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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8화 (8/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8화아린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비올라의 입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올라의 눈이 약간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내게 칼을 겨눠?”

비올라가 툰드라의 뺨을 때렸다.

풀썩!

힘없이 쓰러진 툰드라의 볼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비올라가 툰드라를 지그시 짓눌렀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잡종 개가.”

이내 비올라는 툰드라의 등을 무릎으로 짓눌렀다.

등 뒤에서 툰드라를 짓누른 채, 단도를 입 속에 밀어 넣었다.

“흐음. 옆으로 힘을 주면 어떻게 되려나?”

아린의 의식은 ‘이거 아니야!‘를 외치며 발버둥쳤다.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진짜 비올라에게 몸을 빼앗긴 것 같았다.

‘다시 찾아야 해.’

어떻게든 몸을 되돌려야 했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린은 알고 있었다.

‘툰드라는 저항하려면 저항할 수 있어.”

지금 가만히 있는 건 저항하지 못해서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툰드라의 재능과 비올라의 재능은 막상막하.

둘 다 아무런 교육을 못 받았다고 가정했을 때.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는 것은 남주답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는 거야.”

아린은 툰드라의 마음을 읽어냈다.

‘ ‘복수심에 불타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은 거야.’

이젠 끝이라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아린도 저 기분 잘 안다.

중학교 때의 그녀가 그랬다.

엄마는 오래전에 죽어서 옆에 없고.

아빠는 온다고 해놓고서 나를 버렸고,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부모님이 없다고 쑥덕거리고, 그때 그녀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내가 옆에 있어줄게.”

만약 강한준이 없었다면.

아린은 그날 옥상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툰드라의 심리 상태가 훤히 보였다.

이미 누나가 죽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을 거다.

그래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 두려울 거다.

아버지의 시체를 눈으로 봤을 테니.

누나의 시체까지 마주할 용기는 없겠지.

‘그래서 그냥, 여기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거야.’

마음이 아팠다.

그의 얼굴과 몸으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어? 움직인다.

몸이 움직였다.

의식을 되찾았다.

뒤를 힐끗 쳐다봤다.

제논이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비첸은 약간 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비첸이 말했다.

“나,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고?”

제논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깔끔한 솜씨였습니다, 공녀님.”

비올라는 가슴이 턱 막혀왔다.

예상하지 못했다.

‘빙의의 부작용인가?’

아무튼 지금 상황을 수습하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놈, 마음에 들었어.”

단도를 품에 갈무리해서 넣었다.

진짜 목을 찌르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었다.

비올라가 툰드라를 가리켰다.

“얘는 내 장난감으로 삼을 거야.”

***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비첸은 자신의 강함을 뽐냈다.

“나쁜 악당을 일곱이나 처치했어”

무용담을 늘어놓는데 그리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근데 비올라.”

“왜?”

“나 말고, 또 누구 약 발라준 사람 있어?”

“없어.”

“그럼 내가 처음?”

“그래.”

비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창밖을 쳐다봤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흠.”

“왜 그래?”

“있잖아, 비올라.”

비첸은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연고 발라주지 마.”

“왜?”

“그, 그건.”

비첸도 사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몰랐다.

그냥 싫었다.

“그건 위험한 독이란 말이지?”

연고가 위험한 독이라고요?

…언제부터요?

“심장이 막 욱씬욱씬하고, 몸이 두둥실 뜨는 것 같아. 웃는데 눈물 나고 그래. 아주 부작용이 심각해.”

아.

그러세요.

“벨라투가 아닌 다른 보통의 사람이었으면 굉장히 위험했을걸?”

“보통의 사람?”

“벨라투는 축복받은 신체와 마나를 타고나잖아. 나한테도 위험한데,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떻겠어?”

비올라는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어?”

“그냥.”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했다.

수레에 짐짝처럼 실려 오고 있는 툰드라도 신경 쓰이고, 연고를 진심으로 독처럼 느끼는 비첸도 불쌍하고,

“비첸.”

“오빠라니까?”

“그래, 비첸 오빠.”

그 말에 비첸이 화사하게 웃었다.

“응. 왜?”

“연고는 독 아니야. 그러니까 위험하지 않아.”

“위험해.”

비첸은 억지를 부렸다.

“억지인 거, 오빠도 알지?”

비첸의 얼굴이 빨개졌다.

비올라와 대화를 하다 보니 알 것 같았다.

왜 싫은 건지.

“남들이 느끼는 거 싫어.”

비첸은 그 기분을 독점하고 싶었다.

“네가 연고 발라주면, 남들도 그런 느낌 느낄 거잖아.”

보통은 연고 발라주는 것 정도로는 그렇게까지 안 느껴.

비올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때 비첸이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아! 좋은 생각이 났어.”

히히 웃었다.

만약, 비올라가 다른 누군가에게 연고를 발라준다면?

“없애 버리면 되지, 뭐.”

뭐?”

“그러면 비올라가 연고를 발라준 사람은 세상에 오로지 비첸밖에 없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비첸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이제야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

비올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제논이 어깨에 둘러멘 툰드라를 땅에 내려놓았다.

툰드라는 여전히 기절한 상태.

툰드라의 양 손목과 발목에는 움직임과 마나를 제어하는 마구(마도공학 구속 도구)가 감싸져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노예처럼 손과 발에 마구를 차고 입까지 막은 모습이 가슴 아팠다.

비올라는 잠자코 툰드라를 쳐다봤다.

‘아니. 오빠가 아니야.

아닌데도.

너무 똑같이 생겼다.

눈빛만 다를 뿐 똑같은 눈동자.

비올라는 멀찍이 떨어져 의자에 앉았다.

일부러 거만하게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저만치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악녀도 이런 악녀가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이게 좋은 건지 슬픈 건지.

“장난감은 어떻게 할까요, 공녀님?”

비올라는 비올라스럽게 대답했다.

“보기 좋게, 전시해 봐.”

“알겠습니다.”

제논이 마나를 조금 주입하자 마도 공학 쇠사슬이 저절로 좌르륵! 펼쳐졌다.

툰드라의 사지가 양옆으로 주욱-벌어졌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비올라가 히죽 웃었다.

“괜찮네. 그럼 나가봐.”

“어쩌시려고요?”

“글쎄. 나를 문 개니까, 훈육이 필요하겠지?”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공녀님.”

“그래.”

일단 제논을 밖으로 내보냈다.

제논을 밖으로 내보낸 비올라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으, 어쩌면 좋지?’

훈육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일단 살리려고 데려오기는 했는데.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으으.

옅은 신음성도 들렸다.

어느덧, 툰드라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므, 므아(뭐, 뭐야)!”

정신을 차린 툰드라는 당황했다.

입까지 막아버린 마구 때문에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비올라는 의자에 앉은 채 툰드라를 잠시 지켜보기만 했다.

툰드라가 비올라를 노려보았다.

“다자 푸어저(당장 풀어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방금 그 호된 꼴을 당하고도 툰드라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처음 비올라를 만났을 때는 당황했었다.

그 산채에서 저토록 어린 여자애를 만났으니까.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툰드라의 머릿속에서 비올라는 완벽한 적이었다.

대뜸 입속에 칼부터 밀어 넣으며 살기를 뿌려대던 괴물.

“주여 버인다(죽여 버린다)!!”

그 모습에 비올라도 정신을 차렸다.

‘맞아. 오빠가 아니야.’

그는 아린 앞에서 늘 웃어주었다.

든든한 나무처럼 옆에 있어주었다.

야생 동물의 눈빛을 하고서 저토록 발악하지 않았다.

생긴 것만 똑같은 거야.”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껍데기만 똑같아.”

마음을 굳게 먹었다.

철컥! 철컥!

툰드라가 계속 몸부림을 쳐 마구들이 사납게 덜컥였다.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대는 툰드라는 눈빛만으로 비올라를 찢어 죽일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아!!”

후우.

비올라는 심호흡했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그녀는 툰드라가 어떤 캐릭터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네 이름이 뭐야?”

“으아아아아아! 이거 푸어(이거 풀어)!”

비올라는 잠자코 툰드라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툰드라는 합리적이고 똑똑한 캐릭터야.’

다만 지금은 너무 어리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가족을 모두 잃었는데 납치까지 당한 상황이라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일단은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했다.

“너는 혼자서 산채에 쳐들어갔어..

결과는 어땠어? 겨우 둘을 죽였을 뿐이고, 꼴사납게 큰 부상까지 당했지.”

비올라는 일부러 툰드라의 가슴을 후벼팠다.

“게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구석진 곳에 숨어 벌벌 떨기만 했어. 누나의 죽음조차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 안 그래?”

“으어어어어!”

툰드라는 괴성을 지르며 발악했다.

“다 포기하고 싶었을 거야. 비겁하게. 차라리 죽는 게 편하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나도 그랬어. 나는 고아였거든.”

순간.

툰드라의 몸이 멈췄다.

“엄마는 죽었고, 아버지는 나를 버렸어. 지금은 입양되었지만.”

보육원에 들어갔을 때.

강한준이 이렇게 말해줬었다.

‘내 이름은 강한준이야.’

“내 이름은 비올라 벨라투야.”

언젠가.

그가 이렇게도 말해줬었다.

‘너는 버림받은 거야.’

그는 늘 따뜻한 말로만 위로해 주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현실을 말해주었다.

돌이켜 보면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아빠가 언젠가 돌아올 거라느니.

괜찮을 거라느니.

어른들의 거짓말은 어린 아린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고, 그 희망은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었었다.

희망 탑의 꼭대기가 높으면 높을수록.

추락할 때 더 아팠다.

“네 아버지와 누나는 죽었어.”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아린에게 강한준이 해줬던 말이 또 있었다.

‘안 괜찮을 거야.’

‘그래도 내가 옆에 있어줄게.’

그 말이 뭐라고.

그 말은 마치 마법처럼 아린을 일어서게 했었다.

“안 괜찮을 거야.”

비록 처지는 달라졌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그래도 내가 옆에 있어줄게.”

강한준이 아린에게 해줬던 말을.

비올라가 툰드라에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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