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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20화 (20/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0화벌컥.

헤론 공작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총집사 칼튼이 얇은 검을 뽑아 들었다.

칼튼은 헤론 벨라투 앞에서도 검을 뽑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측근 중 한 명.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겨누었다.

“힉슨 경. 예의를 갖추십시오.”

공작저에서 그 누가 감히, 노크도 없이 공작의 집무실 문을 열고 그냥 들어온단 말인가.

힉슨이 손가락으로 얇은 검의 검날을 잡고 슬쩍 밀어냈다.

의자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헤론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냥 둬.”

힉슨이 피식 웃고서 헤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헤론은 힉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뭐지?”

“귀여운 딸을 들였더군.”

순간, 헤론의 몸이 움찔했다.

“귀엽다?”

힉슨의 입을 통해 ‘귀엽다’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이상했다.

벨라투와 귀여움은 기름과 물보다도 더 상극인 단어다.

본래 그래야만 했다.

귀여워서는 안 된다.

“그래. 많이 귀엽던데.”

“벨라투답지 못했군.”

힉슨은 헤론의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 오랜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냐? 네놈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며 비웃던 꿈.”

헤론은 깃펜을 들고서 서류에 사인을 계속했다.

힉슨의 말에 딱히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꿈을 잃었었고, 내 세상은 무너져 내렸었지.”

“그래서?”

“그리고 나는 주정뱅이가 되어버렸어.”

힉슨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네가 왜, 나를 이곳 별관에 머물게 두었는지 알고 있어.”

손가락으로 칼튼을 가리켰다.

“저 고리타분한 늙은이는 늘 나를 쫓아내라고 충언했을 거고.”

“뱀 같은 네 부인들은 나를 독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겠지.

나는 벨라투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망나니였으니까.”

“잘 알고 있군.”

헤론은 또 다른 서류에 서명했다.

칼튼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서류를 받아 든 칼튼이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집무실에 남은 사람은 헤론공작과 힉슨뿐이었다.

“그럼에도 네가 나를 별관에 놔뒀던 건.”

헤론 공작이 그제야 옛 친우.

힉슨을 쳐다보았다.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회복하지 못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기 위해서 내 곁에 두었다.”

“얼마나 두고 보려고 했지?”

“5년.”

5년이라.

힉슨은 크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헤론은 헤론이다. 변하지 않았다.

“그게, 내 친구 헤론이 친구인 나를 존중하는 방식이지.”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그래. 새로운 꿈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아무튼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서.”

헤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꿈?”

“그래. 네 딸. 정확히는 서류상으로만 딸로 등록된 비올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슨?”

“너랑 내가 어린 시절 정했던 절대적인 법칙. 알지?”

열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 않는다.

그것은 헤론과 힉슨의 약속이었다.

사실 이 약속을 제안했던 사람은 힉슨이었다.

힉슨이 말했다.

“아이들은 보호받아 마땅하고, 충분히 사랑받으면서 클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너는 서류로 네 딸을 받아들였지만, 나는 마음으로 네 딸을 받아들여 볼까 해.”

“어때? 너는 딱히 아버지 자리는 관심 없잖아. 뛰어난 후계자가 필요할 뿐.”

“………..”

“싫어?”

헤론은 잠자코 힉슨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해.”

힉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게 도와달라고 고 앙증맞은 손을 내밀더라.”

“……”

“옆에 서달라더군.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고.”

“벨라투답지 않군.”

“원래는 그렇지.”

힉슨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그게 하나도 비굴하지 않았어.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그 태도가 너무나 벨라투스러워서 놀랐어. 신기한 분위기였어.”

“……포장하는 건가?””

“내가 왜? 굳이?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뿐이야. 지극히 벨라투 같은데, 또 벨라투와는 묘하게 달라.

아주 매력적인 꼬맹이야.”

“제논과 비슷한 말을 하는군.”

지극히 벨라투스러우나, 진보된 벨라투 같은 느낌.

힉슨도 그 비슷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 아이가 좀 더 바르게 클 수 있도록, 울타리가 되어줄까 해. 좀 더 예쁜 세상에서 자랄 수 있도록.”

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너 따위가 감히, 벨라투의 성을 이은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듯한 태도였다.

“간다.”

힉슨이 방문을 나섰다.

힉슨의 입가에 미소가 서려 있었다.

‘저놈 봐라?’

공작이 평소와 달랐다.

‘비올라를 귀여워하는 거 같은데.’

그럴 리 없는데,

그런 것 같다. 아직 스스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우득!

헤론 벨라투의 깃펜이 일곱 개나 부러졌다. 누구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환영 만찬회 이틀 전.

헤론 공작이 갑자기 비올라를 저녁식사에 따로 초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비올라는 매우 불편했다.

최애와의 저녁 식사는 늘 꿈꾸던 것이었지만, 이런 분위기를 원했던건 아니었다.

침묵이 유지되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에는 맛 좋은 고구마 수프와 특제 소스를 버무린 오리구이가 있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약 10분이 지났다.

10분이 지나서야 헤론 공작이 입을 열었다.

“가면을 잘 쓰더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담담한 척했다. 맹수답게. 벨라투답게.

“힉슨에게 옆에 있어 달라 했다.

지.”

“네.”

“손을 잡아달라고 했나?”

“네.”

“왜?”

비올라는 직감했다.

이건 시험이었다.

벨라투는 비굴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된다.

벨라투는 도움을 주는 입장이어야지, 도움을 받는 입장이어서는 안된다.

일부러 씨익 웃었다.

“잘 이용하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헤론 공작은 비올라를 쳐다봤다.

비올라는 지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속으로는 많이 떨렸다.

헤론 공작의 눈동자는 마치 블랙홀같았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 온몸이 갈가리 찢겨나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데. 묘하게 내 최애랑 행동방식이 다른데.’

공작은 후계자 후보들과 사적인 만남을 가지지 않는다.

그 하나하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의아했지만 일단 겉으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누구보다 악녀다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

이용해 먹기 참 좋잖아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헤론 공작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역시 그렇군.”

네?

비올라는 조금 당황했다. 헤론이 생각보다 더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네가 앙증맞은 손을 내밀었다 들었다.”

“손을 내밀기는 했어요.”

비올라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음.

캐릭터 설정이랑 안 어울리게 작고 앙증맞고 예쁘기는 하네.

“힉슨이 그 손을 잡았다지?”

“네.”

비올라는 흐음, 하고서 헤론을 쳐다보았다.

무겁고 살벌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잘생김이 풀풀 날아다녔다.

“함부로 손을 내주지 말거라.”

“…네?”

“까딱하면 사라질 수도 있으니.”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

“식사하지.”

달그닥달그닥.

포크. 그리고 나이프가 유리그릇에 닿는 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비올라는 조심스레 헤론의 눈치를 살폈다.

‘숨 막혀!’

음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메인 메뉴는 다 먹었고 꿀에 절여서 얼린 홍시가 디저트로 나왔다.

‘맛있다!”

비올라의 눈이 커졌다.

지구에서도 홍시를 많이 먹어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달달구리한 것이 입안에서 사르르녹았다.

꿀과 홍시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입안에서 달콤한 푸딩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단것을 좋아하는군.”

“네, 어린이잖아요.”

공작이 비올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올라는 또 숨이 막혔다.

“아버지.”

“말하거라.”

“맛있는 거 먹을 때, 그만 좀 쳐다보면 안 돼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뒤에 시립해 있던 제논의 몸이 움찔했다.

‘공녀님?’

헤론 공작에게 그 누가 저렇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만 좀 쳐다보라니.

헤론 공작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말일 것이다.

다행히 헤론 공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짧게 되물었다.

“어째서?”

“밥 먹을 때 빤히 보는 건 실례잖아요.”

헤론 공작은 라엘을 떠올렸다. 라엘도 이렇게 말했었다.

‘그만 좀 쳐다보면 안 돼요?’

‘그렇게 빤히 보는 건 실례예요.’

헤론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라엘이 유일했었다.

그때, 헤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 남편이오.

당시 헤론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지금은 무표정이었다. 무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네 아버지다.”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쾌적한 환경과 맛있는 음식이 모두 나로부터 나왔지. 네가 그토록 탐하던 에그타르트와 지금의 차가운 홍시도 내가 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 실례는 좀 저질러도 될 것 같은데.”

“제가 원해서 데려온 거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원해서 데려와 놓고, 그걸로 생색내면 어떡해요?”

우연일까.

비올라의 태도는 라엘과 닮은 구석들이 있었다.

한마디도 안지고 제 할 말은 꼬박 꼬박 잘했다.

‘당신이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면서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먼저 결혼하자고 해놓고, 그런 걸로 생색내면 어떡해요?’

헤론 공작이 포크를 들어 올렸다.

순간, 비올라는 찔끔 놀랐다.

분위기와 태도만 보아 하면, 저 포크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포크로 홍시를 푹 찔렀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구나.”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입양 딸이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가 묻는 것 같았다. ‘아버지.

그거 맛있어요?‘라고.

“음식 먹을 때 빤히 보는 건 실례라고 안 했나?”

“저는 딸이잖아요.”

헤론이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아버지가 먼저 실례를 저질렀잖아요.”

벨라투의 방식이다.

받은 것은 돌려준다.

그것이 원한이는 은혜든.

상대가 헤론 공작이어도, 그건 지켜져야 하는 원칙이었다.

지극히 벨라투다웠다.

비올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시선을 피하면 겁먹은 걸 들킬 거야.

그냥 냅다 쳐다보자!

그래, 저 잘생김을 감상이나 하는 거야.

그럼 덜 무섭겠지. 역시 잘생기긴 했어. 음음.

비올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잘생김을 음미한 덕분에 덜 무서웠다.

잘생겼다, 잘생겼어.

헤론도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저 지극히 벨라투다운 눈동자가 이상하게 조금 예뻐 보였다.

공교롭게도, 힉슨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귀여운 딸을 들였더군.’

귀엽다라.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졌다.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보였다.

저 눈동자에 왜 저토록 호감이 담겨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여운 딸을 들였더군.”

우드득.

공작이 들고 있던 포크가 엿가락처럼 휘어버렸다.

저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귀여운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절대로,

저 아이는 그저 자유자재로 가면을 바꿔 쓰는, 지배자의 덕목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일 뿐이다.

공작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것이냐?”

비올라가 대답을 이었을 때, 헤론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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