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14화비올라의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자 꺼… 야.”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졸…… 려.’
의식이 몽롱해지고 잠에 빠져들어갔다.
새벽 3시 45분.
일곱 살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었다.
일곱 살의 몸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굉장히 취약했다.
먹고 싸고 자고.
식욕. 배변욕. 수면욕. 특히 이 세가지에 굉장히 약했다.
너무 졸리거나, 너무 맛있는 게 있거나, 너무 마려우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에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지금처럼.
색-색—
비올라가 잠들었다.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면서, 비올라의 가슴팍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왔다.
제논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 참.”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런 말 하면 실례일까요?”
제논은 차분히 허리를 숙여 섬세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보라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비올라의 입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건지, 비올라는 제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논이 머리카락을 살짝 빼내 주었다.
머리카락이 오동통한 볼을 스쳐 지나갔다.
비올라는 어딘가 간지러운지 몸을 뒤척였다.
“자는 모습이 귀여우세요.”
지극히 벨라투스러운 저 공녀가, 자고 있을 때만큼은 여느 아이들과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제논은 진지했다.
‘진지하게. 귀여우시다.
또래의 일곱 살보다 훨씬 작았다.
다섯 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가만히 보니 눈을 아주 살짝 뜨고 자고 있었다.
제논은 이불을 덮어줄 때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비올라의 눈꺼풀을 닫아주었다.
허리를 일으켰다.
“읏차.”
자는 비올라를 보며 귀엽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 과정까지 귀여웠던 건 아니었다.
비올라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으니까.
제논은 그래서 좋았다.
‘자 꺼… 야.’
그것은 곧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마나를 그렇게 다룰 수 있는 분이 잠을 컨트롤 못 할 리가 없잖아요?”
마나를 다루는 걸 직접 봤다.
비첸에게 깃펜을 던질 때.
툰드라를 순식간에 제압할 때.
자신의 뺨을 때릴 때.
마나는 초인적인 힘을 내게 해주는 이 시대의 산물이다.
마나를 저 정도로 다루는 사람이 잠을 못 이길리 없다… 라고 지극히 상식적으로 착각했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이건 집사인 제논, 자신에 대한 시험이었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공작에게 보고가 올라간다는 것이, 내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지극히 벨라투다웠다.
‘보고는… 제가 알아서 올리겠습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마법 등의 불을 꺼주었다.
혹시라도 비올라가 깰까 싶어 발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제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제논이 작게 말했다.
“시험. 통과해 볼게요, 공녀님.”
문제를 낸 사람은 없고 문제를 푸는 사람만 있는 괴상한 시험이었다.
***
새벽 5시.
헤론 벨라투 공작이 눈을 뜨는 시각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헤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가 진정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라엘’을 잃은 후, 늘 혼자 잠들었다.
후사를 잇기 위해 두 명의 아내를 더 들였지만, 후사를 이을 때 외에는 동침한 적이 없었다.
늘 그렇듯 헤론 벨라투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은 총집사 칼튼이었다.
“샤워 가운과 따뜻한 차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헤론 공작은 기계처럼 살았다. 5시에 일어난다.
그 시간에 맞추어 칼튼이 공작의 침대를 찾아온 뒤 시중을 든다.
헤론 공작은 정확히 15분 동안 샤워를 했다. 헤론 공작이 샤워실에서 걸어 나왔다.
칼튼이 준 하얀색 샤워 가운을 대충 걸쳤다.
벌어진 샤워 가운 사이로 조각칼로 조각한 것만 같은 흉근과 깊게 패어 음영 진 복근이 보였다.
총집사 칼튼이 헤론 공작에게 다가갔다.
하얀색 장갑을 낀 손으로 헤론 공작의 샤워 가운을 여며주었다.
등 쪽의 끈을 빼내어 샤워 가운 앞으로 리본을 묶어주었다. 공작의 매끈한 몸이 샤워 가운에 가려졌다.
“라엘 부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싫어하셨을 겁니다.”
“그녀는 죽었지.”
늘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샤워를 한 뒤 꼭 이러고 나오신다고요. 늘 배탈을 걱정하셨습니다.”
헤론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은 늘 그랬다.
‘당신. 그러다 배탈 나요.’
‘나는 배탈 같은 게 나지 않소.’
헤론 공작의 체내에는 강맹한 마나가 담겨 있다.
이 마나가 스스로 몸을 지킨다.
배탈 따위는 나지도 않고, 날 수도 없는 몸이다.
그렇지만 라엘의 걱정이 좋았다.
라엘이 먼저 다가와 주는 것이 좋고 고마워서, 매번 일부러 샤워 가운을 풀어 헤치고 다녔었다.
‘배탈 난다고 여러 번 말했죠? 이렇게 제 말 안 들어줄 건가요?”
‘당신이 늘 이렇게 해주면 되지 않소?’
그 말은 사실 헤론 공작의 소망이었다.
라엘이 자신의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죽지 말고,
일평생 단 한 명.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내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당신의 소명이오. 소명을 절대 잊지 마시오.’
제발 나를 두고 죽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라엘은 시한부 인생이었다.
신전의 사제들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있었다.
그래도 헤론은 라엘을 사랑했다.
그녀가 삶의 전부였었다.
‘이 정도는 스스로 할 줄 알아야 죠.’
‘나는 바쁘오. 이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소.”
일부러 샤워 가운을 펼치고 다녔다.
그게 지금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 습관은 라엘을 추억하는 공작만의 방식이기도 했다.
“오늘 일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하나 있었다.
“25분 전, 제논이 면대면으로 보고를 올리겠다고 하더군요. 현재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6공녀와 관련된 보고라고 합니다.”
*
헤론 공작은 차를 마시며 제논의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다 들은 헤론은 희미하게 웃었다.
“재미있는 보고군.”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이사벨라와 비올라가 만났다는 부분이었다.
“이사벨라가 경계하고 있단 말이지.”
공작은 이사벨라 공작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주인으로서의 능력은 인정한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이 공작가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 이사벨라가 비올라를 경계하고 있단다. 겨우 일곱 살짜리를.
제논이 곤란한 듯 말했다.
“경계한다고까지 말씀드리지는 않았는데요, 공작님.”
이사벨라는 집안 내 대부분의 일을 내게 말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헤론 공작은 많은 일을 이사벨라와 의논한다.
둘은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돕는, 정치적 혼인 관계다.
“그러나 비올라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않았어.”
그 말은 곧, 공작에게 비올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경계하고 있다고 해석이 가능했다.
옆에 서 있던 칼튼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얘기를 할 만한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닐까요?”
“제논의 보고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군.”
칼튼은 의자에 앉은 공작을 힐끗 쳐다봤다.
‘오래간만에… 공작님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 생겼군요.
라엘 공작 부인이 죽은 뒤 15년이 흘렀다. 공작은 감정을 잃어갔다.
그저 일에 매몰되어 살아갔다.
공작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앞을 향해 내달리기만 했다.
그래서 지금의 벨라투 공작가가 완성되었다.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으나 왕이 되지 않는 자.
겨울성을 지키는 위대한 군주 헤론벨라투가 되었다.
헤론이 물었다.
“환영 만찬회가 언제지?”
“3일 후입니다.”
“그 전에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은?”
“내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공식 스케줄은 비어 있습니다.”
“좋군.”
헤론 공작이 자신의 입양 딸을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지극히 벨라투스럽되, 진보된 벨라투 같은 느낌이라니.”
진보된 벨라투. 언뜻 들으면 기분 나쁜 말이다.
그럼 지금의 벨라투는 정체된 벨라 투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니까.
“철저하게 가면을 쓰고 상대를 이용할 줄 아는 일곱 살짜리 입양 딸이라.”
“만나보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 시간은 비싸다, 제논.”
“물론입니다.”
공작의 시간은 곧 금이다. 그 시간을 의미 없는 일로 빼앗으면, 금을 강탈한 것보다 더 큰 죄다.
제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대면 보고를 요청한 걸 보니, 자신 있나 보군.”
“네, 공녀님이 제게 시험을 내리셨거든요.”
“공녀가 네게 시험이라.”
헤론 공작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집사들은 후계자들의 자질을 늘 의심한다.
후계자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집사들은 도태된다. 따라서 후계 자들을 늘 의심하고 항상 시험한다.
그것이 집사들의 생존 방식이다.
그런데 반대로 집사를 시험하는 벨라투가 나타났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공작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면, 저도 공녀님께 점수를 좀 딸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물론 그 만남이 대단히 만족스럽지 못하시다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설마 절 죽이시진 않겠죠?”
“내일 오후 3시에 찾아가겠다.”
“네, 알겠습니다.”
제논이 허리를 숙였다가 세웠다.
“아참.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정식 보고 사항은 아닙니다만…… 이건 집사 제논이 아니라 사람 제논이 개인적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말해봐.”
칼튼도 귀를 기울였다.
제논은 헤론이 직접 섭외해서 데려온 사람이다.
그가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이는 건 처음 봤다.
“비올라 공녀가 사실은 귀엽습니다.”
…..”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곤히 잠든 그 모습을 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었다.
“귀엽다는 것. 그것은 벨라투스럽지 않은데, 누구보다 벨라투스럽습니다. 정말 신기한 감각입니다.”
“쓸데없는 감상이군.”
귀 기울여 듣던 칼튼도 조금 실망했다.
‘귀여움이라니?’
군주의 카리스마로 중무장해도 모자랄 벨라투에게 귀여움이라니?
‘쓸데없는 덕목이군.’
정식 보고로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벨라투가 귀여워서 어디에 쓰겠는가.
귀여움 따위는 벨라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덕목이었다.
그때까지는.
헤론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내일 3시에 보지.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