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12화 한 시간 전.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오늘은 비첸이 평소보다 훨씬 씩씩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이상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의자에 앉았다.
“비첸, 씩씩하구나.”
“네.”
회초리질이 끝난 직후, 비첸은 무릎 꿇고 앉은 상태였다.
“드디어,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이니?”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자신의 손바닥을 살펴봤다.
피가 맺혔다.
따갑고 쓰라렸지만 괜찮았다.
비첸이 드디어 조금은 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이사벨라는 흡족해서 웃었다.
“비첸, 너는 사자가 될 아이란다.”
먼 훗날, 너는 나를 잡아먹어야 해.
그래야 진정한 벨라투의 지배자로 거듭날 수 있을 거야.
“지금보다 더, 더, 많이 독해져야 한단다.”
“알았어요. 그럼 저 일어나도 돼요?”
“그럼.”
비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옷을 입어도 된단다.”
“옷이요?”
“그래. 오늘의 훈육은 여기까지야.”
비첸은 잠시 고민했다.
“흐음.”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첸은 벽에 걸린 시계를 살펴보았다.
저 시계가 마도공학의 산물이며 1/10,000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 시계라는 사실.
현시대의 명장(名匠)이라 불리는 쿠마의 작품이라는 사실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오로지 초침 움직이는 것만을 관찰했다.
“어머니는 이제 자야죠.”
벌써 새벽 1시다.
밤 10시부터 맞기 시작했으니 약세 시간 동안 회초리질을 당했다.
거기서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다시금 이상함을 느꼈다.
비첸이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첸은 맞으면서도 나와 함께 있기를 바랐어.’
비첸은 이상하리만치 어머니인 이사벨라 공작 부인을 사랑했다.
회초리를 맞더라도.
그래도 같이 있는 것을 더 좋아했었다.
그런데 빨리 가란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무엇인가를 눈치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니?”
“네.”
비첸이 헤헤 웃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첸의 표정이 화사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이 기다리는 게, 누구려나? 형이나 누나는 아닐 테고.”
아버지는 더더욱 아닐 테고, 그러면 결국 남은 사람은 하나다.
요즘 비첸이 유독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막내딸. 공작이 빈민가에서 데려온 입양 딸 비올라를 말하는 것 같았다.
‘비올라?’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네 막냇동생을 기다리는구나?”
“음.”
비첸은 잠시 고민했다. 어머니한테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안 될 건 없지만 왠지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또 거짓말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비첸이 대답했다.
“맞아요. 비올라.”
“왜?”
“걔랑 놀면 재미있거든요.”
이사벨라는 제논이 보고 올리는 것을 대충 들었다.
또한 절대자를 향한 본능적인 지배욕과 야망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벨라투에게 반드시 필요한 광기(狂氣)가 있습니다.
‘그 광기를 제어할 이성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마나의 격과 더불어 살상 재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도 했다.
‘뛰어난 아이이기는 하겠지.”
공작이 인정하고 데려왔으니, 분명히 뛰어난 아이일 터.
“대단한 아이라는 소문이 있더구나. 그렇다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죽여야 해요.”
“옳지.”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비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상처투성이의 비첸을 꼭 끌어안고서, 비첸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경쟁자는?”
비첸이 해맑게 웃었다.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옳지.”
비첸은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품에 안긴 상태.
비첸이 위를 올려다봤다.
“어머니.”
“왜?”
“안아주니까 좋아요.”
헤헤 웃던 비첸이 중심을 잃었다.
“그래도 방심은 말아야지, 아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비첸에게서 두 걸음 떨어졌다.
비첸이 풀썩 쓰러졌다.
비첸의 동공이 풀려갔다.
“내가 네 경쟁자였다면 넌 죽었단다. 가장 무서운 적은, 네가 마음을 준 사람이란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면 안 돼.”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손을 내밀었다.
비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첸의 집사가 하얀 천을 내밀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하얀 천으로 손톱 밑을 문질러서 닦았다. 하얀 천이 시꺼멓게 물들었다. 독이었다.
“훈육이란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쓰러진 비첸을 내려다보았다.
“방심하지 말고, 늘 독기를 가슴에 품으렴.”
…네, 어머니. 잘못했어요.”
“네가 잘못하면 엄마도 가슴이 너무 아파.”
비첸은 정신을 잃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독 묻은 천으로 자신의 눈을 거칠게 비볐다.
그녀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굉장히 쓰라렸다.
이것은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비첸을 강하게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벌.
그녀는 정신을 잃은 비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 어미는, 너를 강하게 키워야 할 의무와 책무가 있는 사람이란다.”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라면, 더 독하게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짓도 매일 할 수 있다.
그게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
“빈민가 출신. 혈통도 알 수 없는 천민 출신 주제에 고귀한 아드님과 어울리지 말라, 라는 말을 고상하게 하시네요.”
그 말에 제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역시, 우리 공녀님.’
저렇게 맞받아칠 줄은 몰랐다.
지금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내뿜고 있는 기세에 당당히 맞서 저런 무례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다니..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호호 웃었다.
“그렇게 들렸어요?”
“네.”
“그렇게라도 들렸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어울리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얀 꽃을 선물하겠다는 얘기였는데.”
하얀 국화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툰드라가 제 아버지 무덤 앞에 놓았던 그 꽃.
하얀 꽃은 죽음을 의미했다.
쉽게 말해 죽음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해했으려나요? 천한 이들이 사는 곳에서도 꽃과 함께 잠드는지 잘 몰라서.”
“천한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죠.”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다릅니다. 가난해도 고귀할 수 있고, 부유해도 천박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좋아요. 가난한 이들도 꽃과 함께 잠드나요?”
“가난한 이들도 죽음을 추모합니다.”
툰드라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사치를 부리는군요. 분수에 맞지 않게.”
“죽은 이에 대한 추모, 겨우 꽃 한 송이를 사치로 생각하는 공작 부인의 사상은 잘 알겠습니다만.”
…….”
“그들은 가난할지언정, 적어도 자기 아들을 저렇게 만들지는 않죠.”
아린은 조금 화가 났다.
아린은 가족을 갖고 싶었다.
남들 다 있는 엄마, 아빠. 그녀도 갖고 싶었다.
남들한테 다 있는 그 사람들이 없어서, 정말 힘들고 외로웠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족은 정말 특별한 의미였다.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귀한 보석보다 값진 것이었다.
이사벨라가 비웃듯 말했다.
“어미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하여, 타인이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지 않을까요?”
“과연 타인일까요?”
비올라가 비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 보기만 해도 쓰라린 상처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작기만 한 등.
“저희는 남매가 되었어요, 어머니.”
“선을 넘지 않기를 바라요, 우리 딸.”
“선은 어머니가 넘으신 것 같은데.”
비올라가 쪼그려 앉았다.
어느덧 비첸도 약간 정신을 차렸다.
비올라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겨울성 내. 모든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보호받을 자격이 있죠.
겨울성의 안주인 중 한 명인 어머니께서 그 절대적인 법칙을 어기시면, 아랫것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훈육은 괜찮답니다.”
“정말 괜찮은지는 두고 보죠.”
비올라가 뒤를 힐끗 쳐다봤다.
“제논. 마법 기록 도구. 가지고 있지?”
“네, 가지고 있습니다, 공녀님.”
“촬영해.”
순간.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몸이 움직였다.
비올라를 지나쳐 제논의 목을 움켜쥐었다.
비올라는 순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뭐, 뭐가 저렇게 빨라?’
그림자에 녹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런 움직임.
텍스트로는 알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보니 끔찍할 정도였다.
과연 이 집안의 실세.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었다.
꿀꺽.
침을 삼켰다.
‘미쳤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말로 목이 날아갈 것 같다.
이사벨라의 손톱이 제논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만두세요, 제논 집사.”
제논의 목에서 피 몇 방울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제논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죄송한데…… 저는 공녀님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라서요.”
오른손으로 마법 촬영 도구를 꺼냈다.
현대의 사진기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비올라가 여유롭게 웃었다.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아시긴 아시나 봐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리는 걸 보니.”
제논이 물었다.
“촬영할까요? 다만……… 제 목이 뚫릴 거 같긴 한데요. 지금 피도 나고요.”
“아니, 됐어. 집사를 잃을 수는 없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논이 촬영 도구를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제논의 목을 놓아주자, 제논은 앞주머니의 천을 꺼내 목을 슥슥 닦았다.
땀이 흐르지 않는 이마를 천연덕스레 닦아냈다.
“휴. 죽을 뻔했네요.”
이사벨라가 말했다.
“우리 막내딸은 앙큼한 구석이 있네요. 환영 만찬회 때, 볼만하겠어요.”
비올라가 치마 끝단을 잡고 들어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미리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실 애초에 촬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미끼였을 뿐이었다.
노렸던 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어쩌죠? 이게 잘못된 일이란 걸, 비첸이 알아버렸는데.”
비첸의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다 차렸다는 얘기다. 몸을 일으키지는 못해도 소리는 다 들었을 거다.
“그렇지, 오빠?”
으으,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쐐기를 박았다.
“움직이지 마. 내가 연고 발라줄게.”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비첸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