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1화비올라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네. 정당방이요.”
똑 부러지게 말을 하고는 있으나 ‘정당방위’라는 말은 약간 발음이 새었다.
거의 5살의 성장 상태를 가진 7살이 발음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단어인 듯했다.
문득, 칼튼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제대로 먹지 못해 성장이 매우 느렸던 것 같습니다.
문득, 또 저 작은 체구와 커다란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찌릿했다.
헤론이 다시 한번 발음했다.
“정당방위.”
“네. 정당방이.”
“정당방위.”
비올라는 헤론이 왜 저러는지 눈치했다.
입술을 모아봤다.
혀에도 힘을 꽉 줬다.
“정당방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발음을 똑바로 하거라. 정당방위.”
“정.당.방.이.”
망할!
발음이 제대로 안 됐다.
한편, 제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공작님이…… 희미하게 웃고 계신다?’
아주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논의 예리한 눈썰미에 그게 잡혔다. 왜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헤론 공작이 또 말했다.
“정당방위.”
“전당방히!!!”
비올라는 짜증이 났다.
무표정처럼 보이지만 얄밉게 발음하는 공작의 저 인중을 주먹으로 톡! 때려주고 싶었다.
‘그랬다간 내 목이 날아가겠지?’
아무튼 짜증이 치솟았다.
다른 말을 할 때도 약간씩 발음이 새는데, ‘정당방위’는 특히 더 그랬다.
‘발육이 빈약한 몸뚱어리 같으니라고헤론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약간 웃고 있었다.
그 미묘한 웃음에 21세 한아린의 정신은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우이씨.’
21년 평생을 살면서 발음으로 놀림당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예의도 없고, 발음도 나쁘군. 거기에 살기까지 풍긴다라.”
사실 헤론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살기를 뿜어서 더 만족했다.
벨라투는 응당 그래야 한다.
놀림을 받았다고 느꼈을 때, 살기를 내뿜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그러나 비올라는 화들짝 놀랐다.
이놈의 육체가 저도 모르게 또 살기를 흘렸나 보다.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새어 나갔던 살기가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살기 갈무리를 잘하는군.”
헤론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오해했다.
스스로의 살기를 잘 제어하는 아이라고, 제논과 힉슨의 말을 떠올렸다.
‘더없이 벨라투스럽지만, 또 벨라 투같지 않은 아이.’
차가운 홍시에 대한 지독한 탐욕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진득한 살기는 철저하게 감출 줄 아는 심계를 가졌다.
이 모든 모습이,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일 것이다.
아주 잠깐씩 튀어나오는 살기.
귀기 어린 눈동자.
겨우 억누르는 살육 본능.
그것이 진짜 모습이겠지.
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비올라.’
그런데 이상했다.
자꾸 저 오동통한 복숭앗빛 볼이 보였다.
‘네 귀여운 모습 따위가 아니라.’
아직 예절 교육이 덜된 건지.
주황색 홍시가 입술 근처에 또 묻어 있었다.
뭘 자꾸 저렇게 묻히고 먹는지 모르겠다.
‘알겠느냐?’
저 앙증맞은 손으로 뭘 그렇게 열심히 먹어보겠다고.
포크를 꽉 쥐고 있는 폼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벨라투스러움보다 자꾸만 저런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
새벽녘 동이 트고, 일찍 일어난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평화로운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의 방문을 이렇게 거칠게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방문이 박살 났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회슨이었다.
“아저씨. 그게 노크였어?”
“그게 아니고…….”
힉슨은 멋쩍게 웃었다.
“힘 조절이 안 됐어.”
“힘 조절?”
이야기인즉슨, 최근 3년 동안 힉슨은 수련을 하지 않았다. 마나도 활성화하지 않았다. 3년 동안 그러고 살다가 이제야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갑자기 활성화된 마나 때문에 요즘 힘 조절이 안 된단다.
“전쟁 영웅 맞아?”
힉슨이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렸다.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심각한 복부비만인 상태였다.
“3년이면 사람이 망가지기에 충분 한 시간이지.”
“다시 고치기에는?”
“한 달이면 충분해.”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고쳐.”
힉슨이 뚜벅뚜벅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비올라. 네 덕분에 실마리가 좀 잡힌 것 같아.”
“응. 잘됐네.”
물꼬만 터주면 된다.
저 인간은 과거 헤론 공작에 버금가는 영웅이었고, 이제 알아서 잘할 거다.
“그런데 말이야.”
“응?”
“어제 헤론이랑 밥을 먹었다지?”
“응.”
“뭐라디?”
비올라는 움찔했다.
‘아름다운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
이용해 먹기 참 좋잖아요?’
설마 전해 듣지는 않았겠지? 괜히 불안해졌다.
힉슨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예의도 없고, 발음도 나쁘대. 살기까지 풍긴다고 혼났어.”
“그래?”
“응.”
힉슨은 재미있다는 듯 비올라를 쳐다봤다.
“그렇게 안 보여도 말이야, 헤론녀석은 원래 정이 많은 녀석이었어.”
“알아.”
“그 녀석…… 응? 안다고?”
힉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만 냈다며? 따뜻한 말은 아예 없었을 텐데?”
“응.”
비올라의 마음속에서, 저도 모르게 최애 부심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내 최애캐입니다만.
최애를 까더라도 제가 깝니다만.
힉슨은 계속 황당해했다.
“걔 헤론 벨라투야.”
“알아.”
“근데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알아.”
우리 최애캐는요. 귀여운 고슴도치를 키운다고요.
생각보다 착하다고요. 좀 무섭기는 하지만, 힉슨은 황당함에 혀를 내둘렀다.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해? 왜 눈빛이 자신만만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은근히 짜증 나는데?”
“왜? 당당하면 안 돼?”
“심지어 왜 진심이냐?”
“그야 진심이니까.”
“그, 그건 그렇네?”
힉슨은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두둔하는 꼴이라니.”
기분 나빠 보였지만 실제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비올라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왜하는 건데?”
“그 녀석. 왠지 너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응.”
“엥? 반응이 그게 끝?”
“애초에 관심이 있으니까 입양을 했겠지.”
“대륙 최강의 공작가에 입양되었고, 그 위대한 겨울성 군주 헤론 벨라투의 관심을 받는다는데. 반응이 너무 싱겁잖아. 뭔가 좀. ‘어? 우와!
엄청나!’ 라든가. ‘내가 이런 귀족가에 입양이 되었어!’ 라든가. ‘그 유명한 겨울성의 군주가 내 아버지라니!’ 라든가. 좀. 그 뭐냐. 좀 더 7살스러운 그런 풍부한 감정표현을 기대하는 내가 이상한 거냐?”
비올라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
힉슨과 눈을 마주쳤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싫어.”
무관심도 폭력이다.
더더군다나, 이 야생의 생태계에서는 더더욱.
힉슨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역시 그렇지?”
힉슨은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론에게 이긴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음. 그래. 폭력적인 아버지 따위가 좋을 리 없지.”
오래간만이었다.
헤론을 이긴 것 같은 느낌은.
“내가 지켜주마. 옆에 있어주마.
은 어른이 되어줄게.”
“뱃살부터 빼.”
“…응?”
”
“칼 휘두르다가 배에 다 걸리겠어.”
힉슨이 멋쩍게 웃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화제를 돌렸다.
“내가 길들여야 할 네 개는 어디 있냐?”
***
비올라는 문에 기대섰다.
툰드라와 힉슨의 첫 만남.
소설 속에서와 똑같다면 둘은 기세싸움을 할 거다.
툰드라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하고, 힉슨은 그런 꼬맹이를 싫어한다.
소설대로 이어질지 지켜보았다.
흥미진진해하는 사람은 비올라뿐만이 아닌 듯했다.
비올라 옆에서 제논도 굉장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훈련사가 힉슨 경이라니. 생각도 못 했어요.”
“배가 나와서 그렇지, 좋은 훈련사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툰드라는 힉슨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네가 내 훈련사라고?”
사실 툰드라는 납득할 수 없었다.
훌륭한 검술 스승이라길래 그럴듯한 사람을 기대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불뚝이 아저씨가 나타났다.
체격이 좋기는 한데, 툰드라가 생각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툰드라가 비올라 쪽을 쳐다봤다.
“주인님을, 위해, 검술을, 배우라고 했잖아요.”
툰드라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의 분노 밑바탕에는 깊은 좌절감도 깔려 있었다.
‘훌륭한 성견이 되어, 공녀님의 옆에 서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검술을 익히려고 했다.
손을 내밀어준 저 사람의 옆에 있고 싶어서.
반려견이 되고 싶어서 노력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처사는…….’
새로이 꾸게 된 꿈을 짓밟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힉슨은 좋은 검술 선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낯빛도 안 좋았고, 몸에서는 술냄새도 났다.
단련되지 않은 몸이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 어디서 주정뱅이를 데려온 것 같았다.
“이빨을 갈라고 하셨잖아요.”
툰드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장난감이라더니. 이런 식으로 능욕하시는 건가요? 저는 그냥 장난감에 불과했나요?”
반려견이라는 꿈이 저에게는 너무 사치였습니까?
지난 며칠, 정말 설렜는데.
이를 바드득 갈았다.
힉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른을 대하는 자세가 아주 별로구나.”
“어른?”
“어른과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배울 필요가 있겠어.”
힉슨이 히히 웃었다.
“나는 제자를 아주 엄하게 가르치는 편이거든.”
힉슨이 뒤를 돌아봤다.
“꼬맹이. 이제부터는 개와 훈련사의 시간이다.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
“왜?”
“혹독한 시간이 될 거거든.”
“아저씨. 신나 보이네.”
“나는 이런 눈빛을 하고 있는 놈들을 좋아해.”
헤론 녀석도 옛날에는 이런 눈빛이었다.
지금은 능구렁이 같아졌고, 독사의 교활함과 호랑이의 용맹함을 모두 갈무리하고서 숨기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딱 이 소년 같았다.
“내 옛 친구가 떠오르는군.”
비올라가 정곡을 찔렀다.
“아저씨 친구 없잖아.”
“네가 어떻게 알아?”
“친구 별로 없을 것처럼 생겼어.”
“그것참 가슴 아픈 말이군. 내게도 찬란한 과거가 있었는데.”
“그 과거는 아저씨가 발로 차버렸지.”
“아무튼 사실로 뼈를 때리는 재주를 가졌다니까.”
비올라의 말은 모두 맞았다.
의외로 정곡을 찔렸다.
정곡을 찔린 힉슨은 이 대화가 즐거웠다.
“그치만 나는 믿어.”
“뭘?”
“아저씨는 제법 괜찮은 어른이 되어줄 거라는 걸.”
그 말에 힉슨은 아주 크흠, 헛기침을 했다.
비올라의 말이 날카롭게 심장을 찔러왔다.
내 딸이 살아 있었다면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어줬을 텐데.
정말 괜찮은 어른이 되어줬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 ‘
비올라가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이 말을 위해 아까 뱃살 빼라고 타박했다.
“그리고 뱃살 빼면 조금 멋있을 거 같기도 해.”
힉슨은 확실히 정했다.
비올라에게 반드시 좋은 어른이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의욕이 불타올랐다.
“많이 멋있어 주도록 하지.”
힉슨이 목을 돌렸다.
우드득! 소리가 났다.
언제 들었는지, 손에는 둔탁한 목검이 들려 있었다.
힉슨이 툰드라를 보는 눈빛은, 비올라를 보는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 남자끼리. 뜨거운 몸의 대화를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