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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화 (1/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1화

프롤로그

나는 모든 게 다 꿈인 줄 알았다.

“겨울성의 섭리를 빨리 읽어내는 게 좋을 것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공작께서 데려온 아이니, 그리 일러주지 않아도 금방 예리하고 잔혹한 모습을 보여줄 테지요.”

많이 들어본 대사였다.

저 예리한 칼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미남자는 내가 상상해 왔던 최애캐헤론 벨라투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리고 저 대사는 헤론 벨라투가 입양 딸 비올라와의 첫 만남에서 하는 말이었다.

‘꿈이겠지?’

지극히 당연하게도.

나는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설 〈벨라투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늘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소설 속 여주 비올라 벨라투의 목표는 벨라투 공작가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결국 비올라는 천부적인 재능과 체절한 노력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비올라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지배자로서의 비올라는 성공했지만, 사람 비올라는 고독하고 외로웠다.

소설 엔딩 부근에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토록 염원하던 벨라투를 얻었다. 그러나 벨라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었구나.」

독자로서 그 부분이 늘 아쉬웠었다.

나라면 좀 다르게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이런 꿈을 꾸게 된 것 같았다.

가만있자.

지금 이 시점은 〈벨라투의 그림자) 프롤로그 시작 부분이겠네.

겨울성의 주인인 헤론 벨라투가 빈민가에 버려져 있던 비올라를 데려온 첫날.

지금 이 시점이 바로 소설의 프롤로그였다.

헤론 벨라투가 비올라를 겨울성으로 데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비올라의 ‘살인귀로서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보통 공작이 말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일곱 살 비올라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소설을 사랑해 마지않는 독자로서, 이 또한 아쉬운 부분이었다.

원래 뭐든지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지.

‘어차피 꿈이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해보기로 했다.

“아저씨가 이제 내 아버지야?”

내 목소리에 복도를 걷던 헤론 공작이 걸음을 멈췄다.

옆에 있던 한 남자도 움찔 몸을 떨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공작가의 총집사 칼튼인 것 같았다.

꿈속 아버지.

헤론 공작이 메마른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될 것이다.”

공작이 나를 입양한 이유는 살인귀로서의 재능이 출중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재능을 가졌으니 벨라투의 직계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공작의 판단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나는 원래 이용당하고버려지는 패로서 이곳에 왔다.

다만 비올라는 소설 속 주인공이었고, 주인공다운 능력으로 모든 걸 극복하고 후계자가 되고야 만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위기와 시련을 겪는다.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가족이었던 적이 있나요?”

“너는 훌륭한 벨라투로 자라주었다.

가족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군”

“그렇죠. 저와 어울리지 않죠.”

그러나 독자인 한아린은 안다.

비올라는 사실 가족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는 것을.

잔혹한 후계자 비올라 벨라투 말고.

딸 비올라 벨라투가 되고 싶었다.

결국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올라는 헤론까지 죽이며 벨라 투의 왕좌에 오른다.

참고로 이 부분에서 수많은 독자가 작가를 욕하며 하차했다.

숨겨진 뒷이야기가 많기는 하지만, 하차한 독자들은 그 대목을 읽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꿈속의 아버지, 헤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난 벨라투에 대해 많이 들어봤어.”

“어떻게 들었지?”

“합리적인 가문이랬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가문이라면서, 왜 나한테 아버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안 줘?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줘야 벨라투스러운 거잖아.”

칼튼이 나를 제지하려 했다.

“저, 공녀님?”

예의를 갖추세요. 당신은 이제 벨라투의 공녀가 되었습니다. 빈민가의 당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헤론 공작은 오히려 내 이런 도발적인 질문이 듣고 싶을 거야.

내 최애캐는 그런 캐릭터니까!

“벨라투에 대해 잘 아는 것 같군.”

“응.”

아마 벨라투 본인들보다 내가 더 잘 알걸.

“말해보아라, 네가 아는 벨라투를.”

나는 답안지를 외운 채 시험을 보는 사람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

“능력으로 모든 것이 증명되는 약육강식의 생태계.”

“형제간의 살육마저도 장려하는 비정한 가문.”

“그와 동시에 북쪽 숲,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북방의 방패.”

“오직 합리적인 선택과 가문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철혈의 공작가.”

좋아.

이쯤에서 가볍게 웃어줘야지.

씨익.

“그토록 철두철미하고 합리적인 가문인데, 왜 나한테 선택권을 안 주고 아저씨 마음대로 했느냐고 묻는 거야.”

“듣고 보니 그렇군.”

공작이 내게 물었다.

“내 딸이 되겠느냐?”

“응. 좋아.”

“선택이 빠르군.”

“응.”

“이유는?”

“아버지가 잘생겨서.”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확히 해줘. 우리가 부녀가 된건 아저씨의 선택이 아니라 내 선택이야. 예비 아버지는 내게 ‘제안’을 한 거고, ‘내가 제안을 받아들인 거. 맞지?”

“그래.”

“재미있을 것 같아.”

헤론 벨라투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냥 차가운 듯 보이는 그 눈동자 속에, 호기심이 감춰져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꿈은 언제 깨는 거지? 썩 나쁘지 않은 꿈인 것 같기는 한데.

슬슬 깨겠지, 뭐.

내가 다시 물었다.

“나는 이제 아저씨의 딸이니까, 후 계자 자격이 있는 거지?”

“물론.”

“알겠어. 나를 데려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 그리고 말이야.”

제물로서의 입양 딸 말고, 자극제로서의 도구 말고,

“이왕이면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어.”

소설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깝던지.

비올라는 결국 지배자가 되지만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모두가 비올라를 두려워했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해줄 거지?”

“…….”

“나는 늘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어. 말로만 아버지 말고, 진짜 아버지가 되어줘.”

내가 생각했던 프롤로그에서의 비올라 벨라투.

완벽하게 해낸 것 같아.

뭐랄까.

성덕이 된 것 같다.

애정했던 소설 속에 들어와 소설을 바꾸다니.

이거야말로 몸으로 쓰는 팬픽 아니겠는가!

꿈이 오래가서 다행이야.

공작 옆을 힐끗 쳐다봤다.

총집사 칼튼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멀끔한 정장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얼굴에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다.

총집사의 속이 훤히 보였다.

저 입양 딸 곧 죽겠군.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헤론 공작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헤론 공작의 이명은 ‘천살(千殺) ) 공작’이다.

벨라투의 수장이 되기까지 무려 천명의 사람을 죽였다 하여 붙여진 이 명이었다.

순간, 무시무시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으억!

나도 모르게 찔끔 놀랐다.

이게 소설 속에 나오는 살기인가.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전기가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덜덜 떨리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쯤 되니 조금 이상했다.

이거, 왜 이렇게 생생한데?

왜 안 깨는데?

“재주껏 살아남아 보도록. 내 직접 죽이지는 않을 테니.”

어딘지 모르게 불길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왜 꿈이 안 깨지?

***

헤론은 서재의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재미있군.”

처음 비올라를 발견했을 때.

비올라는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똑똑 떨어지는 물든 유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저만치 멀리, 비올라를 납치하려던 노예 상인이 목을 움켜쥐고 쓰러져 있었다.

‘일곱 살. 그것도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아이가 그렇게 했다.

역사서에 몇 번인가 모습을 드러낸 ‘살성(殺星)‘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같았다.

그게 신기해서 데려왔다.

일종의 변덕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동물을 발견하여, 나만이 볼 수 있는 동물원에 가둔 것에 가까웠다.

입양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아이는 일곱 살답지 않았다.

그토록 철두철미하고 합리적인 가문인데, 왜 나한테 선택권을 안 주고 아저씨 마음대로 했느냐고 묻는 거야.’

총집사 칼튼이 말했다.

“공작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재미가 있더군.”

“무엇이 말입니까?”

“말의 내용은 일곱 살보다 훨씬 어른의 것이고, 말투는 그보다 더 어린아이의 것이지 않은가.”

말의 내용도 일곱 살답지 않고, 발음도 일곱 살답지 않았다.

“본인이 일곱 살로 밝히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다섯 살 정도의 발육 상태입니다. 아마도 제대로 먹지 못해 성장이 매우 느렸던 것 같습니다. 혹은 자신의 나이를 헷갈리고 있거나요.”

“제 나이를 헷갈릴 아이로 보이던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하는 정신과, 말을 내뱉는 몸이 다른 느낌이더군.”

헤론은 비올라의, 아니, 아린의 상태를 정확하게 읽어냈지만 그게 빙의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부자연스러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칼튼도 빙의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그 이유를 짚어냈다.

“당당한 척했지만, 결국 긴장했다는 얘기군요. 그렇다면 어색할 법도 합니다.”

말하던 칼튼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그렇게 긴장을 한 상태로, 두려운 상태로, 헤론을 상대로 그만한 말들을 했다.

그 작은 여자아이가 엄청난 강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공포를 이겨내는 굳센 정신력. 그것을 좋게 보셨군.’

칼튼이 보기에 비올라는 첫 단추를 아주 잘 끼웠다.

벨라투에 입양된 일곱 살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소 무례했던 태도가 문제 될 법했지만, 공작이 개의치 않으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공작은 다른 부분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왕이면 나를 사랑해 두면 조케떠.

벨라투의 그 누구도.

저렇게 당당하게 애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비올라는 달랐다.

뻔뻔하고 당당하게 사랑해 달라고 요구했다.

중요한 건, 그 모습이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다는 것이었다.

처음 접해보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작았다.

공작가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떻게 봐도 일곱 살처럼 보이지 않았다.

손에 넣고 쥐면 부서질 것처럼 가늘었다.

공작이 물었다.

“칼튼. 네가 보기에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벨라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지?”

“제 생각으로는 40% 미만일 것 같습니다.”

“그렇군.”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사람의 진심을 읽어내는 본능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그것을 일컬어 ‘진안(眞眼)‘이라 불렀다.

진안으로 읽어냈다.

비올라에게는 헤론 자신을 향한 매우 큰 호감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가족을 원했다는 것도 진심이었다.

비올라는 마치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아이처럼 굴었다.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이해가 안 되었다.

‘왜 나를 좋아하는 거지?’

언제 봤다고?

단순한 호감 정도가 아니었다.

약간의 그리움과 애정마저 묻어 있었다.

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족의 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곳.

겨울성의 지배자인 헤론 벨라투는 그 이유 없는 호감이 굉장히 낯설었다.

헤론이 말했다.

“제논을 집사로 붙여.”

“……제논을 말입니까?”

집사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유능한 녀석입니다만.

그 말을 참았다.

재차 확인했다.

“임시 집사가 아닌 정규 집사입니까?”

“그래.”

이곳에서는 공작의 말이 곧 법이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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