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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17화 (17/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17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헤론이 또 말했다.

“그 조그만 머리에서 계략이라고 쥐어짜 내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들켰을 때, 잡아떼지 않는 모습도 인상 깊었습니다, 공작님.”

칼튼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분이 아닌데?”

계속해서 비올라에 대한 얘기를 하고 계신다.

오늘따라 유독 비슷한 감상을 반복하시는 것 같았다.

그만큼 막내 공녀에 대한 실망이 크셔서 그런가.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금 바뀌어야겠지.”

처음은 실수다. 그러나 실수가 반복되면 안 된다.

이제 가르쳐 줬으니, 앞으로는 방향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벨라투는 벨라투다워야 한다.

헤론의 이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 그 복숭아색 오동통한 볼과 크림 묻은 얼굴이 생각났다.

칼튼이 말을 이었다.

“오늘 첫 만남을 가졌으니, 환영만찬회 때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다 벨라투다운 모습 말입니다.”

“그래야겠지. 그렇지 못하면 참수당할 것이다.”

손가락 끝에 볼의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에그 타르트에 집착하던, 간절한 눈빛과 집착에 가까운 소망이 기억났다.

마치 먹이를 탐하는 고슴도치 같았다.

벨라투의 순혈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흘러내린 보랏빛 머리카락.

복숭앗빛이 감도는 오동통한 볼.

볼과 입술에 크림을 묻히고 먹는 허술함.

에그 타르트를 향한 집념 어린 눈동자.

그 집념의 에그 타르트를, 눈에 띄게 아쉬워하며 건네주는 어린아이.

또래의 일곱 살보다 훨씬 작은 체구.

이상하게 자꾸 비올라가 떠올랐다.

공작은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다.

아니. 벨라투는, 벨라투다워야 한다.

마치 억지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마치 속마음을 부정하는 것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일단은 아빠잖아요.’

‘소중하게 대해줘요.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일부러, 억지로, 다시 한번 더, 굳이 생각했다.

‘벨라투답지 못하면, 참수할 것이다.

***

한편, 비올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우와.’

진짜 오늘의 경험은 특별했다.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 오간 것 같다.

‘왜 찾아온 거지?’

헤론 벨라투가 굳이 아줄레지아로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30분 정도 잠들었다.

30분이 지나자 귀신같이 눈이 떠졌다.

눈을 뜨니 제논의 얼굴이 보였다.

“나 얼마나 잤어?”

“30분 12초 주무셨습니다.”

아무래도 제논은 옆에 계속 있었던 것 같다.

요새 눈뜨면 자꾸 제논이 보이는 데, 원래 이렇게 집사들이 찰떡같이 붙어 있었나 싶기도 하고.

원작 속 비올라에게 붙어 있는 시간보다, 지금 비올라 자신에게 붙어 있는 시간이 훨씬 긴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기분 탓이겠지?’

원작 속에서 ‘집사가 22시간 11분 10초 동안 붙어 있었다’ 등과 같은 내용은 서술되지 않는다.

사실상 서술되지 않은 내용이, 서술된 내용보다 훨씬 많다.

‘원래 비올라한테도 이렇게 붙어 있었겠지, 뭐.’

비올라가 말했다.

“툰드라를 불러와.”

***

‘확인해 봐야 해.’

툰드라를 만나면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눈을 오래 마주치거나 스킨십을 하게 되면 점점 어지러워진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진짜 비올라에게 몸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기준선을 알아놔야 대비할 수 있어.

툰드라가 들어왔다.

상처는 거의 다 나았고 여전히 손목과 발목에 구속 도구를 찬 상태였다.

“상태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툰드라 쪽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기억 속 열두 살의 강한준과 똑같은 모습.

“내가 널 왜 데리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언젠가 공녀님의 사냥개가 되라는 거잖아요.”

“맞아. 가까이 와.”

비올라가 툰드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확인해 보겠답시고 갑자기 눈싸움하자고 할 수도 없고, 안아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올라는 비올라의 방식으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한테는 개가 필요해. 잘 훈련되고 이빨이 날카로운 사냥개가.”

원작 속에서 툰드라는 공작저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힉슨에게 검을 배운다.

“네 이빨이 뭐야?”

“네?”

“무슨 무기를 잘 다루냐고.”

“저는…….”

툰드라가 머뭇거렸다.

그러자 비올라가 툰드라의 손을 잡았다.

한 가지를 확인해 봐야 했다.

가볍게 손잡는 것 정도는 괜찮은 거 같고.’

어지럽지 않았다.

손잡는 것 정도는 괜찮았다.

손바닥과 손가락 쪽을 매만졌다.

검지와 중지 쪽에 굳은살이 잔뜩 배겨 있었다.

‘여기까지도 괜찮아.

비올라는 툰드라의 어깨와 등 쪽을 살짝 어루만졌다.

근육이 만져졌다. 비올라의 손가락에 닿은 툰드라의 근육 결이, 활어처럼 움찔움찔 떨렸다.

“어깨와 등 근육이 상당히 발달했고. 조악하기 짝이 없는 동물 가죽옷을 입고 있었어.”

네.”

툰드라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상해.’

열두 살의 툰드라는 알기 어려운 오묘한 느낌이었다.

주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강아지들이 이런 느낌을 받는 걸까.

툰드라는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재질이 질겨서 피부를 보호해 줄 수는 있겠지만 방한 기능은 없다시피 했지.”

“그러니까 여기보다 따뜻한 남쪽.

네 오두막 근방에서, 거친 지형을 누볐다는 얘기야.”

스킨십을 해보면서 알게 되었다.

포옹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허접한 산적 무리에게 급습을 당해 무력하게 납치를 당할 만큼, 치안이 좋지 못한 곳에서 살았고.”

…네.”

“너와 네 아버지는 산골 사냥꾼이었겠지.”

비올라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소설로 봐서 다 아는 내용이었다.

“사냥꾼의 자식이니.”

비올라가 손을 움직였다. 툰드라의 굳은살을 문질러 봤다.

‘음. 이 정도도 괜찮나?’

손깍지를 껴서 꽉 잡아보았다.

이런저런 것을 시험하면서, 이상하지 않도록 말을 이었다.

“활을 다뤘을 거야. 검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배겨 있는 건 그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활을 배웠어요.”

툰드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상해.’

이 기분이 낯설지가 않았다.

‘왜…….’

비올라를 어디선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기분.’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스스로의 이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냥개는 필요 없어.”

툰드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이건 소설 독자가 아닌 바에야 모르는 영역이었으니까.

툰드라의 스승이 될 힉슨이 이렇게 말했었다.

「“네놈은 동체 시력이 유난히 좋고 근접 거리에서의 반사 신경이 뛰어나다.

근육의 순간적인 수축과 이완을 통한 폭발적인 신체 능력을 타고났지.”

“무엇보다. 네놈의 몸은 ‘검기(劍氣)’에 특화되어 있다. 네놈은 검을 익혀야 해.」

비올라가 말했다.

“너는 활이 아니라 검을 익혀야 할 몸이야.”

오케이.

확인 끝.

손깍지도 괜찮았다.

잘 파악해 둬야 했다.

실수로 진짜 비올라에게 몸을 빼앗기면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니까.

“저는 검을 다뤄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기회가 없었겠지.”

검은 사냥꾼이 다루기에는 너무 비싼 무기다.

또한 ‘검기’를 수련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하고,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 귀족 계급이 아니면 제대로 검을 다뤄보기 어렵다.

툰드라의 귀에 속삭였다.

“나를 위해, 검을 배워.”

철컥.

손목의 구속 도구를 풀어주었다.

철컥.

또 다른 손목도 풀어주었다.

내게는 검을 배운 사냥개가 필요해.’

철컥. 철컥.

양 발목까지도 풀어주었다.

“나는 네게 훌륭한 검술 스승을 소개해 줄 거야.”

툰드라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속으로는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3초 정도는 괜찮았다.

실험을 계속해 봤다.

3초가 지나자, 조금 어지럽기 시작했다.

‘아직 괜찮아.’

4초. 5초.

‘이제 한계…… 응?” ”

툰드라가 먼저 눈을 피했다.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데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얜 또 왜 이래.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있어?

얼굴이 엄청 빨갛잖아.

사춘기라서, 민망해서 그런가.

“저…… 주인님.”

“왜?”

“원래 귀족가의 여식들은 사내의 몸을 만지는 것에 거침이 없나요?”

비올라는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내?”

“네.”

비올라에게 툰드라는 남자라고 보기 어려웠다.

몸은 비록 일곱 살이지만 정신은 스물한 살이다.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남자로 보일리는 만무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달아올라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이 아이.

어쩔 줄 몰라 발끝으로 땅을 톡톡두드리고 있는 이 꼬마 아이.

‘귀엽잖아.’

꼬마가 진지하게 물었다.

“저는 사내가 아닌가요?”

“너는 개지.”

“그럼 수컷이군요.”

음. 저 진지하고 진중한 표정에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까.

어떨 때는 흉폭한 맹수 같은 눈빛이었다가, 지금은 또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어린애는 어린애라는 건가.

비올라가 툰드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슥슥-문질렀다.

툰드라는 이 손길이 싫지 않았다.

위로가 되는 손길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 자기 옆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늘 마음 한구석이 휑했고, 사람의 손길과 목소리가 그리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좋은 사내가 되기 위해서, 검을 배울게요.”

“그래?”

“약속할게요.”

툰드라는 검을 배우고 싶어졌다.

‘검을 열심히 배우면…….’

툰드라의 눈이 비올라의 손을 향했다.

아까 손깍지를 꼈던 저 손이 보였다.

‘또 쓰다듬어 주시려나?”

그리고,

‘사내로 인정해 주시려나?’

그러면 좋겠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주인님.”

툰드라가 무릎을 꿇었다.

엉금엉금.

마치 땅을 기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비올라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 이빨을 갈고닦을 것을 서약할 게요.”

언젠가 사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비올라의 발에 입을 살짝 맞추었다.

이것은 노예가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혹은 빚진 자가 은인에게 극상의 예의를 표현할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툰드라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를 표했다.

비올라는 하마터면 툰드라를 발로 차버릴 뻔했다.

‘아, 개찝찝해!’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런 풍습은 없었으니까. 익숙하지가 않았다.

존경의 예우를 받는다는 느낌은 쥐뿔도 없었고 그저 민망하기만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밖에 있었다.

아직 씻지도 못했다.

발 냄새 났으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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