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2화힉슨에게 툰드라를 소개시켜 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남주라는 훌륭한 씨앗을 힉슨이라는 좋은 토양에 뿌려주었으니 세계 관 최강자로 쑥쑥 자라나 주겠지.
비올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어?’
저만치 멀리,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눈에 확 띄는 붉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큰 키, 붉은 정장,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 남자들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단발머리. 거기에 붉은 입술까지.’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세이반 마르코스!’
세이반 마르코스.
헤론 공작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저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이쪽을 향해 총총걸음으로 걸어왔다.
몸동작이 약간 요망했다.
“오호호호! 이게 누구야, 새로 오신 6공녀 비올라 공녀님이신가요?”
세이반은 비올라 뒤의 제논과도 눈을 마주쳤다.
“제논은 오늘도 섹시하네.”
“오랜만에 뵙네요.”
제논이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그사이,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네가 세이반 마르코스야?”
“저를 아세요?”
세이반 마르코스는 눈을 크게 떴다.
단발머리를 검지로 배배 꼬았다.
“우리 공작님께서 저를 벌써 소개해 주셨나?”
머리카락을 꼬던 손가락을 턱에 대고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흐음.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공작님이 그렇게 세심한 남자는 아니 어서.”
“하나도 안 세심한데, 왜 좋아해?”
세이반 마르코스의 몸이 움찔했다.
순순히 인정했다.
“잘생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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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반 마르코스는 공작의 외모에 반해 겨울 성에 몸을 의탁했다.
그러고서 측근이 되었다.
헤론 공작 역시 세이반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세이반 마르코스,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도 안 좋아하시잖아요.”
“나는 네 능력을 높이 산다. 그래서 내 옆에 두는 것이다. 선은 넘지 말도록」
소설 속에서 공작은 살벌하게 경고한다.
허튼짓하면 목을 쳐버리겠다고.
「 “공작님께 죽는 것도 나름, 황홀할 것 같은데요.”
이 세계는 판타지 세계이고, 게이가 환영받는 세계는 아니었다.
보통은 차별받았는데 심한 경우 돌에 맞아 죽기도 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공작의 측근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그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올라가 말했다.
“아버지의 측근 중 한 명이라지?”
“네. 일단은요.”
“아버지한테 반해서 몸을 의탁한 가면술사 겸 인형술사. 내 생각보다 잘생겼네.”
“저에 대해 공부하셨어요?”
“응.”
공부까진 아니고 독서했어.
당신 그래도 종종 나오더라.
꽤 능력자로 묘사되더라구.
시체를 활용한 가면도 잘 만들고, 변장술이나 화장술에도 뛰어난 데다가 인형까지 잘 다룬다고.
세이반이 씨익 웃었다.
“6공녀께서는 저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머리카락을 배배 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들, 저보고 역겹다던데.”
“어. 역겨워.”
원작 속 비올라는 대놓고 역겹다고 말한다.
세이반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것보다는 그냥 대놓고 역겹다고 말하면서, 능력은 인정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 흐름을 쫓아가기로 했다.
줄기는 비슷하게, 그렇지만 디테일은 다르게.
“그것참 가슴 아픈 말이네요.”
세이반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크게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넌 어딘가 고장 난 변태 같은 놈이니까.”
“고장 났다는 말은 자주 들어요.”
비올라는 세이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작품을 덕질했던 독자로서, 더 나은 개척 방향을 읊었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말이야. 유부 남에게 집적거리는 건 추잡하잖아.”
“…네?”
세이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네요?”
“네가 남자든, 여자든, 그딴 건 내가 알 바 아냐. 그렇지만 일단 내 아버지는 결혼했거든.”
“정략결혼일 뿐인걸요.”
“아무튼, 결혼했잖아.”
무려 두 명의 아내와 결혼 서약을 맺었다.
“결혼이라는 건 서로에 대한 서약이고 맹세 아니야? 사랑이란 감정은 배제하고서라도.”
“흠. 그건 또 그렇네요.”
“그 서약과 맹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아버지께 구애하는 게 정상은 아니지.”
사실 아린은 세이반 마르코스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독자 아린에게 세이반은, 최애캐에게 자꾸 치근덕거리는 불한당 같은 존재였다.
“심지어 아버지는 단호하게 거절한 걸로 아는데.”
세이반 마르코스는 재미있다는 듯 흐흐 웃었다.
“혹시 사실로 뼈 때린다는 말 자주 듣지 않으세요?”
“종종 들어.”
“미움받기 좋은 타입이시네요.”
“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
“어딘가 고장 난 변태 같은 놈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단순히 고장 난 변태였다면, 아버지께서 네 목을 붙여놓으셨을 리 없지.”
“……..”
“너도 알잖아. 네가 살아 있는 이유.”
“공녀님은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쓸모가 있어서.”
작품 속 세이반 마르코스는 늘 최선을 다한다.
공작에게 있어서 자신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되는 날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공작님께서는 가차 없이 저를 내 치시겠지요.”」
그래서 세이반은 악착같이 삶을 살아낸다.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삶이야말로 세이반 마르코스가 진정 가치 있다 여기는 삶이기도 했다.
“나는 네가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로 뼈 때린 것뿐인데.”
“그걸 이렇게 받으실 줄이야.”
“그리고 이왕이면 내게 쓸모 있으면 좋겠어.”
세이반이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숙여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세이반은 웃고 있었다.
‘나는 네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마음에도 없는 위로나 응원보다는 이쪽이 세이반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말이었다.
진성 독자였던 아린은 그렇게 파악했고, 세이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세이반의 귓가에 비올라의 말이 아른거렸다.
‘이왕이면 내게 쓸모 있으면 좋겠어.’
묻고 싶었다.
‘공녀님. 일곱 살이 맞으신가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진 것 같았다.
세이반이 허리를 세웠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비올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서약과 맹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아버지께 구애하는 게 정상은 아니지.’
누구도 세이반에게 이런 식의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정신병에 걸렸다고, 어딘가 고장 났다고 말하고 비난할 뿐이었다. 뒤로는 쑥덕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정말 좋은 말씀이에요, 공녀님.”
그 누구도, ‘결혼한 남자에게 구애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여자였다면, 아마 세상의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유부남에게 수작을 부린다고 말이다.
이치상,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이반은 늘 다른 이유로 공격받고 욕을 먹었다.
이 일곱 살짜리 공녀님은 그것을 짚어주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너무나 당연한 말을 했다.
그 별거 아닌 말이 많이 기뻤다.
공녀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뭘 계속 쳐다봐?”
“혹시 괜찮으시다면.”
세이반이 제안했다.
“내일 있을 환영 만찬회에서, 제가 공녀님 화장을 해드려도 될까요?”
“네가? 왜?”
“공녀님께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잖아요. 제 능력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공녀님을 그 누구보다 빛나게 만들어 드릴게요.”
순간, 비올라는 읽어낼 수 있었다.
‘무, 무서워.’
저 눈빛은 평범한 눈빛이 아니었다.
미치광이 예술가의 광기 어린 눈빛이었다.
살기와는 또 다른 영역의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이반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그는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양새로한 팔을 높이 뻗었다.
눈동자에 집착 어린 광기가 번뜩였다.
“그 누구보다 오만하고, 그 누구보다 찬란한 아름다움.”
“…….”
예감이 안 좋았다.
“공녀님의 그 살기 어린 눈빛은 귀기를 더해 더욱 요사스러워질 것이고.”
‘……내가 살기 어린 눈빛을 했나요?”
그런 적 없는데.
느낌이 더욱더 안 좋아졌다.
“오만함과 도도함이 한데 어우러진 차가운 표정에, 색(色)의 마술이 더해져 맹수의 흉폭함을 덧입을 것입니다.”
“…….”
세이반이 히죽 웃었다.
“독 가시를 지닌 치명적인 백합꽃과 같은 모양새.”
“그 누구보다 오연히 빛나는 지배자의 모습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잠깐만,
뭔가 너무 거창하지 않아?
“요동치지 않는, 그러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해일의 광오함을 담아.”
비올라는 저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미친 예술가의 예술혼이 담긴 대사였다.
“공녀님도 원하시지요?”
세이반의 눈빛을 읽었다.
광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거절하는 순간, 왜 날 거절해! 최선을 다하라고 했잖아! 노력하라고 했잖아!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잖아!‘라고 눈알을 까뒤집고 달려들어 칼로 푹푹 찌를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다.
‘무, 무섭다!’
속마음을 필사적으로 감췄다.
일부러 피식 웃었다.
“기대하지.”
풍성한 드레스 아래로 감춰진 다리가 달달 떨렸다.
*****
침대에 누운 비올라는 허공에 여러 차례 발길질을 했다.
‘으어!’
이건 아니다. 변신의 귀재. 변장의 달인.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자세이반의 화장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 느낌이 안 좋다.
단순히 화장이 아니다.
세이반의 말대로 더욱 살기 어린 살쾡이, 탐욕 많은 지배자, 귀기 어린 살육자.
대충 이런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도록 화장 마법을 펼쳐줄 것이 분명했다.
망했어.’
아무래도 망했다.
벌떡 일어나 전신 거울 앞에 서봤다.
‘엄청 예쁘긴 한데.”
예쁘다.
귀엽다. 사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예쁨 뒤에, 말로는 표현하기 애매한 아우라가 있다.
불길하고 음습하다.
뭐랄까.
예비 살인마 꿈나무 같다고나 할까.
‘공포 영화에 나오는, 예쁘지만 불길한 여자 같네.’
아름다운데, 등장하면 꼭 음산한 BGM이 깔릴 거 같았다.
일부러 눈에 힘을 줘봤다.
씨익 웃어봤다. 세이반의 말대로 오만하고 도도해 보였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쪽으로는 정말 타고났다.
그러니 세이반의 화장을 받으면 더 더욱 이 특유의 분위기가 심화되겠지.
‘하아. 괜찮겠지?’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뭐 해?”
비첸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움직임이 날쌘 족제비 같았다.
“헤헤. 이건 곤란한데.”
비올라는 순간 울고 싶었다.
‘ ‘내 손에 왜 칼이………?”
단도가 들려 있었다.
벨라투의 후계자들은 몸속 어딘가에 모두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
휴대하기 편하도록 대부분 단도의 형태를 하고 있다.
비올라도 마찬가지다. 허벅지춤에 단도를 차고 다닌다.
‘내가 칼 휘둘렀어?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거울을 보며 넋 놓고 있던 사이, ‘진짜 비올라’가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헤헤. 칼이다. 칼.”
비첸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신이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