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 부르는 붉은 머리의 여인은 바로 동인도회사 사장 엘리자베스 튜더요, 그 곁에서 반주하는 사람은 그의 연인, 한양의 맹과 명 북경 및 남경 조정으로부터의 통첩을 들고 다시금 지중해를 건너온 타고스 박사, 이탁오였다. 

노래가 끝나자,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용병들 – 대개는 지난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제법 짭짤한 수당을 챙긴 덕에 부티가 흐르는 울루츠 알리 휘하 해적들이었다 – 너머 청중이 환호하는 소리로 광장이 다시금 메워졌다.

“암만 들어도 어째 가사에 사심이 가득한 듯한데.”

“뭐, 바다 건너에 연인 두고 있는 사람이 저 혼자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음유시인들 노래에 사랑 이야기나 멋들어진 기사 이야기 둘 중 하나가 안 들어가면 흥행하지 못하는 법이지요.”

그러나 사실 이탁오가 짚은 대로였으므로, ‘리즈’는 은근히 볼을 붉혔다.

“주변에서 떠드는 걸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따지고 보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야말로 모든 예술의 원천 아니겠소. 오죽하면 『시경』 첫머리도 <관저(關雎)>일까.”

참으로 타고스 박사다운 말이라, 엘리자베스는 어울리지 않는 배시시한 웃음으로 답하였다.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그들 사이의 눈길을 쳐다볼 수 있음을 깨달은 엘리자베스는 이탁오 손목을 잡고 무대 뒤편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노래 끝날 즈음 동인도회사 직원과 용병들이 잽싸게 천하대회 홍보하는 팜플렛을 여기저기 뿌렸으므로, 관중 중 그 누구도 이 기묘한 연인에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천하대회. 영어로 옮기면 세계의 시장(World’s Fair) 정도가 될까. 가장 빠른 배를 타고, 적당한 행운만 따른다면, 이제 인천에서 로마까지는 길어야 일 년, 짧으면 예닐곱 달이면 주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시장’ 소식은 종전 소식과 더불어 금방 지중해 해안의 모든 도시에 퍼졌다.

디오시온 수도 하니양에서 논의될 평화의 조건이 무엇일지는, 다들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상실한 고아 부왕령의 모든 영토 포기, 마닐라 포기, 칼리포르니아 ‘술탄국’과 상호불가침 등등. 

압스부르고 가문은 끝내 이 대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저지대의 독립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무너졌으며, 오스만-베네치아 연합해군의 맹공에 서지중해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중해 거점을 상실했다. 그나마 함대의 절반을 갈아 넣어가며 버틴 끝에 히브랄타르(지브롤터)에 다른 깃발이 휘날리는 것은 겨우 막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가문의 의리를 잠시 잊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함께 몰래 협상장에 나섰다. 교황의 중재 하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사이의 화약이 논의되는 기묘한 모습은, 다행히도 베네치아의 막대한 자금력 덕에 바깥에 널리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 제위는 지킬 수 있었지만, 멋모르고 전비를 대어주던 한자 동맹도시의 금융가들은 모조리 파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토시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모숨’ 제도를 도입하고 광부들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를 보전하는 것으로 물밑에서 반란을 이끈 티투 쿠시와 페루 부왕령 사이에도 협약이 맺어졌다. 비록 옛날만큼의 이익은 못 내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포토시가 세계 최대의 은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정부가 파산 위기에 처한 것이지, 상인들까지 모두 파산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약삭빠르게 ‘중국인’ 행세를 하는 유대인들은 재빨리 투자자를 모았고,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이들은 이 ‘세계 시장’ 이야기에 눈독을 들였다.

“흥, 우리나라를 짓밟아놓고 아주 둘이 잘 논다, 잘 놀아.”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애정이 식기는커녕 더 진해진 두 사람 사이에 눈총 쏘는 자가 하나 있으니,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나 생김새는 여전히 추하고 몸과 마음은 공히 소년 같은, 그러나 (또는 그로 인해) 그 아버지보다 어느새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아스투리아스 대공 돈 카를로스였다. 

“어허, 이래 봬도 이번에는 진짜 대명과 대조선국 대사로서 온 몸입니다. 언행 주의하십시오. 아, 그렇다고 지난번에 왔을 때 가짜 신분으로 행세했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오실 때 언질이라도 주시지 그랬습니까.”

“언질을 준다고 딱히 뭔가 예의를 갖출 사람은 아니잖아, 두 사람 모두.”

“저는 몰라도 여기 튜더 사장은 예의를 갖출 겁니다. 어쨌든 지중해에서 계속 장사를 해야 하는 몸이니까요.”

“그, 흠흠, 전하께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사업이라는 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양해해 주시지요.”

그 말의 함의를 깊게 생각하는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카를로스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정 양해를 바란다면, 우리 아버지 두통에 쓸 영약이라도 바치고 그런 말을 하라고. 타고스 박사 그대가 그 통첩을 전한 뒤로 하루에 두 시간밖에 안 주무시고는 대신들과 계속 대책을 논의하고 계시니까.”

“대공께서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이렇게 외국 첩자에게 밀착해서, 뭔가 흉흉한 짓을 꾸미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잖아. 회의장에서 몇 시간 동안 결론 없는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느니, 이렇게 있는 거야말로 생산적이지 않겠어?”

“하하, 한결같으시니 참 좋습니다. 덕분에 저희의 흉흉한 짓에도 제동이 걸렸군요.”

동심(童心)의 중함을 믿는 이탁오는 딱히 비꼬는 뜻 없이 웃었다.

그들이 이렇게 광장에서 손수 천하대회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은 굳이 따진다면 ‘흉흉한 짓’에 들기도 했다. 궁궐에서 펠리페 2세와 중신들이 동방으로부터의 통첩과 이 천하대회 제안을 두고 고민하는 동안, 동방무역의 재개 – 그리고 그를 위한 동방과의 평화 –를 사람들이 원하도록 만들고자 이런 소소한 일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그때, 여전히 저들끼리 시끌시끌한 광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모두 길을 비켜라!”

“달아나는 저자를 잡는 자에게 포상하겠다!”

이탁오가 벌떡 일어나 무대 위에 올라서니, 인파를 뚫고 젊은이 하나가 무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곧 무대 주변을 지키던 해적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쫓기던 젊은이는 대담하게도 그 용병들 사이로 뛰쳐들었다.

“나를 들여보내 주시오! 나는 동인도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오!”

“들여보내 주자꾸나. 뭐하는 놈인지 궁금해.”

얼추 훑어보니 – 임꺽정 따라다니며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눈썰미였다 – 암살자는 아닌 듯하였다. 때마침 카를로스도 옆에서 충동질하였기에, 엘리자베스도 용병들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젊은이가 삐져들어오기 무섭게, 그 뒤를 바짝 쫗던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관헌 하나도 용병들 앞에 당도했다.

“방금 이쪽으로 젊은이 하나가 도망치지 않았소?”

“그렇소만.”

“그자는 불온한 글을 퍼뜨리고 불충스러운 여론을 조성한 혐의를 받고 있소. 말이 혐의지, 그가 죄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소이다.”

그런데 이탁오나 엘리자베스가 끼어들기도 전, 젊은이가 언제 쫓겼냐는 듯 뻔뻔하게 말하는 것 아닌가.

“어림도 없는 소리! 나는 원래 동인도회사 직원이었소. 펠리페 폐하와 그분의 정부에 우리 회사가 한동안 반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이제 전쟁은 끝났지 않소? 그런데 내가 무엇하러 본사 방침에 어긋나게 그런 짓을 하겠소?”

“뭣?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 사람 얘기가 맞습니다. 동인도회사 사장으로서 보증하지요.”

엘리자베스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마드리드의 모든 이들은 이 붉은머리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관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 지금도, 이곳 광장과 달리 텅텅 빈 인근 거리에서, ‘악마 맘몬(Mammon, 재물의 악마)과 결탁한 붉은머리 마녀’를 규탄하는 이단심문관들의 설교가 이어지고 있는 판이었으니. (그리고 그들은 지금, 대체 왜 지금은 전쟁이 한창일 때와 달리 아무도 그들의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는가 한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눈앞에서 다 잡은 죄인을 놓치고 물러날 수밖에. 관헌과 병사들이 마녀가 어쩌고저쩌고 험담이나 하며, 힘없이 등 돌려 인파 가운데로 사라지자마자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자, 우리 회사 직원을 사칭한 것은 필시 믿는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재주가 있는지 얘기해 보세요. 어떤 기묘한 재간이든, 쓰임이 있다면 멩탐 대공(맹상군)의 예에 따라 그대를 대하도록 하지요.”

적의보다는 흥미가 가득한 물음. 젊은이는 주눅들기는커녕 그 흥미에 호응하겠다는 듯 활기차게 답했다.

“방금 부르신 그 노랫말 말입니다. 곡조는 좋은데 가사가 좀 별로입니다.” 

“그런가요?”

“예, 가사 내용과 운율을 조금만 더 손 보면, 장담컨대 미스트랄이 불기도 전 피레네 너머까지 이 노래를 유행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당신의 재주인가요?”

“예, 하필 영 불운한 계기로 깨닫게 된 재주지요. 사연을 말하자면 꽤 깁니다만...”

그런데 엘리자베스 튜더 대신 엉뚱한 사람, 곁에서 듣던 그 못생긴 녀석이 먼저 지팡이 짚고 나서는 것이었다.

“들어보자. 이놈 생긴 거나 하는 짓을 보니 꽤 재밌을 것 같아.”

엘리자베스와 타고스 박사도 솔깃하여 끄덕이는 것을 보자마자 젊은이는 저의 사연을 – 힘 닿는 한 재밌게 꾸며서 – 털어놓았다.

아버지 대부터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던 젊은이는, 전쟁이 벌어지자 신세 고쳐볼 요량으로 곧장 군인으로 자원하여 저지대로 향했다.

헌데 노략질은커녕 급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삼 년을 복무하며 급료 비슷한 것이라곤 딱 네 번 보고 말았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전쟁이 끝나니 윗선에서 한다는 말이, 그간의 복무를 감안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은 요금을 면해주겠다던가.

서슬 퍼런 진짜 군인들 앞에서는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고, 고향 마드리드로 돌아온 뒤, 이게 다 정치제도가 잘못된 탓이라며, 저 어리석은 자들이 누구 세금으로 먹고사는지만 알았다면 저들을 이리 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툴툴대고 다녔다.

때마침 이번 전쟁이 패색 짙게 돌아갈 때부터 그 원인을 정치제도에서 찾는 불순한 무리가 있었는데, 음지의 술집을 누비고 다니던 젊은이는 어느새 그들과 어울려 다니게 된 것이다.

“... 그렇게 하나가 또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그러다가 재수 없게 딱 걸려버린 것이지요.” 

엘리자베스와 타고스 박사, 그리고 누군지는 몰라도 꽤 귀한 신분인 듯한 못생긴 녀석 모두 저의 이야기 솜씨에 매료된 듯하였다. 순간의 고민 끝에 젊은이는 한 발짝 더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따지고 보면 이 불온한 사상이 퍼진 것도, 제가 급료 떼먹힌 것도 다 동인도회사와 그 위의 사업당(Saopedan)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뭐랄까, 책임 있는 상인의 자세로 저를 고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헤헤.”

그런데 이번에도 이전의 그 못생긴 귀족 자제가 먼저 나섰다.

“너, 재밌는 놈이로구나. 보아하니 제법 말재주가 있는 모양이지? 가사를 손보겠다고 한 걸 보니 그만큼 글재주도 있을 테고.”

“감히 그렇다 자부합니다만...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집안의 자제이신지 여쭈어도 될지요?”

“하기야,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에 한창 전장 돌아다녔으면 내가 누군지 모를 수도 있겠네. 카를로스다.”

“아스투리아스 대공이시기도 하지요.”

“아, 그러시구나... 아니, 잠깐? 예? 누구시라고요?”

엘리자베스가 첨언해주자, 그제야 패기어린 웃음기 가득하던 젊은이 얼굴도 잠시 혈색을 잃었다. 압스부르고 집안의 후계자 앞에서 신나게 그 집안 헐뜯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에게는 다행히도, 돈 카를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나오는 말은 제법 호의가 어려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이 노래 가사에 손 보는 일을 해주겠다고 했던가? 그 일 끝나면 궁전으로 오거라. 내가 불렀다고 하면 누구도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그, 송구하오나, 무슨 일을 맡게 될지 들을 수 있다면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토를 달 처지 아님을 깨닫고서 젊은이는 저의 입을 한 대 쳤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다행히 카를로스는 노하는 대신 피식 웃어주었다.

“너를 디오시온으로 보내련다.” 

온 천하가 임꺽정 한 사람의 뜻에 따라 한양으로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후의 세상이 갖출 모습이 정해질 것이다.

카를로스는 그 모습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마 누가 미리 알고 일러준다 한들 절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허나 어리석은 만큼 단호하게 자신이 어렸을 때 눈앞의 붉은머리 여인에게 배웠던 것을 지금도 꽉 마음 한곳에서 붙잡고 있는 카를로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다.

“가는 길의 모든 것, 가서 본 모든 것. 하나도 남김없이 글로 적어서 내게 바쳐라. 재밌고도 쉽게 글을 써야 한다. 과장도 조금 곁들여도 좋다. 단, 만약 한 쪽이라도 고리타분한 보고서를 닮은 단락이 있다면 값은 안 쳐줄 테니 그리 알거라.”

잠시 고심하던 젊은이는, 곧 이 일생일대의 도전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 전하. 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놈 이름도 못 들었구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밝혔는데,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궁전 경비병에게 언질을 넣어, 네놈 온다고 할 때 엉덩이라도 세게 두어 번 걷어차라고 해주겠다. 군화발이 채찍으로 변하기 전에 얼른 네놈 이름을 밝혀라.”

저의 실수를 깨달은 젊은이는 황급히 제 이름을 밝혔다.

“세르반테스, 미겔 데 세르반테스입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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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서두에 인용된 공문서 양식은 5세기경부터 근대까지 중국과 그 일대에서 널리 쓰인 공문서의 일종인 관문(關文) 서식입니다. 원대에 몽골어 어순을 반영한 상태로 고려에 들어온 관문 양식은 이후 명대에 다시 한문에 가깝게 정비되는데, 마침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던 조선에서도 이를 수용해 널리 쓰게 됩니다 (문보미, 2010. “조선시대 관문서 關의 기원과 수용: 행이체계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37).

작중 초반 시점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이 한 번도 비중 있게 등장하지 못한 것은, 작중 시점의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뉘어 수십여 년간 혼란기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점차 무너지던 후(後) 레(黎, 여씨) 왕조를 뒤엎은 막등용(莫登庸, 막당중)은 새로 막 왕조를 세웠으나, 남부로 도주한 레 왕조의 잔당이 곧 세력을 규합해 저항하면서 막 왕조는 금방 무너지게 됩니다. 이는 막등용 본인의 명분 없는 찬탈과 더불어, 유교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한 레 왕조의 저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검(鄭檢, 찐끼엠)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었지요.

결국 막씨 정권은 북부 산악지대로 후퇴해, 명의 부용국을 자처하며 겨우 버티는 수준으로 전락했고, 정검 사후 무능한 장남 정회(찐꼬이)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한 정송(찐뚱)에게 완전히 멸망당합니다. 한편 여씨 왕실은 복원되었으나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정씨(찐 씨) 일가가 실권을 장악하는, 고려의 무신정권이나 일본의 막부와 유사한 체제가 성립되게 되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씨에게 밀려난 완씨(阮, 응우옌 씨) 세력이 남부를 장악하면서 베트남은 사실상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형국은 18세기 말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응우옌 가문의 후계자, 가륭제(자롱 황제) 완복영(응우옌푹아인)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고 응우옌 왕조를 세울 때까지 이어지지요. 

엘리자베스 1세는 류트 연주와 노래에 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즉위 초에는 귀빈들이나 외국 대사들을 모아놓고 독주회를 열기도 했고, 중년에 접어들어 기량이 떨어진 뒤에는 뛰어난 연주자들을 후원하기도 했지요. 이는 음악이라는 색다른 매체를 통해 인기와 국정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고 흔히 해석되는데, 당대인들의 기록을 보면 그냥 엘리자베스 본인이 음악을 좋아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Butler, 2012. “‘By Instruments her Powers Appere’: Music and Authority in the Reign of Queen Elizabeth I.” Renaissance Quarterly 65(2)).

17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채록된 스코틀랜드 발라드 ‘요정 기사(Elfin Knight)’의 잉글랜드 번안판인 ‘스카보로 장터(Scarborough Fair)’는, 원 역사에서는 한참 뒤, 사이먼 앤 가펑클이 커버한 버전이 성공을 거두면서(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1966))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작중에서는 사이먼 앤 가펑클이 아닌, 대문호 세르반테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겠지만요.

1605년작 『돈 키호테』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기나긴 무명생활을 하며 궁핍하고도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외과의사 겸 이발사(당시에는 흔한 직업이었습니다)였던 아버지 로드리고 대부터 그의 집안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고, 그의 일가가 막 에스파냐의 수도로 번창하던 마드리드로 이주한 것도 아마 채무 독촉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이후 아버지의 결단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교육을 받았으나 열악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딱히 영달하지는 못한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으로 유명한 오스만-베네치아 전쟁(1570~1573)에 참전했고, 레판토 해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왼손을 잃게 됩니다. 이후 튀르크 사략함대의 습격으로 5년 간 노예로 지내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하였고, 그 이후에도 겸업 작가로 한동안 불우한 생활을 해야만 했지요. 다행히 작중에서는 인생경로가 크게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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