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13화
“움직이지 마. 내가 연고 발라줄게.”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잠시 비첸과 비올라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다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였다.
그러다가 제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93
“재미있네요, 제논.
“그렇지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논은 집사로서, 6공녀를 섬기려 마음먹었나요?”
“제 마음과는 별개로, 그게 제 임무입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제논, 연고.”
“여기 있습니다, 공녀님.”
비올라는 비첸의 등에 연고를 천천히 발라주기 시작했다.
‘깊게도 패었네.
이건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이 안된다. 사랑이 아니다.
‘진짜 너무하잖아.’
어떻게 어머니란 사람이 아들을 이렇게 만든단 말인가.
“읏, 따, 따가워!”
“엄살 부리지 마.”
회초리질은 안 아픈데 연고 바르는 게 왜 따가운 건지, 비올라는 이해 하지 못했다.
‘내가 다 속상하네.’
비올라는 조심스레 연고를 다 발라주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비올라.”
“………..”
“역시 너를 쓰러뜨리는 건 나여야 할 것 같아.”
그리고 그 반대도 괜찮았다.
“나도 누군가한테 당한다면, 너한테 당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
독자였던 아린은 비첸의 말을 이해 했다.
‘비첸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
애정 표현이 지나치게 살벌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해는 했다.
비첸과 눈이 마주쳤다.
비첸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비올라는 반드시 내가 죽여줄게. 히히히.”
목소리에 애정이 담겨 있었다.
비첸 본인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애정이.
***
비올라는 어딘가 아주 많이 망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비올라는 반드시 내가 죽여줄게. 히히히.’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겨우 이 정도는 위기 따위도 아니다.
속마음을 다스리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워.”
“왜?”
“재워줄게.”
비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오빠. 잠 못 자잖아.”
어차피 이 미친 세계에 빙의했으니, 독자로서의 정보를 모조리 활용 하기로 했다.
“내가 잠 못 자는 건 어떻게 알았어?”
“가족 관계도에 불면증이라 쓰여 있던데.”
“진짜?”
비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논 쪽을 쳐다봤다.
마치 ‘정보력이 대단한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집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합니다, 공자님.”
“그렇구나.”
비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날 어떻게 재워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수면 독을 쓰려고?”
“아니.”
“그럼 전신 마취제?”
“일단 누워.”
비올라는 비첸의 손목을 잡고 반쯤 강제로 이끌었다.
비첸은 딱히 반항하지는 않았다.
실실 웃었다.
비올라는 그 웃음에 뒷목이 싸해지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웃는 거야?”
비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비올라의 손목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손목이 너무 가늘었다.
힘을 꽉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
또래 일곱 살 아이들보다 훨씬 얇은 손목을 보니 비첸은 괜스레 짜증이 났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동맥을 어떻게 자르면 가장 효과 적일까 생각해 봤을 뿐이야.”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기분이 나빠졌다.
얘는 왜 이렇게 작은 거냐!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짜증 나.
너 많이 먹어.
화가 나서 살기가 일렁거렸다.
어쨌든 비올라는 비첸을 눕혔다.
마법 연고 덕분에 피는 멎었고,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누운 비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통스러웠을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윽, 스윽.
무심한 손길이 비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일곱 살 비올라가 아니라 스물한 살 아린이었다.
그녀는 이 세계의 정보를 잘 알았다.
일부러 작게 속삭였다.
“긴장 풀지 마. 처치하고 싶어지니까.”
“응.”
비첸은 눈을 말똥말똥 뜨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근데 나 졸려.”
“자면, 죽는 거야, 비첸.”
비올라가 입술을 말아 올리고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내려 목을 살짝 움켜쥐었다.
드르렁 - 쿨.
드르렁~ 쿨.
놀랍게도 비첸은 잠에 빠져들었다.
비첸은 밤을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밤이 되면,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아기였던 비첸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비첸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렇게 재웠다.
「 “자면 죽는 거야, 아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비첸의 목을 쓰다듬듯 감싸 쥐었다. 마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모양새로..
비첸은 자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잠과 싸워야 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비첸의 귓가에 속삭였다.
“긴장 풀지 마. 적이 널 죽일 거야, 비첸.」
비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훈련받았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다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더 이상 밤에 찾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비첸은 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밤마다 함께 있어 주었던 어머니가 이제는 옆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비첸의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비첸을 내려다보았다.
‘잠든 모습은 세상 순하네.’
젖살이 올라 오동통한 볼이 보였다. 약간 옆으로 누워서 볼살이 삐져 나왔다.
입맛을 다시며 세상 편하게 잠든 모습이 귀여웠다.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 있었는데, 그것마저 뭔가 허술해 보였다.
‘잘 때는 참 귀여운데..’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아이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자라는 게 더 이상하다.
가슴이 착잡했다. 모든 것이 부유한 이 공작가보다, 한국의 보육원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비올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마.”
비첸이 비올라의 손가락을 잡았다.
잠꼬대?’
잠꼬대였다.
세상 깊게 잠든 주제에 악력은 또 뭐가 이렇게 센지.
비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몸이 한 차례 떨렸다. 음냐음냐 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비첸이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내 옆에 있어주세요.”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지만,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그마저도 아주 편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굳게 잠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첸은 혼자란 말이야.”
결국 비올라는 자리에 앉았다.
비첸의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한동안 새근새근 잠든 비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예쁘고 불쌍했다.
손가락을 뻗어 눈물 자국을 닦아주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첸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꺼풀이 감겨왔다. 슬슬 일어나려고 했는데, 비올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스르르 넘어졌다.
비첸의 가슴팍에 엎드려 잠들었다.
비올라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비첸의 상처 가득한 몸을 덮었다.
그날.
비첸은 정말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았다.
*****
새벽 3시 30분.
제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깨우면 안 되겠죠?”
아주 조심스레 비올라를 안아 들었다.
복도를 걸었다.
비올라는 정말 깊게 잠들어 있었다.
비올라는 제논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제논이 비올라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침, 비올라가 눈을 떴다.
제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녀님.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어지간하면 그냥 재워 드리고 싶은데, 내일이 보고를 올리는 날이라서요.”
비올라는 비몽사몽으로 대답했다.
“지그? 새벼 3시 30(지금? 새벽 3시 30분인데)……?”
제논이 멋쩍게 웃었다.
“네, 빨리 말씀드릴게요.”
“으(어).”
비올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굉장히 졸렸다. 일곱 살의 육체는 잠에 굉장히 취약했다.
“연기가 일품이셨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논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제논은 눈썰미가 좋다.
소설에도 그렇게 표현된다.
눈썰미가 좋고 예리해서, 비올라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집사였다.
지금 그 예리함이 여기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들켰나?’
악녀인 척. 잔혹한 척, 카리스마넘치는 척.
그 모든 ‘척’을, 제논은 읽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공녀님의 진짜 모습을 봤어요.”
비올라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들었다.
자신이 겁먹은 모습.
이사벨라 공작 부인에게 위축된 모습.
그런 모습을 모두 읽어낸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들키면 안 된다. 집사 제논은 유능한 인물만을 모신다. 소설 속에도 말한다.
비올라가 유능하지 않았다면 비올라를 죽이고 자살했을 거라고.
농담 식으로 말하긴 하지만 그게 아주 농담은 아니었다.
“피에 정말로 목마른 눈빛이셨어요.”
….
…응?
“공녀님의 개를 안아주셨을 때도 그런 눈빛을 하셨죠.”
순간, 비올라는 오싹했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는데 찬바람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제논이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따뜻한 척 연기하고 계세요?”
제논은 지금 거꾸로 파악했다.
일부러 따뜻한 척 가면을 쓰고 있다고 파악했다.
제논은 수첩과 깃펜을 꺼내 무엇인가를 계속 써 내려갔다.
공작에게 올릴 보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습. 그리고 본능적인 살인귀의 모습. 철저하게 가면을 쓰셨어요. 가끔은 미세하게나마 위축된 모습을 보이시기도 해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 앞에서도 그러셨죠.”
제논은 확실히 예리했다.
아린은 진짜 비올라가 아니고, 가끔 움찔움찔 놀라고 위축되기는 하니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두려울 때가 많으니까.
제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럴 리 없거든요. 그 눈을 가진 사람은, 절대 위축되지 않아요. 아무리 상대가 이사벨라 공작부인이라 할지라도.”
“……”
제논이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공녀님은 이사벨라 공작부인 앞에서 약간 위축된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신 거잖아요? 연출은 완벽했어요.”
아니었다. 위축된 모습을 감추려고 발악했다.
필사적이었다.
눈썰미가 너무 좋은 제논에게, 그것이 조금 보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왜 그런 연출을 하셨을까요?”
제논이 또 빙그레 웃었다.
“아참. 이건 시험이 아니라, 공작님께 올라갈 보고 내용이에요.”
“그건….”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비올라 본인도, 제논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