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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5화 (5/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5화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그렇지만 분명 피폐함이 느껴지는 문 사이로, 누군가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비첸의 집사였다.

“비첸 공자님께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공녀님께서는 비첸 공자님을 꼭 만나셔야겠다는데요.”

“비첸 공자님이 싫다고 하십니다.”

“공녀님은 좋다고 하시는데요.”

비첸의 집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논, 경고한다. 입 다물어.”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비올라는 스파크가 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제논이 비올라를 쳐다봤다.

“그렇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제압할 수 있겠어?”

제논은 비올라와 비첸의 집사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봤다.

비첸의 집사는 황당한 듯했다.

당사자 앞에서 제압할 수 있냐 없냐를 논하고 있다니.

그런데 또 그 모습이 지극히 벨라 투다워서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제논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했다.

“글쎄요. 아시다시피, 이 집안의 집사분들은 모두 강자라서요.”

“할 수 있어, 없어?”

“어려울 것 같긴 하네요.”

제논이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못 할 것 같지도 않아요.”

“제논,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우리가 서로 말을 편하게 할 만큼 친한 사이였나요?”

제논이 집사의 목에 단도를 들이밀었다.

“겨울성의 법칙을 무시할 셈이냐?”

“그래서 아직 못 찔렀습니다.”

비올라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아직 못 찔렀습니다. 이 말뒤에.

‘그게 없었으면 이미 당신은 찔렸습니다.

라는 말이 생략된 거 같았다.

비올라는 몸을 부르르 떨 뻔했다.

저 따뜻한 표정과 온화한 미소 뒤에, 저 섬뜩한 살기라니.

‘무서워하는 걸 들키면 안 돼.’

무서움을 감추기 위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빨리 걸었다.

살기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비올라의 ‘몸’은 살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아린의 ‘정신’은 그 살기를 감당하기 버겁고 두려웠다.

비첸의 방은 꽤 컸다.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비올라가 방 안으로 사라진 이후, 제논이 단도를 거두었다.

“봤죠?”

“그래.”

비첸의 집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네게 밀쳐진 그 정확한 틈과 타이밍. 그걸 놓치지 않고 들어가셨네. 발걸음에 지체함이 전혀 없어.”

“빠른 결정력과 행동력.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집요함. 벨라투의 기본 덕목이죠.”

비첸의 집사가 물었다.

“내가 진짜로 말렸으면, 너는 날 찔렀을까?”

“그랬겠죠?”

속 편히도 말하는군.”

“거짓말보다는 낫잖아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좋은 분을 모시게 됐군.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모실 생각이야?”

“네, 일단은요. 야망과 지배욕이 엄청나신 것 같아요.”

“그래?”

“노력의 영역이 아니에요. 지배자로서의 운명을 타고났어요.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만난 지 10분 만에 첫 번째 명령이 제 오라비를 중독시킬 신경독을 구해 오라는 것일줄.”

“………..”

“게다가 저를 무척이나 합당하게 혼을 내셨어요. 마치 이 벨라투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행동하시더라고요.”

“그게 가능한 얘기야?”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해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역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비올라가 들었다면 기함하고, 숨이 턱! 막힐 대화가 오갔다.

***

‘휴, 이제야 멀어졌네.

비첸의 방은 정말 컸다.

200평은 될 것 같았다.

거실 딸린 방이 몇 개인지 얼른 파악이 안 될 정도였다.

끼익—

문을 열었다.

저만치 앞. 푸르스름한 달빛이 새 새어 들어오는 커다란 창가 아래.

크게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비첸이 보였다.

‘으.’

무서웠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발악하기 직전의 맹수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포는 한순간이야.

이곳에서, 이런 건 일상이다. 그냥 피 냄새가 아니라 잘린 목이 돌아다.

닐 수도 있는 세계다.

익숙해져야 했다.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꼴이 말이 아니네.”

비첸은 창가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비올라는 비첸을 지나쳐 테이블 앞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비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많이 맞은 거야?”

입술을 한 번 핥았다.

비올라라면 이 타이밍에 입술을 핥을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했다.

“응.”

“피도 많이 났고.”

“오늘은 조금밖에 안 났어.”

비올라가 흐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품평하듯 비첸의 몸을 살폈다.

“아이실라 회초리?”

“응.”

비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 몸에 난 붉은 상처보다, 엄마의 화상이 더 무섭고 힘들었다.

“아팠겠네.”

“응. 어머니도 많이 아팠을 거야.”

“어머니는 어머니의 선택이잖아.”

“내가 잘못해서 그래.”

“그래? 네가 잘못한 거야?”

“응. 내가 나쁜 비첸이었어.”

해맑게 대답하는 비첸의 모습에, 문득 가슴이 아파왔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원했던 가족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괜스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비올라가 비첸에게 다가갔다.

“등 돌리고 앉아.”

“왜? 찌르려구?”

비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해맑게 되물었다.

“여기는 겨울성 안인데? 찌르면 너 큰일 난다?”

“안 찔러.”

그 말에, 비올라는 원작 속 비올라스럽게 말했다.

“언젠가 오빠를 내 발아래 무릎 꿇릴 거야.”

“정말?”

“바닥을 기며, 배를 까고 꼬리 치는 날이 오겠지. 개처럼.”

비첸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울고 싶었다.

이딴 말에 생기가 도는 오빠라니.

“근데 이렇게 초라한 오빠는 싫어.”

“왜?”

“초라한 오빠를 짓밟는 건 재미없잖아.”

비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건 그래. 히히.”

그러고서 등을 돌렸다.

“이렇게, 등 돌리면 돼?”

“응.”

비올라는 품속에서 연고를 하나 꺼냈다.

‘어휴. 아무리 판타지 세계의 미친 공작가라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이걸 일반적인 훈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비첸이 아이실라나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체질이었다면, 과연 이사벨라는 회초리를 들지 않았을까?

쫑긋.

비첸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마치 토끼 같았다.

비올라가 뭘 꺼내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비첸이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칼 꺼내는 거야?”

“아니.”

“그럼? 독?”

“아니.”

“그러면?”

비첸은 더욱 생기발랄해졌다.

“혹시 염산?”

후우.

이놈의 머리를 열면 도대체 뭐가 나오는 걸까.

“닥쳐.”

“응.”

‘아, 그래도. 진짜 이건 너무하네.”

아무리 머릿속에 칼침과 염산과 독밖에 없는 아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여덟 살짜리 어린애다.

‘이렇게 작은데.’

21세 아린이 보기에는 정말 작은 등이었다.

이건 진짜 너무 심했다.

어떻게 어머니란 사람이 아들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어른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잦은 벌을 받은 이 아이의 등은, 여덟 살 어린아이의 등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약을 발라본 적이 없는 아이의 등에, 조심스레 약을 발라줬다.

“따, 따갑도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투도 괴상했다.

“엄살 부리지 마.”

“이건 무슨 독이야? 처음 느껴봐.”

“독 아니고 연고.”

비첸은 한동안 비올라의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연고’ 라는 것이 치료하기 위한 약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연고를 발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발라준 적도 없었고, 비올라는 가슴이 조금 더 아팠다.

‘연고를…… 아주 특별하게 제작된 특수한 독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네.”

답답하고 황당하면서도 가슴이 아렸다.

“말했잖아. 초라한 오빠를 무릎 꿇리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아프지 말고, 빨리 나으면 좋겠어.”

왜?”

비올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열심히 내뱉었다.

“그래야 죽일 맛이 날 테니.”

그랬더니 비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이상하네.”

순간, 비올라는 찔끔 놀랐다.

내, 내 연기가 너무 어색했나 싶어 긴장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비첸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심장 부근이었다.

“근데 비올라.”

“왜?”

“나 여기가 욱씬욱씬해. 기분이 이상해.”

특히.

‘아프지 말고, 빨리 나으면 좋겠어.”

이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나 왜 웃는데 눈물이 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독 먹인 거야?”

“………..”

“언제 먹였어?”

“………..”

“실력 좋다야.”

“………..”

“근데 넌 왜 눈시울이 붉어? 너도 독 먹었어?”

비올라는 소설 속 진짜 비올라처럼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다.

누구보다 가족을 꿈꿔왔고, 자신이 누군가의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던 사람이다.

여덟 살짜리 어린애의 등에 새겨진 상처를 보니 그녀도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독 먹일 거였으면, 이렇게 시시한 독 안 먹였어.”

“하긴. 그건 그래. 히히.”

“그리고 실망할 뻔했어.”

“왜, 왜?”

“벨라투의 공자가 눈물을 보였잖아.”

“나는 슬프면 눈물이 나는걸?”

비올라는 다 안다.

비첸이 울었던 이유.

내 아픔보다 엄마의 아픔이 더 아파서였다.

이제부터는 원작을 비틀기로 했다.

비첸이 비틀린 살인귀가 되는 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괴이한 훈육때문이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널 때리지 않았다면, 네가 슬플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하지만 내가 잘못했는걸?”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오빠. 네가 진짜 슬픈 이유를 알려줄까?”

“내가 진짜 슬픈 이유가 따로 있어?”

있다.

지금 시점의 어린 비첸은 잘 모르는 이유가.

아니. 알고 있지만, 어린 비첸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너는 겨울성 내에서 물리적 핍박을 받은 거야. 절대 법칙이 깨졌어.”

“그렇지만 엄마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비첸은 이사벨라 공작 부인을 직접 죽인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나는 어머니를 죽여야만 하잖아요.

법칙의 죄를 물어서.”

비첸은 이사벨라 공작 부인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비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러나 공작가에 얽힌 규율과 율법 때문에, 먼 훗날의 비첸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을 제 손으로 죽이게 된다.

비첸에게 죽던 날.

공작 부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미를 잡아먹어야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는 법이란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언젠가 아들의 손에 죽을 것을 꿈꾸고 있었다.

아들이 보다 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머니를 죽일 수 있어야 보다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훈육방향이었다.

「“잘 컸구나, 내 아가. 엄마는 기뻐

“j공작 부인은 기쁘게 웃으며 죽는다.

그 사건 이후, 비첸은 진정한 살인 귀로 거듭난다.

내용을 떠올린 비올라는 몸서리쳤다.

아.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제정신인 사람이 없는 소설이야.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너를 이토록 아프게 한 어머니를, 네 손으로 죽여야 해.”

“겨울성의 법칙이야.”

시간이 조금 흘렀다.

비첸이 몸을 돌려 비올라와 눈을 맞췄다.

“비올라. 근데 있잖아.”

비첸의 입에서, 비올라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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