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23화 (23/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3화

“헤헤. 칼이다. 칼.”

비올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아는 비첸이라면…….’

좋아. 우리 함께 칼싸움을 해보자!

신이 난다!

라면서 단도를 꺼내 마구 휘두르고도 남을 캐릭터다.

‘응?’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있네?’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른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비첸에게 어울리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약간 조신했다.

오늘따라 약간 조신한 비첸이 그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거울 보고 있었어.”

“왜? 공주병 걸렸어?”

아무래도 여덟 살 비첸은, 거울을 보면 공주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올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왔어?”

“나 여기. 다쳤다?”

비첸이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이거.”

무릎에 상처가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

“근데?”

“많이 아프다?”

칼침 맞아도 안 아프다고 하면서 저게 뭐가 아프다는 건지.

비첸은 비장하다고 해도 좋을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연고 발라줘야지.”

“왜?”

“그야, 비올라는 연고를 발라주니까?”

“네 스스로 발라.”

“스스로 발라본 적 없어.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럼 집사 시켜.”

“싫어.”

“왜?”

“그냥 싫어!”

비첸이 당당하게 연고를 내밀었다.

“자. 여기.”

비첸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있기는 했다.

약 발라달라고 떼쓰는 것이, 이 모습만 보면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맞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꼬맹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란다.

해달라고 다 해주면 버릇 나빠진다.

비올라가 물었다.

“뭐 해줄 건데?”

“내가 뭔가를 해줘야 돼?”

“당연하지.”

“안 해주면?”

“안 발라줘.”

비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내가 혼자서 바를 테다, 라고 말한 지 2초 만에 다시 몸을 돌렸다.

“뭘 해주면 되는데?”

“나중에 내 소원 하나 들어줘.”

“소원?”

비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잠시 고민했다. 소원이라. 좀 너무 큰 거래 같은데.

비올라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연고 뚜껑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연고를 조금 퍼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비첸의 눈동자가 연고를 따라 움직였다.

간식을 좇는 강아지의 눈 같았다.

꼬리만 붙여주면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음. 알았어.”

비올라가 종이를 내밀었다.

“자. 여기 사인해.”

“사인?”

“어. 사인하면 약 발라줄게.”

계약서란 아주 중요하다.

약 한 번 발라주고 소원권을 따낸다면 아주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여기 피…….”

펜을 주려고 했는데 비첸은 기다리지 않았다.

검지를 물어뜯은 뒤, 새어 나온 피로 사인했다.

‘무, 무서워.’

역시 제정신이 아니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놀란 표정을 숨겼다.

떨리는 마음을 감춘 채 비첸의 무릎에 연고를 발라줬다.

“읏, 따, 따, 따가워! 살살 발라!”

비첸은 엄살을 부렸다. 약을 다 발랐다.

그러나 비첸은 엉거주춤 서서 뭉그적거렸다.

“뭐 해, 안 가고?”

“헤헤.”

검지를 내밀었다.

“여기도 발라줘야지. 피 난단 말이야.”

그건 멀쩡한 펜 놔두고, 물어뜯어서 그런 거잖아.

연고에 대한 집착이 생각보다 훨씬 심했다.

“있잖아, 비올라.”

비첸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방을 떠나고 싶지 않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일단 내뱉었다.

“비첸은 비올라가 부럽다?”

“뭐가?”

“환영 만찬회 하잖아.”

“그게 부러워?”

“응. 나는 그런 거 없었어.”

당연하다. 비첸은 태어나면서부터 벨라투였다. 입양되지 않았기에, 환영 만찬회도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래. 밥만 먹으래.”

비올라도 아는 내용이다.

환영 만찬회에서 형제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들러리처럼 가만히 밥만 먹다 간다.

환영 만찬회의 주인공은 헤론 공작, 이사벨라 공작 부인, 비올라. 이렇게 셋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환영 만찬회가 아니니까.

만약 진짜 환영 만찬회’였다면, 가족 간에 서로 인사하고 얼굴을 익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환영 만찬회.

실제 소설 속 소제목은 ‘공작가의 살벌한 시험대’다.

비올라의 벨라투로서의 자질을 평가하고 시험하는 자리.

“오빠는 밥만 먹어.”

“…응.”

비첸은 시무룩해졌다.

“다음에 나랑 재미있게 놀자.”

“응!”

비첸은 기운을 조금 차렸다.

“재미있게 논다고 약속했다?”

“그래.”

“알았어. 약속은 꼭 지키라고 있는거. 알지?”

“알았다니까.”

기운을 완전히 차린 비첸이 싱글벙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떤 의미로 참 다루기 쉬운 아이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새벽 4시.

제논이 비올라를 깨웠다.

“공녀님?”

“…..”

“공녀님?”

비올라는 의식과 상관없이 중얼거렸다.

“……잘 거야.”

음냐, 음냐, 비올라는 꿈속에서 뭔가를 먹는 듯 쩝쩝거렸다.

제논은 손목시계를 살펴보았다.

곤히 잠든 비올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1분만 더 주무세요.”

따뜻한 눈동자로 1분을 지켜보았다. 속으로 셌다.

5. 4. 3. 2. 1.’

이제는 깨워야 했다.

“공녀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잠시 흔들겠습니다.”

비올라의 어깨에 손을 댔다.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순간, 비올라의 손날이 제논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읏차!”

제논은 가볍게 손날을 피했다.

손날에는 마나가 녹아들어 있었다.

“얇은 철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잘라 버리시겠네요.”

제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비올라를 깨웠다.

“공녀님. 일어나셔야죠?”

결국 비올라는 잠에서 깼다.

그녀는 스스로 손날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네 시자아(4시잖아).”

미쳤어? 새벽 4시에 왜 잠을 깨워?

“준비하셔야 합니다.”

““해벼 에시이데(새벽 네 시인데) …….”

“환영 만찬이 오전 9시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어니깐. 아지 해벼 에 시다고(그러니까. 아직 새벽 네 시라고)!”

환영 만찬이 9시인데, 왜 새벽 4시에 깨우냐. 진짜 죽고 싶냐.

비올라의 눈에 저도 모르게 살기가 깃들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일어나세요.”

제논이 비올라의 등을 받치고 일으켜 주었다.

아, 졸려.

더 자고 싶어.

일곱 살의 몸은 수면욕을 이기기에 너무 연약하단 말이다.

‘졸려.’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몸이 잠깐 움직인 것 같기는 한데, 꿈 같았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 제 경동맥 잘릴 뻔했는데요.”

제논이 비올라의 손목을 잡으며 자신의 목을 방어했다.

그러고서 조심스레 비올라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잠을 일찍 깨워서 정말 죄송하기는 합니다만 목을 치실 것까진 없잖아요?”

“…….”

“그것도 두 번이나요.”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이 육체가 제멋대로 움직인 거야.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잠이 계속 쏟아졌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왼쪽으로 각도를 3도 정도만 틀어보세요.”

“…….”

친히 어깨 근육을 짚어주었다.

“이곳에 힘을 빼고 휘두르시면, 살해 성공 확률이 10% 이상 증가할 겁니다.”

내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주었다.

“세이반 경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꾸벅꾸벅.

잠이 몰려들었다.

일곱 살의 육체는 잠에 매우 취약했다.

***

결론적으로 비올라는 계속 꾸벅꾸벅 졸았다.

그사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다.

시녀들이 향유가 가득 담긴 물로 목욕을 시켜주었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도 입혔다.

머리도 열심히 매만졌고 마사지도 받았다.

‘8시 30분이네.”

오전 8시 30분이 되었다. 이쯤 되니 비올라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준비가 다 되었단다.

거의 잠에 취해 있던 비올라는 크게 불편할 게 없었다.

눈을 떠보니 대부분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머리 감기와 말리기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았던 아린은 의외의 편리함을 경험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아름다우셔요. 제가 본 그 어떤 일곱 살 영애보다도 기품 있고 아름다우시네요.”

재미있는 사실은 세이반의 얼굴이 바뀌어 있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는 분명 세이반이었는데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비올라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시체들의 얼굴을 벗겨 가면을 만드는 가면술사니까.’

그 사실을 떠올리자 순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세이반이 몸을 부르르 떨고서 말했다.

“이 정도면, 헤론 공작님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약간 달뜬 숨이 느껴졌다.

공작을 생각하기만 해도 설레는 모양이었다.

거울 속 세이반이 밝게 웃었다.

목 부근에 미세한 상처가 있었다.

뭔가에 긁힌 것 같은 상처였다. 웬상처지?

“공녀님. 이제 가위는 그만 내려주시겠어요?”

“………..”

비올라의 손에 가위가 들려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들었다. 왜 역수로 들려 있지? 어깨는 또 왜 이렇게 뻐근해? 뭔가를 마구 휘두른 것처럼.

“저 세 번이나 죽을 뻔했답니다.”

세이반이 웃었다.

“호호호, 기술을 조금만 다듬으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살인귀가 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뇨. 그런 거 안 되고 싶은데요.”

비올라는 속으로 꾹 참았다. 저 미세한 상처는 비올라 자신이 낸 상처같았다.

비몽사몽에 아무렇게나 휘두른 모양이었다.

‘보통 비몽사몽이라고 해도, 가위를 휘두르지는 않잖아!’

도대체 이 육체는 어떻게 생겨 먹은 육체란 말이냐!

툰드라의 눈을 5초 이상 보면 확!

돌아버리고, 툰드라랑 포옹 이상의 스킨십을 하면 또 확! 돌아버리고, 에그타르트 앞에서는 이성을 상실하며, 정당방위 발음을 못할 만큼 발육이 엉성한 데다가, 비몽사몽에서는 가위를 휘두르는 육체라니!

‘젠장!’

비올라는 자신이 들고 있는 가위를 봤다.

척 봐도 명품이다.

절삭력이 으뜸일 것 같다.

제대로 찔렀으면 피가 철철 났겠지?

세이반이 비올라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눈을 감은 채, 본능에 따라 가위를 휘두르며 상대의 급소를 찾아 찌르려던 그 모습은, 정말로 매혹적이셨어요.”

“…….”

“진심이랍니다.”

……

·진심일 필요 없는데요.

요즘 자주 있는 일인데, 오늘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갑갑해졌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논이었다. 전신 거울 안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논의 모습이 보였다.

제논은 늘 그렇듯 검은색 단정한 양복을 입었다.

세이반이 제논을 스쳐 지나갔다.

세이반의 손끝이 제논의 어깨에 닿았다. 손가락이 요물같이 움직였다.

“제논은 오늘도 섹시하네.”

“과찬이십니다.”

제논은 고개를 숙여 세이반과 인사한 뒤, 비올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아름다우시네요.”

사실 일곱 살짜리가 아름다워 봐야 얼마나 아름답겠어.

이게 원래 비올라가 가진 생각이었다.

전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어리긴 어린데….’

아린은 깨달았다.

일곱 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저 소녀는 일곱 살답지 않은 묘한 분위기와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러면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기품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화장술이 대륙 으뜸이라더니. .’

손가락을 들어 올려 거울을 만져봤다.

거울 속 소녀도 똑같이 움직였다.

‘이게 나야?’

세이반의 화장술이 그 오묘한 분위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특별한 마법의 힘이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외모를 아름답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었다.

세이반의 화장술은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오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내었다.

제논이 허리를 숙였다.

“안내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이 계셔야 할 자리로.”

“….…그래.”

“오늘만큼은, 누구보다 더 찬란히 빛나실 것 같네요.”

제논이 비올라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찬란히 빛나셔야만 합니다. 공녀님.”

비올라가 그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제논과 함께 걸었다.

결국 도착했다.

환영 만찬.

소설 속 소제목 ‘공작가의 살벌한 시험대’ 에피소드와 맞닥뜨렸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