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19화
“아저씨 딸을 죽인 게 누군지 알려 줘?”
움찔.
힉슨의 몸이 움찔 떨렸다. 술에 아무리 절어 있어도, ‘딸’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귀가 번뜩이는 듯했다.
“뭐야, 너.”
어느새 취기가 모두 사라져 버린 듯했다.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세계에는 마나라는 것이 존재하고, 마음만 먹으면 몸속의 취기를 모두 날려 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 것 같았다. 생기를 잃고 죽어가던, 썩은 생선 눈알 같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나는 아저씨 딸을 봤어.”
“어디서?”
힉슨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딸’이라는 단어는 힉슨의 역린이었다.
그 단어로 장난치는 인간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힉슨에게 있어서 ‘딸’이란 그러했다.
“스베뉴 빈민가 11번 거리. 끔찍했던 현장의 하수구 밑에서.”
이 모든 내용은, 몇 년 뒤 제정신을 차린 힉슨이 스스로 알게 되는 내용이다.
힉슨은 툰드라를 가르치면서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딸의 흔적을 찾는다.
결국 그는 원수를 찾아내게 된다.
비올라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타들어가는 것처럼 새빨간 머리카락. 볼에 오밀조밀 모여 있던 주근깨. 귀에는 십자가 모양의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었어.”
“…….”
힉슨의 몸이 굳었다.
‘얘는 벨라투인가?’
이 소녀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벨라투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분위기가 그랬다.
‘내가 모르는 벨라투가 있을 리 없지.”
옷으로 보아 지체 높은 집안의 영애인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힉슨은 완전히 믿지 않았다. 지난 3년간, 힉슨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모두가 힉슨의 검술 실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힉슨 개인의 불행은, 힉슨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권력자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래서 힉슨은 더 이상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아이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빠가 구하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 우리 아빠가 힉슨이라고 자랑스러워했었어.”
어떻게 죽었는지까지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다. 묘사하기도 꺼려질만큼 끔찍한 일을 당했던 것 같다.
“아무튼 확실히 죽었어. 내 눈으로 봤거든.”
“네 눈으로?”
“말했잖아. 난 하수구 밑에 있었다.
고.”
힉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힉슨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딸이 죽었다는 것을. 그렇지만 여태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라고 소리치려고 할 때, 비올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영웅이었고, 흑경(黑鯨:검은 고래)이라고 불렸다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꼬맹이.”
말투가 많이 누그러졌다. 헛소리나 개소리를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겨울성의 군주, 위대한 내 아버지와 친구이기도 하고.”
그제야 힉슨은 이 여자애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최근 겨울성이 떠들썩했었다. 헤론공작이 빈민가에서 입양 딸을 하나 들여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말이 되었다. 빈민가에서 딸을 우연히 목격한 모양이었다. 의심이 약간 사라졌다.
“네가 비올라냐?”
“맞아. 아무튼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에 버금가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생각해 봐. 아저씨는 영웅이야. 그런 영웅의 아내와 딸을 죽이고 납치했어. 그렇다면 둘중 하나겠지.”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미친놈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철저하게 계획한 완전 범죄이거나.”
비올라가 검지로 보랏빛 머리카락을 살살 꼬았다.
“아저씨 생각은 어때? 겁대가리를 상실한 미친놈이 그랬을까? 아니면 철저하게 계획하여 움직인 어떤 세력이었을까?”
“…….”
“겁대가리를 상실한 미친놈이라면, 아저씨가 찾았을 때 금방 찾았겠지.
왜냐하면 아저씨는 능력자니까.”
“그런데 못 찾았어. 게다가 타이밍도 아주 절묘했잖아. 그렇지?”
딸이 납치되었다.
딸을 찾으러 나간 사이, 아내가 죽었다.
“마치 누군가 정교하게 계산한 것처럼 말이야.”
아내와 딸을 잃었을 때는 너무 미쳐 있어서 상황을 돌아보지 못했다.
이후에는 주정뱅이가 되어서 정확히 상황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왜 나 같은 어린애도 알아낼 수 있는 걸, 아저씨는 몰랐을까??
이게 다 우연이겠어?”
그걸 비올라가 깨우쳐 줬다.
비올라는 아주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사실 이거, 아저씨가 스스로 다 추리하는 거긴 한데요.”
이 모든 내용은 제정신을 차린 회슨이 스스로 추리하게 된다. 원수를 찾아내게 된다.
그 원수는 이 소설의 최종 흑막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아저씨. 아저씨가 미쳐 버려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누구였어?”
한편, 제논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이 붉었다. 마치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노을이 비올라의 얼굴에 묻었다. 비올라의 얼굴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노을이네요. 검은 고래를 깨우기 좋은 날이에요.”
***
얘기는 잘 끝났다.
아주 이례적으로, 힉슨은 제논과 비올라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초대하여 직접 차를 끓여주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힉슨 경이 먼저 초대하시다니. 공작저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네요.”
“그래?”
“네, 초대는커녕 애꿎은 별관 손님께 폭행을 일삼으셔서 골칫덩이였지요. 공작님께서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너도 곤란해 볼래?”
힉슨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제논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비올라에게 말했다.
“아무튼 3년 동안, 힉슨 경은 그 누구도 이 공간에 침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답니다.”
“아버지는?”
“공작께서는 힉슨 경에게 방을 내주시고, 단 한 번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으셨어요.”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최애라면 그러고도 남지.”
스스로 정신을 차린다면 모를까, 먼저 나서서 기운을 북돋아주고 위로해 줄 스타일은 아니다.
만약 힉슨이 스스로 정신을 차린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친구가 되어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직접 죽여주었을 것이다.
그게 친구를 향한 헤론의 마지막 배려였겠지.
비올라는 따뜻한 사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소설 내용을 많이 바꾼 건 아냐.
어차피 힉슨은 곧 정신을 차릴 예정이었다.
소설 내용을 크게 바꾸지는 않았다. 힉슨이 비올라 앞에 앉았다.
“내 친구 놈이, 재미있는 딸을 들였구나.”
“다들 그렇게 말해.”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거?”
힉슨이 피식 웃었다.
“너 같은 눈을 가진 자를 많이 봤다, 꼬마.”
“나 같은 눈이 뭔데?”
“헤론을 닮은 눈.”
“내가 아버지를 닮았어? 나는 입양딸인데.”
“절대 손해는 안 볼 눈이라는 얘기야.”
“흐음.”
비올라는 뜸이 익기를 기다렸다.
그 왜. 소설 보면 이렇게 하던데.
소설대로 따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오만한 표정을 타고났다.
덕분에 노련한 협상가처럼 보였다.
힉슨이 말했다.
“뜸 들이지 말고, 원하는 거나 말해.”
“내가 기르는 개가 한 마리 있거든?”
“개?”
“개이긴 한데, 사람이야. 커. 물기도 하고.”
“그렇군.”
힉슨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납득했다.
비올라는 그게 은근히 짜증 났지만, 또 편하기도 했다.
“아저씨가 걔 길들여 줘.”
“어떻게?”
“검술을 가르쳐 줘.”
“싫다.”
“나는 딸의 원수를 찾아줄 건데?”
“나 혼자서도 찾을 수 있다만.”
비올라는 순간 할 말을 잃을 뻔했다. 저 말은 사실이다. 소설에서도 혼자 잘만 찾아낸다.
지금 술에 절어 있어서 그렇지, 정신만 잘 차리면 헤론 공작에 버금가는 영웅이다.
“왜 싫다는 거야?”
“귀찮아.”
“일단 만나보기만 해봐.”
일단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힉슨은 툰드라를 보자마자 반한다.
검술을 위한 육체를 타고났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힉슨은 약 올리듯 말했다.
“싫다.”
비올라는 전략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아저씨.”
“왜?”
“나는 아저씨가 엄청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죽어가던 아이가 엄청 애타게 불렀거든. 하수구에 숨어 있던 나한테, ‘우리 아빠’라는 말은 되게 신성한 언어처럼 다가왔어.”
힉슨이 잠시 눈을 감았다.
딸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근데 지금 보니까 하나도 멋없네.”
“뭐?”
“이렇게까지 말해야겠어?”
“무슨 말?”
“나는, 아저씨한테, 도와달라고 말을 하는 거야.”
순간 제논의 귀가 쫑긋거렸다.
나왔네요.
지배자로서의 덕목. 자유자재로 가면을 바꿔 써서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용병술.
그게 튀어나온 것 같았다. 비올라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나는 살고 싶어.”
“누가 널 죽인다던?”
“이곳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어.”
사실이었다. 소설 세계관 공부도 많이 했고, 캐릭터 덕질도 좀 했다.
“이곳은 야생이야. 이곳에는 회초리질을 하는 어머니와 호시탐탐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형제들. 그리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을 뿐이야.”
힉슨은 한 단어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폭력적인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무관심해. 나를 이런 야생에 던져놓고 그토록 무관심한 건, 일종의 폭력이잖아.”
“아저씨는 똑똑하다며. 내가 왜 여기 찾아왔는지 알잖아. 알면서 모른 체하고 있잖아.”
비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가 내 옆에 있어줘.”
“…….”
“나는 기댈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해.”
힉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나는 혼자야.”
힉슨의 눈에 비올라의 손이 보였다.
비올라가 내민 손이 유독 창백하고 작아 보였다.
힉슨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도 딸을 키워봐서 안다.
이 아이는 또래의 일곱 살보다 훨씬 작았다.
다섯 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렇게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아줘.”
마지막 한마디가 힉슨의 가슴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