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6화
‘믿는다, 설정값!’
비올라는 소설의 설정을 믿기로 했다.
소설 속 비올라는 소설 중반부에 ‘포션 비올라’를 먹게 된다.
이까짓 포션 따위가 날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일부러 마셔 버린다.
비올라는 포션 비올라를 먹고서 죽지 않는다.
배짱을 부렸던 비올라조차도 속으로 당황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훗날,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비올라는 포션 비올라가 듣지 않는 특이한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작가가 직접 설정한 그 설정값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 다섯 가지 포션 중, 가장 극독을 마시기로 했다.
저들 앞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죽진…… 않겠지?’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해야 해.’
기선 제압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
어중간한 마음가짐과 도전으로는 이 벨라투 공작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남은 건 직진뿐이었다.
“마실게요, 친애하는 가족 여러분.”
비올라가 유리병 입구에 코를 댔다.
냄새는 의외로 괜찮았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포도주 같은 냄새였다.
“이 포션은 누가 만들었어요?”
다 알지만 굳이 물었다.
“포션에서 왜 그리운 감정이 뚝뚝묻어날까?”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다름아닌 헤론 공작이었다.
헤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올라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별다른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으나, 비올라는 저 고요함 뒤에 숨겨진 흉폭한 기세를 읽어낼 수 있었다.
헤론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 어떻게 들은 거지?”
비올라는 두려움을 감추고서 연기했다.
“듣지 않았고, 봤는데요.”
“봤다?”
“봤어요, 그냥.”
소설로 봤어요.
“무엇을 봤느냐?”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죽음보다.
더한 사랑. 그리고 간절한 염원. 그게 보여요.”
헤론 공작이 비올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올라는 괜히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눈동자가 생명을 가지고 내게 숨겨진, 나조차도 모르는 기억 저편의 모든 비밀까지도 탐색하는 것 같았다.
「헤론 공작은 아주 특별한 눈을 가졌다.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본능적인 혜안이었다.」
소설 속에서 말하는 ‘진안’이었다.
‘ ‘진안 때문에, 헤론은 더 헷갈릴 거야.’
비올라는 지금 진실만을 말하고 있으니까.
그녀는 포션 비올라의 입구를 입에 대고 기울였다.
꿀꺽꿀꺽.
포션 ‘비올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몸속에 들어왔다.
온몸이 화끈화끈해졌다.
달짝지근한 설탕물이 온몸의 혈관구석구석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끈적한 불을 내면서.
‘뜨거워.’
온몸이 뜨거워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찮은 거 맞아?’
목이 말랐다.
뭐가 됐든 좋으니 마시고 싶었다.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피.’
만살(萬殺) 공녀 캐릭터의 몸이 피를 원했다.
‘뭔 놈의 피냐!
당연히 비올라는 피 따위는 마시고 싶지 않다.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그래서 열심히 생각했다.
‘자몽 주스, 수박 주스, 오렌지 주스’그중에서도 으뜸은,
‘딸기 주스, 아니, 딸기 우유지!
달달한 설탕으로 버무린 딸기청에 우유를 섞고,
‘아, 아니다. 우유보다는 탄산수가 낫겠어.’
그러면 상콤달콤하고 시원한 딸기 에이드가 된다.
거기에 자글자글한 얼음을 동동띄워 먹으면 크으!’
딸기 에이드를 떠올리니 피에 대한 갈증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사이, 본의 아니게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피를 탐하는 귀신 같은 요기를 뿌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고, 만살 공녀 캐릭터가 가진 설정값이었다.
헤론과 이사벨라.
그리고 형제들 모두가 그 기운을 직접 보고 느꼈다.
특히 이사벨라는 비올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저게…… 살성(殺星)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피를 갈구하는 저 눈동자가 보였다.
요사스럽게 빛났지만,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이사벨라가 보는 비올라는 그랬다.
이사벨라는 그 뛰어난 머리로, 완전히 반대로 생각해 버렸다.
‘진심으로 피를 탐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성으로 제어하고 있군요.
놀라운 통찰력.
그보다 더 뛰어난 자제력.
그리고 그 모습을 우리 앞에서 완벽하게 연출하고 있어요.”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력과 상황 응용력까지.
‘재미있어요. 재미있는 벨라투가 들어왔어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공작의 눈썰미는 옳았다.
저 작은 여자아이는 벨라투를 집어삼킬 야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 야망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만큼 작정했다는 건, 그만큼 이 벨라투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숨기지 않겠다는 거죠.
저 아이의 교묘하고 영특한 선전포고로 해석했다.
물론 아니었다.
비올라는 얼음을 동동 띄운 달콤한 딸기 에이드 생각에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피를 탐하고 있지만 이성으로 그걸 제어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피 따위는 원하지 않을 뿐이었다.
약간 시간이 흘렀다.
온몸을 태울 것 같던 작열감이 사라졌다.
피에 대한 갈증도 점점 없어졌다.
‘괜찮….
다?’
소설의 설정대로였다.
‘다. 다행이야.’
다행히 괜찮았다. 도박수가 잘 통한 것 같았다.
비올라는 빈 유리병을 머리 위에 톡톡 털었다.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 마셨어요.”
여전히 형제들은 무서워서 못 봤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사벨라 공작 부인 쪽만 한 번 훑어봤다.
포크를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이제 밥 먹을까요?”
시험을 지나치리만큼 완벽하게 통과해 낸 막내딸을 보는 헤론 공작의 눈빛이 기묘했다.
왜 나는 완벽한 벨라투를 마주하고기쁘지 않은가.
‘왜 난 만족스럽지 않은가?’
그 생각 때문에 헤론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침묵을 유지하며 비올라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음에 안 들어.’
비올라를 아무리 뚫어지라 쳐다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편,
비올라는 비로소 약간 안도할 수 있었다.
‘헤론은 관심이 없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아.’
눈길만 안 주면 다행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기억 속에서 아예 지워 버린다.
그렇게 잊혀지면, 언젠가 형제들의 손에 사냥당할 것이다.
‘제법 만족한 거 같은데?”
아주 조금 뿌듯해졌다.
공작이 꽤 오랫동안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제법 만족 정도가 아니라 매우 흡족하다는 거야.’
최애의 마음을 꿰뚫어 봤다고 자부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벨라투로서의 진로를 결정하게 될 열 살 때까지 큰 변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열 살이 기점. 그때까지 잘살아남자.’
약하면 잡아먹힌다.
태연한 척하며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다가 다른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실례라고 느낄 정도로,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은빛 머리의 소녀였다.
비올라는 저 은발의 소녀가 누군지까지 사사건건 부딪치는 상대.
벨라투 공작가의 지략가로 성장하게 된다.
비올라가 소설 후반부까지 상당히 까다롭게 생각했던 상대이기도 했다.
‘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플 언니.’
게다가 거상(巨常)으로 거듭난다.
쉽게 말해 대부자가 되는 언니다.
자고로 부자랑 친해서 나쁠 게 없다.
‘친하게 지내야지.’
언니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환영 만찬회가 끝이 났으니, 조만간 ‘헤라와의 만남’ 에피소드가 이어질 거다.
헤라도 비올라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일부러 싱긋 웃었다.
저 언니한테만큼은 착하게 보이자.
저 언니랑은 친해져야 돼.
엄청난 부자가 될 언니라고.
저 언니야말로 이 작품 최대 주식이었다.
비올라와 눈이 마주친 헤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시선을 피했다.
여기까지는 원작과 같았다.
「헤라는 비올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 이후, 비올라는 헤라를 무시했다.」
시선을 피한 벨라투.
비올라가 보기에 어린 헤라는 벨라 투가 어울리지 않는 겁쟁이 혹은 패배자였다.
그래서 원작 속 비올라는 헤라를 무시했다.
‘환영 만찬회’ 다음 챕터에 이어지는 4공녀와의 만남’에서 비올라는 헤라를 무시하며 쫓아내는 참담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헤라가 비올라를 찾아왔을 때, 비올라는 단칼에 그녀를 쫓아냈다.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그렇게 헤라와 비올라는 적이 된다.
원래 소설에서는 그렇다.
‘뭐. 그렇게 해야 적도 생기고 긴장감도 생기겠지만.
작가 입장에서야 어떨지 몰라도 비올라는 ‘작품의 완성도’ 따위는 상관없었다.
가늘고 길고 행복하게………!’ 작품의 완성도 따위는 알 게 뭐람.
비올라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헤라와 눈을 마주쳤다.
‘주식. 내 주식. 폭등해 주라.’
기대감을 담아 헤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헤라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힘센 게 다가 아니라고.’
힘센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여기도 현대와 같다.
‘힘센 것보다는 돈 많은 게 더 세지. 암.’
무조건 친해져야 한다.
비올라가 그렇게 다짐하며 새로운 챕터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환영 만찬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