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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9화 (9/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09화

“안 괜찮을 거야. 그래도 내가 옆에 있어줄게.”

툰드라는 순간.

누군가가 커다란 망치로 심장과 머리를 동시에 때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상했다.

‘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위로받아서?

따뜻한 말이라서?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기억 너머 저편에.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말이었다.

‘왜…… 이러는 거지?”

한편, 비올라는 비올라 나름대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만약 이곳이 현대 사회였다면 툰드라를 더 따뜻하게 대해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곳은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 속이다.

상냥함이 독이 되기 좋은 세계였다.

“상황을 똑바로 봐.”

희망 고문은 하지 않았다.

“네 아버지와 누나는 죽었어.”

“나는 네 원수를 대신하여 갚아준 사람이고, 더 나아가 네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야. 네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생각해 보니 저 여자아이의 말이 맞았다.

먼저 칼을 들이댄 것도 자신이었고, 인질로 삼으려던 것도 자신이었다.

원수를 갚아준 것도 저쪽이었고, 덕분에 살아난 것도 맞았다.

“어때? 이제 좀 내 말을 들을 여유가 생겼어?”

비올라가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 줬다.

“나는 일단, 원래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야.”

“여기는 벨라투 공작가. 나는 며칠전, 6공녀가 된 비올라 벨라투고.”

“……며치 어? 이야(며칠 전? 입양)?”

툰드라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집안사람인 줄 알았더니.

고작 며칠 전에 공녀가 됐단다.

‘벨라투에 입양된 막내 공녀란 말이야?’

툰드라도 벨라투에 관한 소문은 알고 있었다.

겨울성을 다스리는 북부의 패자.

천살 공작이 다스리는 무시무시한 공작 가문.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입양되었다니.

비올라가 툰드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들어 올렸다.

툰드라의 몸이 움찔했다.

아직도 볼에 얼얼한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툰드라의 몸과 입을 속박한 마구를 살짝 풀어주었다.

“이제 말하기 편하지?”

“……그래.”

비올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많은 것을 얘기해 주었다.

이곳에 입양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외가가 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자신은 혼자라는 이야기.

아까 했던 얘기를 좀 더 자세하게 해주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를 버렸어.”

아린도 그랬고.

비올라도 그랬다.

아린은 보육원에서 컸고.

비올라는 빈민가에서 컸다.

부모라는 울타리 없이.

비올라의 목소리에 사무친 진심이 담겼다.

“보아하니 너도 보호자가 없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한 비올라는 툰드라를 옥죄고 있는 마구(마도공학 구속도구)를 마저 풀어주었다.

촤르륵!

마법 쇠사슬이 저절로 감기면서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털썩!

툰드라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손목과 발목에 수갑 같은 구속 도구를 차고는 있지만, 공중에 떠 있을 때보다는 훨씬 편해졌을 것이다.

비올라가 쓰러진 툰드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줄게.”

“왜?”

“뭐?”

“왜 나를 돕겠다는 건데?”

그리고 한마디가 가슴속에 메아리쳤다.

왜 옆에 있어주겠다는 건데??

논리적으로 말이 맞지가 않았다.

뜬금없이 옆에 있어주겠다니.

그런데 왜 저 말이 위로가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말했잖아. 나는 입양되었다고. 내게는 든든한 외가도 없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래서 나는 내 사람이 필요해.”

“내 사람으로 널 선택한 거고.”

“왜?”

“네 눈빛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한준의 눈빛은 늘 따사로웠다.

늘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눈빛이었다.

툰드라의 차가운 눈빛과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다르게 말했다.

이 아이는 강한준이 아니라 툰드라니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버지와 누나를 모두 잃은 소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강한준이 아린에게 그렇게 해주었듯.

다시 똑같이 말했다.

“내가 옆에 있어줄게.”

논리나 이성적이지는 않지만, 모두를 잃은 사람에게는 힘이 되는 말.

툰드라는 저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러니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라.

내 사람으로.”

비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툰드라는 한참이나 그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맞잡았다.

***

한 시간이 흘렀다.

“이제 마음이 좀 정리가 됐어?”

“됐어.”

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그런 툰드라가 조금 신기했다.

‘과연…… 남주인 건가.’

그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한 시간만에 정신을 차리기란 힘든 일이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했다.

그럼에도 툰드라는 과연 남주다운 정신력을 보여주었다.

속이야 어찌 됐든, 겉으로는 다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툰드라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훗날 비올라를 넘어설 정도의 힘을 갖게 되는 툰드라.

그가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럼 나는 대외적으로 네 개가 되어야 하는 거겠네.”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공녀의 장난감 정도로 인식 될 수 있을 거고, 그 어떤 견제나 감시도 받지 않게 될 거다.

“그래. 내 개. 혹은 내 장난감.”

그렇게 해야 했다.

그래야 이 벨라투가에서, 툰드라를 곁에 둘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상황을 파악한 툰드라가 계속 말했다.

“나는 너를 공격했잖아.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거지?”

“맞아, 훈육이 필요해.”

“주인을 무는 개는 제대로 길들여야 하니까?”

“똑똑하네.”

벨라투는 그렇다.

주인을 문 개.

주인에게 칼을 겨눈 장난감.

그냥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냥 용서하는 것은 벨라투답지 않다.

“그게 벨라투다운 거야?”

“그게 벨라투다운 거야.”

“뭔가 슬프네.”

툰드라가 아버지에게 배운 용서란 이런 것이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용서란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해.’

그러니 네 엄마를 용서하렴.”

그런데 벨라투에서 말하는 용서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어떠한 일에 대해 확실히 책임을져야만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용서 했다 할지라도.

“뭐?”

“아무것도 아냐. 아무튼 너는 벨라 투다운 모습으로 날 훈육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용서할 명분이 생기는 거고?”

“정확해.”

벨라투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모든 모습이 보고될 거다.

바로 툰드라를 밑에 두고 부릴 수는 없었다.

비올라 자신을 물어버린 죗값은 치러야 했다.

툰드라가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했어.”

비올라를 쳐다봤다.

‘그런데 얘가 날 보는 표정이…….’

툰드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비올라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들을 읽고 있었다.

살기.

연민,

분노.

그리움.

‘왜 날 저렇게 복잡하게 볼까?’

공존하기 힘든 여러 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 같았다.

‘비올라도 엄마 아빠를 잃었다고 했지.’

저 작은 여자애는 어딘지 모르게 강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섯 살 같았는 데,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상하게 어른 같은 느낌이 있었다.

‘안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내가 옆에 있어줄게.’

저 말들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말들이라는 걸 안다.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한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분명히 가면일 거야.’

그걸 알고 있는데도,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안 괜찮아.’

이 한 단어가 마법의 단어처럼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그 단어가 왜 이렇게 특별하게 들리는 건지 알수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계속들었다.

아이실라나무를 한데 엮어 두껍게 만든 막대기를 들어 올렸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막대기였다.

이름은 아이실라 회초리..

채찍처럼 휘어진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아이실라나무 채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많이 아플 거야.”

“각오하고 있어.”

처음 느껴보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예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쁨은 아니었다.

요사하게 빛나는 저 보라색 눈동자가 예뻤다.

살기와 연민이 동시에 느껴지는 저 눈동자.

왜인지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

툰드라가 물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

“아니. 없어.”

비올라는 하마터면 있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툰드라는 강한준이 아니다.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툰드라는 스스로 결론을 내린 뒤 질문했다.

“이토록 적극적으로 네 편을 만들려고 한다는 건, 언젠가 반드시 벨라투를 지배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외부인인 내게 몇 시간이나 정성을 쏟을 이유가 없잖아. 너는 공작가의 입양 딸이 되었고, 사실 지금의 나 같은 애는 필요 없을 텐데.”

야망과 지배욕에 가득 찬 저 기이 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묘한 느낌.

비올라는 직접적인 대답은 피했다.

똑똑한 남주니 알아서 생각할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면, 네 오두막으로 같이 가자.”

“오두막?”

“네 아버지. 거기 있다며.”

“………..”

“편하게 해드려야지.”

훗날, 자유의 몸을 얻게 된 툰드라는 자신의 오두막을 찾아간다.

아버지를 묻어주기 위해서.

그러나 아버지의 시체는 이미 산짐승들에게 모두 뜯어 먹히고 삭아 없어진 뒤였다.

그것이 툰드라 가슴에 사라지지 않는 피멍이 되어 남는다.

“내가 같이 가줄게.”

“.……고마워.”

툰드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상한 애야.’

동화책에 나오는 소녀가 예쁜 줄로만 알았다.

보통은 그런 걸 예쁘다고 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비올라를 만나보니 아니었다.

저 기묘한 분위기와 아우라가 예뻤다.

툰드라가 비올라의 손에 들린 아이 실라나무 회초리를 쳐다봤다.

‘저걸로 날 때리겠지.’

많이 아플 것 같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맘껏 때려.”

“그럴 거야.”

옆방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를 제논을 의식했다.

비올라에게 어울리는 말을 떠올려보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예쁘게 비명을 지르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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