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6화
“엄마가 나한테 임무를 내려줬다?”
어.
이거.
진행이 조금 다른데.
원래 며칠 뒤에 있어야 할 얘기인데.
비올라는 약간 당황했다.
에피소드의 순서가 바뀌었다.
「“엄마가 나한테 임무를 내려줬어.”」
원작 속 비첸과 비올라는 함께 임무를 나서게 된다.
비올라의 공식적인 첫 임무였다.
원작 속 비첸은 이렇게 말한다.
「“너와 내가 경쟁하면 재미있겠지?”」
그런데 지금의 비첸은 조금 달랐다.
“나랑 같이 놀래?”
원작과 미묘하게 달라졌다.
경쟁이 아니라 놀자고 표현했다.
“놀자고?”
“재미있을 거야.”
“확실해?”
“진짜 재미있다. 엄청 재미있다.”
“누가?”
“비첸이!”
비올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자기 입으로 자기 이름을 부르며 해맑게 웃고 있다니.
그런데 그 모습이 작위적이지 않고 귀엽다니.
망할.’
비첸에게서 귀여움을 느끼면 안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인 훈련을 받은 녀석인데.’
마음만 먹으면 성인 여럿의 목도 슥삭 해버리는 녀석이다. 아주아주 위험한 생체 병기.
비올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학대당하는 비첸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과 자신의 안전은 별개의 문제였다.
“뭐, 재미는 있겠네.”
에피소드의 순서가 바뀌기는 했다.
그러나 비올라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에피소드만큼은 비올라에게 있어서 아주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다.
‘졸지에 남주 납치하러 가게 생겼네.”
소설 속 남주 툰드라와 만나게 될 것 같았다.
***
제논이 몇 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실전은 처음이시죠? 산적들은 대부분 약한 독이 발린 활과 암기를 사용합니다. 근접전에서는 도끼를 휘두르는 경우도 있지만 제대로 된 기술 없이 힘으로만 휘두르기 때문에 금방 지치는 경향이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극독이 발린 단검인데, 사용에 유의하여 주세요. 실수로 찔리면 공녀님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방긋 웃었다.
하늘로 간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그런 얘기.
그렇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지 말아주라.
그 말을 삼킨 비올라가 말했다.
“극독은 필요 없어.”
“유용하실 텐데요?”
““놀이 따위에, 독을 쓰고 싶지 않아.”
사실 실수로라도 맹독이 묻을까 봐두려워서 거부했지만, 제논은 쉽게 납득했다.
“흐음. 그것도 그렇네요.”
제논은 손수건으로 독을 닦아낸 후 비올라에게 단검을 쥐여 주며 빙그레 웃었다.
“꼭 임무에 성공하시길 빌어요.”
“너는?”
“물론 저도 동행하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드릴 수 없답니다. 이건 5공자님께 내려진 임무니까요.”
그렇다.
비첸이 말했던 임무.
그러니까 ‘놀이’는 베토 산맥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산적을 토벌하는 임무였다.
큰 규모의 산적은 아니었다.
여덟 살짜리가 이름나고 거대한 산적 일당을 홀로 토벌할 수는 없으니까.
애초에 이것은 임무라기보다는 비첸의 실전 훈련에 가까웠다.
제논이 물었다.
“마차에 오르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을 준비할까요?”
비올라는 말을 탈 줄 모른다.
비올라가 제논을 올려다봤다.
“좀 더 우아하게 날 모셨으면 좋겠는데.”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제논이 마차를 준비했다.
흑마 한 쌍이 이끄는 마차였다.
마법 덕분에 마차 안은 의외로 안락하고 편했다.
다만, 비첸은 조금 불만인 듯했다.
“나는 슝슝 말 타는 게 재미있는데.”
“그럼 너는 말 타.”
“왜 나보고 너라고 해?”
비첸은 비올라 앞에서 턱을 한껏 올렸다. 비올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올라는 일곱 살.”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비첸은 여덟 살.”
그의 표정에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승리자의 여유가 넘쳐흘렀다.
“오빠라고 불러야지.”
“왜?”
“나는 여덟 살이고, 너는 일곱 살이니까?”
저 모습만큼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여서,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필사적으로 미소를 참았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 열 명은 더 죽였을 텐데. 헤헤.”
미소가 저절로 참아졌다.
“마차가 그렇게 싫으면, 오빠는 말타.”
“안 돼.”
“왜?”
“말 타면 체력이 소모되잖아.”
“그래서?”
“그러면 멋있는 모습을 못 보여주잖아.”
한 톨의 체력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것이, 이 비장한 여덟 살의 심오한 다짐이었다.
비올라 일행은 겨울성 남쪽에 위치한 베토 산맥으로 향했다.
베토 산맥은 거대 산맥인 ‘북방 대산맥’ 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작은 산맥이었다.
비올라는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산적을 상대로 한 실전 훈련, 그렇지만 나한테는 매우 위험한 상황’진짜 비올라라면 모를까, 지금의 비올라는 아린이었다.
그래서 비올라는 머리를 썼다.
“오빠.”
“응?”
“오빠한테 먼저 기회를 줄게.”
“진짜?”
“원래 오빠한테 주어진 놀이잖아.
그렇지?”
“그건 그래.”
비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놀자고 하기는 했으나, 동생에게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왕이면 동생 앞에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빠로서.
“일단 오빠가 알아서 해.”
“응, 알겠어.”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봐. 무리는 하지 말고.”
“응?”
“혹시 많이 힘들어하면 그때 도와 줄게.”
일부러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헹! 그럴 일은 없을걸?”
비첸은 다짐했다.
오빠로서 아주 강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주지!”
***
열두 살 소년.
툰드라에게는 보물이 있었다.
아버지와 누나.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누나는 보물이었다.
아버지는 늘 다정했다.
‘허리를 더 세우고, 시선은 정면, 옳지! 백발백중이구나! 우리 아들, 훌륭한 사냥꾼이 되겠어!’
어려서부터 몸이 연약했던 누나는 늘 툰드라를 응원해 주었다.
‘누나. 내가 꼭 훌륭한 사냥꾼이 돼서, 누나 몸도 고쳐주고, 우리 가족 다 행복하게, 떵떵거리면서 살게 해줄게.’
‘떵떵거리지 않아도 좋아. 나는 그냥 아빠랑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어린 시절.
툰드라의 어머니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셋만 남은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며 가난을 이겨냈다.
여섯 살부터 사냥을 시작한 툰드라의 실력이 점점 좋아져서, 이제는 전처럼 배고프지는 않았다.
‘이제 나보다 더 잘 잡는걸? 우리 아들, 대단한데.’
툰드라는 밝게 웃었다.
‘아빠도 사냥하고, 나도 사냥하고, 사냥감이 두 배야.’
그래서 좋았다.
‘이제 누나 약 걱정은 없겠어.’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더 뛰어난 사냥꾼이 된다면.
‘신전에서 치료받을 수도 있을 거야.’
툰드라는 그렇게 꿈을 꿔왔다.
그 꿈이 언젠가 현실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
7일 전.
툰드라의 꿈이 무너졌다.
“사슴 잡아 왔어! 엄청 큰 놈이야!”
그런데 집에 인기척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고 불길했다.
“아빠…!”
아빠는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오른손에 든 손도끼는 놓지 않고 있었다.
무엇인가와 격렬하게 싸운 것 같았다.
“누나!!”
아빠는 죽었다.
누나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세계가 무너진 기분이었다.
누이는 아무래도 납치된 것 같았다.
여기저기 도끼 자국이 보였다.
발자국도 보였다.
숫자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최소 네다섯은 되는 것 같았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빠. 미안해. 진짜 미안해. 금방 다시 올게.’
아빠를 묻어줘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누나 먼저 찾을게.’
미친 듯이 흔적을 찾았다.
삼 일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흔적을 뒤쫓았다.
베토 산맥에 들어왔다.
결국 산채를 하나 찾아냈다.
저만치 멀리.
얼기설기 지은 목책과 작은 망루가 보였다.
봉긋한 흙무더기가 하나 보였다.
주변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니야.’
불길했다.
아닐 거야.
툰드라는 떨리는 손으로 흙무더기를 파헤쳐 보았다.
조금 파헤쳐 보니, 창백한 손이 보였다.
사람의 손이었다. 여자아이의 손같았다.
‘아닐 거야.”
미친 듯이 흙을 파헤쳤다.
그의 손톱이 벗겨져 피가 흘러나왔다.
어린 여자아이의 시체가 하나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도, 툰드라는 안도했다.
‘누나가 아냐.’
마음이 급해졌다.
누나를 구하기 위해 산채 속으로 잠입했다.
****
마차 밖에서 제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착했습니다. 저기 앞에, 산채가 보이네요.”
비첸은 뭐가 그리 급한지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비올라는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질 거다.
‘죽어도 싼 놈들이야.’
소설로 이미 다 봤다.
저놈들은 이미 여러 차례 사람을 죽였다.
그중에는 남주 툰드라의 아버지와 누나도 있었다.
마차가 멈췄다.
마차로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길이었다.
비첸이 독 묻은 단도를 들어 올렸다.
“산채가 뭐 저렇게 허술해?”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마차가 이토록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산채를 꾸렸다.
뛰어난 수준의 산적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비첸이 뚜벅뚜벅 걸었다.
“망루에 아무도 없네?”
아무리 조악한 산채여도 망루에 망보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비첸이 씨익 웃었다.
“피 냄새가 나잖아?”
걷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시체다.”
비첸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봤다.
그는 보자마자 상황을 읽어냈다.
“여기 시체가 묻혀 있었고, 누군가가 땅을 헤집어서 꺼냈어.”
“그런 것 같네.”
비올라는 구역질을 할 뻔했다.
시체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였다.
작았다.
나이는 열 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저 작은 아이가 저렇게 죽어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판타지 세계여도.
‘왜……!’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설로 보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많이 달랐다.
산채 앞에 도착했다.
비첸이 당당하게 노크했다.
똑똑.
노크한 뒤, 더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산채 앞쪽에는 아무도 없을 거다.
비올라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올라가 나무 문에 손을 대고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비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이 열려 있었네?”
비올라가 손가락으로 땅 밑을 가리켰다.
“방금 열렸던 흔적이 있네. 안쪽으로.”
“응?”
“산채의 문은 보통 밖에서 당기게 되어 있어. 미는 것보다 불편하도록.”
“왜?”
“그래야 도주할 때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으니까.”
그런데 밀어서 열었던 흔적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반대 방향으로 흔적이 있어야 했다.
“아까. 무덤 헤쳐져 있던 거 봤지?”
“응.”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침입한 거야.”
“그래?”
“아무리 허접한 산적이어도 망루에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음. 말이 안 되지!”
말이 안 된다.
망루에 사람은 필수다.
“활을 다룰 줄 아는 누군가가 망루의 사람을 쏘아 죽이고, 문으로 몰래 잠입했다는 얘기가 성립돼.”
“그러면 오빠. 네가 피 냄새를 맡았던 것도 설명 가능하고, 이미 전투가 벌어진 거야.”
비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되겠다. 선수를 뺏기겠어.”
비첸이 뛰기 시작했다.
“나보다 빠른 놈이라니, 제법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