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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4화 (4/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4화

“저는 공녀님을 감시하는 감시자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조력자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러니 자주 애용 부탁드릴게요.

이래 봬도 저 꽤 유능하답니다.”

비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유능한 게 확실해?”

암요. 잘 알지요.

작중에서도 여러 번 언급됩니다요.

‘제논은 굉장히 뛰어난 집사였다.

라는 서술이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나온다.

작중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뛰어 나다 묘사되는 인물은 별로 없었다.

“제가 못난 모습을 보여 드리기는 했지만, 일단은 유능하다고 주장해 보려 합니다. 안 될까요?”

“스스로 무능하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낫지.”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말했다.

“두 번이나 실수했으니, 잘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제논이 허리를 숙였다.

“집사. 제논입니다.”

비올라는 남몰래 제논의 눈치를 살폈다.

어렸을 적부터 눈치 빠르단 얘기를 많이 들었을 뿐더러, 소설을 이미 읽은 상태다.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인데.”

호기심을 겨우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질문해 봐. 그 질문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정말요?”

“질문하고 싶어 죽겠는 표정이잖아.”

“티 났나요?”

“응.”

제논이 볼을 살살 긁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비올라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통찰력인가요, 눈치인가요?’

당연하게도, 제논은 비올라가 소설을 읽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빈민가에서 자랐으니 눈치가 빠른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만…….

일단은 눈치가 빠르다고 결론을 내린 뒤 물었다.

“왜 비첸 공자님이 안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원작에서는 ‘네 알 바 아닐 텐데, 라고 대답한다.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네 알 바 아닐 텐데.”

“그건 그렇죠?”

아린은 조금 다르게 각색했다.

원작 속 비올라보다 더 좋은 방법을 선택했다.

“안아보면, 체형을 분석하기 좋잖아. 약한 부위를 파악하기도 쉽고, 검을 쥐었을 때 팔 길이는 어떻고, 신체 각 부위의 두께에 따른 기동성을 가늠해 볼 수 있고, 근육의 결을 만져보면 어느 부위의 근신경계가 발달했는지도 대략적으로 살필 수 있잖아. 그래서 안는 걸 허락했어.”

제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빈민가 출신 일곱 살짜리 여자애라고 들었는데.

배우지 않았다면, 이건 타고난 본능이라는 소리였다.

제논이 당황스러움을 감춘 채 다시 말했다.

“그건 비첸 공자님에게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문제가…… 안 되는군요.”

제논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단하네요.

솔직하게 감탄했다.

벨라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이지만 벨라투가(家)에 도착한 지삼 일밖에 안 된 소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제논이 비올라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라 할 말이 없어요. 솔직히 거기까지 계산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

“문제가 안 된다. 대단한 자신감이 실로 아름다우세요, 공녀님.”

제논이 앞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작은 칼이었다.

비올라는 찔끔 놀랐다. 그렇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제논은 비올라의 소매 근처에 튀어 나온 실밥을 정리해 주었다.

아주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원작에는 없던 상황인데?”

제논이 원작보다 조금 더 다정했다.

“저는 공작님께 보고를 올릴 겁니다.”

“너는 네 일 해.”

“그런데 그 내용을 공녀님께도 알려 드릴 예정입니다.”

제논이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보고서인 듯했다.

이 역시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겨울성의 절대자가 되기에 필요한 기본 소양은 갖춘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한 절대자를 향한 본능적인 지배욕과 야망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벨라투에게 반드시 필요한 광기(狂氣)가 있습니다.]

[그 광기를 제어할 이성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더 잘한 게 맞기는 한데.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본능적인 지배욕?

야망?

“이걸 왜 나한테 보여줘?”

원작에서는 안 보여주잖아.

“공녀님의 자질과 재능은 충분히 보았습니다. 공녀님의 의도대로, 비첸 공자님과의 만남에서 그 자격을 충분히 증명하셨지요.”

“………..”

“따라서 저는 공녀님을 차기 공작으로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공녀님도 원하고 계시지요?”

아니다.

만살 공녀가 될 생각은 없다.

일단 그냥 살아남는 게 목표다.

후계자 자리를 1공녀에게 던져주는 것이 플랜이다.

그리고 살인 기계 혹은 만살 공녀말고, 사람 비올라로 살고 싶다.

‘제발!’

겉으로 티 낼 수 없는 간절함이 눈빛에 깃들었다.

“저는 읽을 수 있답니다. 그 눈빛에 담긴 간절함을.”

그 간절함이 아니라고!

“그런 눈동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

“노력하겠습니다, 공녀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래도 일단 할 일은 하기로 했다.

·가족 관계도를 구해와.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좋아.”

***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비첸과의 만남은 정신없었고, 제논과의 대화는 두려웠지만 어찌어찌 잘 넘긴 것 같았다.

‘후우.

침대에 누워 심호흡을 해봤다.

아린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살아남을 거야.’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벨라투에 부끄러운 공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벨라투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비올라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것이다.

‘후우.

깊은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른다.

일단 지금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비첸, 지금쯤 맞고 있겠지?’

소설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비첸, 그 아이를 어떻게 보았니?”

“재미있었어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회초리를 들어올렸다.

이 회초리는 아이실라나무로 만든 얇은 회초리였다. 아이실라는 남쪽 지방언어로 ‘사랑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말이 회초리지 사실은 채찍에 가까운 형태여서 누군가는 채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아이는 네 적이 될 아이야.”

“적에게 그렇게 유한 태도를 보여서 되겠니?”

“적은?”

“짓밟아야 해요.”

“잘 아는데 왜 그랬을까?”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면?”

“혼이 나야 해요.”

“잘 아는구나. 회초리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 내 아들.”

비첸은 묵묵히 무릎을 꿇고 회초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비첸은 어머니인 이사벨라 공작 부인에게 대들지 않고 묵묵히 벌을 감당한다.

「“왜 우니? 벨라투가 눈물을 보여서 쓰겠어?”

“어머니 손에서 피가 나잖아요.”

아이실라나무껍질은 사람의 피부에 닿으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심한 화상을 입기도 하는데, 이사벨라 공작 부인 이 그랬다.

회초리질을 할 때면 이사벨라 공작부인은 늘 화상을 입었다.

비첸은 자신이 맞는 건 아프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손이 아픈 건 괴로웠다.

「“아프지 마세요.”」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버티지 못할만큼의 벌을, 비첸은 매번 묵묵히 감당했다.

그러고서 초인적인 회복력으로 하루나 이틀 만에 일상으로 돌아온다.

는 것이 작품의 설정이다.

‘비첸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비첸뿐만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새벽 1시.

창밖으로 푸른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손뼉을 짝! 쳤다.

“제논.”

그러자 얼마 후 방문이 열렸다. 제 논이 들어왔다.

“갈 곳이 있어. 안내해.”

“이 시간에요?”

제논은 평소와 같았다.

새벽 1시의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래.”

“어디로 안내할까요?”

“비첸의 방.”

제논의 시선이 비올라를 향했다.

“비첸 공자님은 쓰러져서 힘들어하실 텐데요.”

단순히 회초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 엄마한테 혼났다는 그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나 때문에 엄마 손이 힘들었어. 내가 잘못해서. 나는 나쁜 아이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중얼거리고 있을 터였다.

“알아.”

“알고 계셨어요?”

제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알고 계세요?”

“가족 관계도 봤잖아.”

제논이 더 의심하기 전에,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만약 이 집안의 세 번째 암사자라면, 순혈이 아닌 적을 먼저 찾아간 아들을 호되게 혼낼 거야.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그 유명한 퀄튼가(家) 출신이니 손속이 무자비할 테지. 무서운 훈육을 당한 비첸은 쓰러져 신음하고 있을 거고.”

“아하. 그럼 쓰러진 비첸 공자님을 찌르실 계획인가요?”

제논이 은근슬쩍 단도를 내밀었다.

칼날에 보랏빛 반고체가 묻어 있는 데, 딱 봐도 맹독이었다.

“감당이 되겠어? 난 이미 절대 법칙에 대해 배웠는데.”

하나, 겨울성 내에서는 폭력을 저지르거나 살인을 할 수 없다. 절대자인 공작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둘, 열 살 이하의 모든 어린아이는 보호받는다.

“내가 지금 쓰러져 있을 비첸을 죽이면, 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제논은 사형일걸.”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나도 집사가 죽으면 곤란해.”

비올라가 된 아린에게도 제논은 필요한 인물이었다.

“왜요?”

여기서 ‘왜요?‘라고 물을 줄 몰랐다.

비올라는 약간 당황했다.

내게 필요하니까. 이렇게 말할 것을 저도 모르게 풀 네임으로 말했다.

마치 제삼자가 된 것처럼. 독자일때의 습관이었다.

“비올라 벨라투에게 필요한 인물이니까?”

제논은 잠시 침묵했다. 그냥 비올라가 아니라 비올라 ‘벨라투’라고 표현했다.

제논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저 한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벨라투를 굳이 짚으시는군요.

저 작은 소녀는 이곳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치가 아니었어.’

그저 눈치 빠른 빈민가 출신 소녀가 아니었다.

눈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제논은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벨라투께서 필요하다 말씀하시니, 힘이 솟네요.”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도 애용 부탁드립니다. 집사, 제논입니다.”

“그래.”

아린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제논은 비올라의 충실한 집사이기는 하지만, 그건 후반부에서나 그렇다.

처음부터 비올라를 진심으로 모시지는 않는다.

비올라가 자신이 모시기에 적합한 인물인지 끊임없이 시험하고 판단한다.

원작에는 이런 서술도 존재했다.

「“만약 공녀님이 벨라투에 어울리시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공녀님의 목을 유품으로 기념하며 자살했을 것 같네요.”」

소설 후반부, 비올라와 많이 친해진 제논이 농담 식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독자였던 한아린은 안다.

그 말의 절반 이상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로 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이쪽입니다.”

기나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계단도 올라야 했다. 이 저택은 굉장히 넓었고, 꽤 오래 걸었다.

“이곳이 5공자. 비첸 님의 방입니다.”

“수고했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 문을 열면 피폐한 상태의 비첸이 있을 거다.

“문 열어.”

“노크 없이요?”

“그래.”

“알겠습니다.”

새벽 1시.

굉장히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끼익—

아주 작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낯설고 이질적인 분위기와 냄새가 느껴졌다.

소설 속 글자로만 느껴보았던, 머리로만 생각했던 피폐한 냄새.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그 냄새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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