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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2화 (2/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2화이틀이 지났다.

비올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손톱도 물어뜯어 봤다.

“이게 왜 때문이야?”

꿈에서 왜 안 깨지?

꿈이 맞기는 한 건가?

무려 이틀이 흘렀다.

그간 아무도 비올라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 넓고 푹신한 하얀 침대에는 무슨 마법이 걸려 있단다.

닿기만 해도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아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몸을 일으켜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영차.

키가 무척 작았다.

의자 위에 앉았는데 다리가 땅에 닿지도 않았다.

‘너무 생생해.’

이쯤 되면 비올라도 ‘빙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빙의를 했다고?’

그것도,

‘만살 공녀 비올라의 몸에?’

천살 공작 아버지를 이어 만살 공녀로 거듭나는 주인공에 빙의했다.

만살(萬殺).

만 명의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말도 안 돼.”

아니야.

이거 아니라고.

난 꿈인 줄 알았다고.

어떻게 이 말도 안 되는 기현상을 실제라고 생각했겠냐고!

머리카락을 또 쥐어뜯었다.

‘빙의한 게 맞아.’

피의 가문.

철혈의 공작가.

벨라투의 입양 딸이 되어버렸다.

‘내가 만약 여주가 된다면.

이런 상상을 많이 해보기는 했지만, 이게 실제로 벌어질 줄은 몰랐다.

이틀하고도 열 시간가량이 지나서야 아린은 인정했다.

21세기를 살아가던 아린은, 입양딸 비올라 벨라투가 되었다.

책상에 앉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고 했다.

후우.

호흡을 골랐다.

이곳은 철저하게 능력을 증명해야만 하는 곳이다.

벨라투가 벨라투답지 못한 순간, 형제들에게 사냥당한다.

혹은 숙청당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 볼 때는 긴장감 가득! 가슴 쫄깃한 세계관이었는데.

막상 등장인물 입장이 되니 개똥이었다.

‘우선 벨라투의 사이코들이 날 벨라투로 인정하게 만들어야겠지?’

일단 살아남아서 인정받아야 한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다음 1공녀를 후계자로 밀어주는 거야.”

원작 속 비올라가 간악한 수작만 부리지 않았다면 1공녀는 무난히 후 계자 자리를 차지했을 거다.

후계자가 선택되면, 형제들 간의 전쟁도 끝이 난다.

위험천만한 임무들도 사라지게 될 거다.

‘그래. 1공녀를 공작으로 만들자.

원작 속 비올라와 똑같이는 못 한다.

똑같이 하려면 만 명을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죽이기도 싫고, 죽기도 싫다.

비올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독자였던 아린은 비올라가 불쌍했었다.

지배자가 될 생각도 없지만, 외롭고 불쌍한 지배자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는 이 소설을 여러 번 정주행했고 작가의 블로그에 적혀 있던 설정집까지 독파했다.

‘나는 다르게 살 거야.’

내 옆에 아무도 남지 않는 결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속으로 다짐하고 세뇌했다.

‘그래. 이건 몸으로 쓰는 팬픽이야.’

잘못 쓰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빙의를 완전히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어중간한 마음과 자세로는 이 철혈의 공작가에서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다.

비올라가 된 아린은 죽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어렸던 아린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거 알아? 쟤 엄마는 죽었고 아빠도 없대.’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쟤 보육원에 산대.

한아린은 고아였고, 보육원에서 자랐다.

보육원 선생님들은 따뜻했지만 그들이 부모의 자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선생님, 아빠는 언제 저 데리러 와요?’

아빠는 분명히 백 밤만 자고 나면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게 다섯 살 때 일이었다.

하지만 백 밤이 지나고 이백 밤이 지나도 아빠는 오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아린은 알게 되었다.

‘나는 버림받은 거야.’

어린 아린에게 가족은 없었다.

비참했다.

남들은 다 있는 엄마 아빠가, 나만 없는 것 같았다.

그 공허한 허탈감이 삶에 염증을 느끼게 만들었다.

열다섯 살의 아린은 학교 옥상으로 걸어 올라갔었다.

난간 위에 올라섰다.

저만치 아래, 딱딱한 땅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이 없어도 괜찮았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내가 커서 좀 더 괜찮은 어른이 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면 되잖아.

나는 내 가족을 버리지 않을 거야.

나 같은 아이를 또 만들지는 않을 거야.

열다섯 살의 아린은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때 이후로 아린은 늘 최선을 다해 살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친구도 많이 생겼고, 좋은 대학교에도 합격했다.

나라에서는 잘했다며 장학금도 지원해 줬다.

대학교 합격 날.

친구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대단하다. 진짜 축하해!’

‘아린이 넌 뭘 해도 될 줄 알았어!’

아린은 늘 최선을 다하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준비할 때에도 최선을 다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깜빡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비올라의 몸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비올라가 된 아린은 또 결심했다.

‘그래도.

이곳에는 일단 아빠라는 존재가 있기는 했다.

그녀의 인생에 처음으로 가족이 생겼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헤론 벨라투는 사실 아버지로서는 0점짜리, 아니, -100점짜리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린은 싫지 않았다.

잔인한 후계 경쟁을 시키는 쪽이, 버리고 가버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적어도 옆에는 있어주니까.

‘소설을 전부 읽어보면 헤론 벨라 투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헤론 벨라투가 그저 미친놈인 줄 알았다.

그러나 헤론에게는 헤론의 사정이 있었고, 아린은 독자로서 헤론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했었다.

그렇기에 최애캐가 될 수 있었겠지만,이곳에는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정신은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토록 갈망해 왔던 사람들이.

갈 길이 아주아주 멀지만, 아무튼 생겼다.

‘그래. 멘붕은 이제 끝!’

이 세계에 적응해서.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아 보기로 했다.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칼튼. 네가 보기에 그 아이가, 성인 이 될 때까지 벨라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지?”

“제 생각으로는 10% 미만일 것 같습니다.”」

비올라는 알지 못했다.

칼튼이 실제로는 이렇게 얘기했을 줄은.

‘제 생각으로는 40% 미만일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는 10프로.

현실이 된 지금은 40프로를 언급했다.

비올라는 소설 속 내용을 계속 떠올려 보았다.

「“제논을 임시 집사로 붙여.”

“알겠습니다.”

역시 이 부분도 몰랐다.

소설 속에서는 임시 집사.

현실이 된 지금은 정규 집사가 되었다.

그녀는 몰랐다.

그녀가 입양 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린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임시 집사 제논.

제논은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 검술가였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여 제국의 1급 정규 기사 스무여 명을 한자리에서 몰살시키고, 벨라투에 몸을 의탁했다.

‘비올라의 자질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관찰하는 감시자 겸 유능한 집사.’

제논은 처음에 비올라를 인정하지 않는다.

작품 중반부에 가서야 비올라를 완전히 인정하고, 비올라의 최측근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제논에 대한 설정을 떠올렸다.

보라색 머리카락.

선한 인상의 잘생긴 얼굴.

따뜻한 미소.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몸가짐과 태도.

「그러나 그는 늘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비올라를 관찰하곤 했다.」

이 정도가 제논에 대한 묘사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공녀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새로이 집사로 배정된 제논이라고 합니다.”

비올라는 귀를 의심했다.

‘응?’

미묘하게 달라졌다.

「“비올라 공녀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새로이 임시 집사로 배정된 제논이라고 합니다.」

‘임시 집사’가 아니라 ‘집사’라고 했다.

비올라가 몸을 일으켰다.

방문 쪽으로 걸어가서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문고리는 왜 이렇게 높아?’

판타지 세계라서 그런가.

문고리가 상당히 높았다.

그게 아니면, 일곱 살 비올라의 몸이 또래의 일곱 살보다 훨씬 작은 것일 수도.

팔을 높이 들고 발뒤꿈치까지 들고 나서야 문고리에 손이 닿았다.

문을 열자 제논의 얼굴이 보였다.

‘와, 키 크다.

작품 속 묘사 그대로였다.

보라색 머리카락부터 따뜻한 미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워 보이는 눈동자까지.

그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눈은 가늘게 뜬 채.

“직접 문을 열어주셨네요?”

“응.”

“다음부터는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문을 여는 사람은 집사이지, 공녀님이 아니니까요.”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비올라는 설정상 살기를 타고난 캐릭터였다.

아린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비올라의 눈빛에는 살기가 묻어 있었다.

“나한테 훈계하는 거야?”

제논이라는 캐릭터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제논은 늘 비올라를 시험하는 캐릭터다.

“훈계라고 느끼셨나요?”

“아니라고?”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논은 스스로의 실수를 재빨리 인정했다.

문을 직접 열어주는 공녀의 모습이 어리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긴장을 조금 풀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판단한 모양이었다.

“집사의 역할은 조언이지 훈계가 아니야. 명심해.”

“명심할게요.”

비올라 벨라투로서 살아남는 방법.

그것은 벨라투다운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벨라투로서의 위신과 권위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원작 속 비올라도 위신과 권위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공포와 힘으로 억눌렀고, 결국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잃었다.

비올라가 말했다.

“벨라투에서는 집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들었어.”

벨라투의 집사들은 후계 경쟁에 꿩장히 깊게 관여한다.

후계 경쟁에서 도태된 후계자를 돕던 집사들은 숙청당하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한다.

반대로 후계자를 세운 집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기도 한다.

“나는 내 집사의 얼굴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러셨군요.”

“내가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는 건 그런 의미야.”

“그런 뜻이 숨겨져 있는지는 몰랐어요, 죄송해요.”

제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싱긋.

제논이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제 얼굴은 이렇답니다. 비올라 공녀님께서 이토록 총명하시니 집사인 저는 정말 기쁘네요.”

“나도 네가 마음에 들었어.”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는데도요?”

“응.”

한아린은 독자로서 이 세계를 많이 접해봤다.

어떻게 하면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훌륭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나한테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집사잖아. 벨라투의 공녀가 직접 문을 열어주는 건 벨라투답지 않아.

너는 문제를 잘 짚었어.”

이 작품의 진성 독자로서, 핵심을 짚었다.

“내가 거슬렸던 건 말의 내용이 아니라, 네 태도야.”

제논은 한참이나 비올라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약간은 충격을 받았다.

저 말이 맞았다.

‘저 보라색 눈동자가…… 이따금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하지요?’

살성(殺星)의 자리를 타고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나면서부터 살기를 가진 사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살기 갈무리를 잘하고 있다.

는 얘기였다.

‘생각보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공녀님께서 벨라투가 되셨군요.

비올라가 말했다.

“제논, 네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릴 거야.”

제논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원래 오늘은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 이 벨라투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

지금 비올라 공녀가 처하게 된 상황.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러한 것들을 간략하게 브리핑하려고 했다.

만난 첫날. 그것도 만난 지 10분이 안 되는 짧은 타이밍에 공식적인 첫 번째 명령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는데, 이 어린 공녀님은 자신의 역할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 첫 번째 명령을 내려주세요.”

비올라의 첫 명령을 들었을 때, 제 논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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