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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27화 (27/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27화환영 만찬회는 끝이 났고 비올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겨우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비올라에게는 열 시간처럼 느껴졌다.

‘힘들었다. 진이 다 빠졌어.”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발라당 드러누웠다.

제논이 침대 옆에 섰다.

“공녀님. 피곤해 보이시네요.”

“어. 피곤해.”

제논이 비올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달콤한 주스를 건넸다.

“이거라도 드릴까요?”

침대에 녹은 듯 널브러진 비올라를 일으켜 주었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제논은 의외로 섬세했다.

손길도 굉장히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비올라를 향한 배려가 많이 담긴 손길이었고 말투도 다정했다.

“걱정 마세요. 컨디션을 고려하여 독은 약한 걸로 넣었어요.”

“…….”

원래 이 공작가는 그렇다.

모든 음식에 미량의 독을 조금씩 넣는다. 독살당하지 않기 위하여,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독을 미리미리 섭취한다. 내성을 키우는 행위였다.

‘내 신체 상태를 고려하여 정확하게 계량된 독을 넣었겠지?”

무색무취의 독.

맛은 그냥 오렌지 주스랑 똑같았다.

아. 달달하다.

딸기 에이드가 먹고 싶네.

“내가 일어났을 땐, 딸기 에이드가 있으면 좋겠어.”

“준비해 놓겠습니다.”

“얼음 동동 띄워서.”

“명심하겠습니다. 얼음은 극세 분쇄하여 눈꽃처럼 올리겠습니다.”

“응.”

뭐, 뭔가 많이 거창한 거 같지만 아무튼 맛있겠지.

끔뻑끔뻑.

눈이 감겨왔다.

새벽부터 지나치게 강행군이었다.

일곱 살의 육체는 졸음을 버텨내지 못했고, 순식간에 비몽사몽이 되어버렸다.

의식이 반쯤 멀어졌다.

비올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움직였다.

“졸려.”

스르르,

비올라의 몸이 침대에 녹아내렸다.

잠에 빠져들었다.

제논은 침대를 내려다봤다.

비올라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 일부가 또 입속에 들어가 있었다.

“음냐음냐.”

잠든 비올라는 머리카락을 소처럼 질겅질겅 씹었다.

제논은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빼내 주며, 작게 물었다.

약을 발라 드려도 될까요?”

비올라는 잠들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제논이 아주 살살 이불을 걷어 올렸다. 비올라의 정강이와 발등이 보였다.

독 포션이 묻어서 화상을 입은 부분이었다.

아까 연고를 살살 발라주기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되려면 몇 번 덧발라야 할 것 같았다.

“그럼, 허락하신 줄 알고 실례하겠습니다.”

제논이 무릎을 꿇었다.

아주 천천히, 비올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앉았다.

연고 뚜껑을 열었다.

화상을 입은 부분에 섬세한 손길로 연고를 발라주었다.

제논은 그 자세 그대로 몇 번이나 비올라에게 연고를 덧발라 주었다.

마르면 다시 발라주고, 마르면 다시 또 발라주었다.

“여러 번 덧발라야 흉 지지 않거든요.”

끙차, 허리를 세워 일으켰다.

제논은 안다.

아무리 비올라여도, 살인귀로서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해도, 이 정도 화상을 입으면 아프다.

잠든 비올라를 쳐다보면서 빙그레웃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얼음은 극세 분쇄하여 눈꽃처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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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짧은 순간 표정이 굉장히 화사해졌다.

얼음이 가득 들어간 딸기 에이드가 그렇게 좋은 건가.

‘그 화사함이……… 싫지 않네요.’

가능하다면 그 화사함을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들은 비올라 공녀님이 이렇게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겠지요?”

환영 만찬회에서 비올라의 모습은 제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누구보다 벨라투다웠으며 순혈 벨라투 이상의 막강한 존재감을 뿜어냈었다.

‘그랬던 분이….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씹으며 꿈나라에 빠져든 모습이라니.

의식이 있는 비올라와 의식이 없는 비올라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제논은 빙그레 웃으며 새근새근 잠든 비올라의 얼굴을 계속 쳐다봤다.

‘정말 이상하네요.’

비올라는 절대 귀여울 리 없는 벨라투의 공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잠든 저 얼굴이 귀여웠다.

***

약 네 시간이 지났다.

비올라가 눈을 뜨자 제논의 얼굴이 보였다.

“뭐 해, 여기서?”

“그냥. 공녀님 옆에 있었어요.”

“왜?”

“공녀님이 자꾸 이불을 발로 차버리시더라고요.”

이불을 계속 덮어주기 위해 네 시간을 옆에 있었단다.

“이럴 때 배탈 나면 안 되잖아요.”

“이럴 때?”

“포션 비올라를 드셨잖아요.”

“…아.”

독 마셔서 그렇다고 소문날까 봐두렵다나 뭐라나.

비올라 벨라투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나 뭐라나.

“그래.”

그럼 그렇지.

순수하게 걱정할 리 없지.

그런데 그때.

제논이 예쁘게 웃었다.

“안 아프셔서 다행이에요.”

말투가 굉장히 다정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비올라 자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자체는 진심인 것 같았다.

“난 괜찮으니까, 나가봐. 집사도 좀 쉬어.”

“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제논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요, 공녀님. 아주 잠시 솔직해져도 괜찮을까요?”

“무슨 말이야?”

“음.”

제논이 예쁘게 미소 지었다.

약간 머뭇거렸다.

제논은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슬펐어요.”

“뭐가?”

“공녀님 다리에 상처가 났을 때요.”

“그게 왜?”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이상하시죠?”

비올라도 약간 혼란스러웠다.

‘네가 왜 슬퍼?’

제논은 독특한 캐릭터다.

남의 고통이나 괴로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본인의 감정도 잘 모른다.

때문에 어린 시절 괴물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저 감정 없는 캐릭터가 슬프다고 표현했다.

‘원작에… 자기가 슬프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열심히 생각해 봤다.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제논 스스로가 저렇게까지 솔직하게 ‘감정’을 읊은 적은 없었다.

“어. 이상해.”

“그러니까요. 공녀님의 다리에 상처가 났는데, 왜 제가 슬펐죠?”

“글쎄.”

제논은 진심으로 신기해했다.

신기해하다가 또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 감정, 이거 굉장히 묘해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인데, 이왕이면 안 느끼고 싶은 찝찝한 기분 이에요. 슬프다는 거. 머리로만 알았지, 겪는 건 처음이네요.”

“…….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해진 것 같아요.”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공녀님이 다치면 슬퍼지네요.”

“………..”

“그러니까 공녀님이 다치지 않으면 좋겠어요.”

비올라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진성독자로서의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제논이 변한 이유. 스스로의 감정을 자각한 이유.

그것을 읽어냈다.

‘비올라라는 캐릭터가 변했기 때문일 거야.’

그래서 그 옆의 캐릭터인 제논도 변했다.

비올라가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비올라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캐릭터인 제논도 그에 맞게 진화했다고 판단을 내렸다.

‘내 이성을 흔드는 방식. 내게서 빈틈을 찾으려는 방식. 감성의 영역을 건드리는 방식. 조금 더 진화된 방법으로 나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거야.’

그래.

제논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캐릭터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네.

‘휴. 차라리 명확해지니 마음이 편해져.’

실제로 마음이 편해졌다.

제논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가 원작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렇지만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안 다치면 좋겠다고?”

비웃듯 웃었다.

“나는 벨라투야.”

안 다칠 수는 없다.

아무리 몸 사리고 조심히 행동해도 다치는 경우는 분명히 발생한다.

비올라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지, 하나도 안 다치는 건 아니었다.

비올라의 말을 이해한 제논이 허리를 숙였다.

“너무나 잘 알고 있죠, 비올라 벨라투 공녀님.”

“그런데 왜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을까? 다치는 게 뭐? 그게 어째서 슬픈 일이지? 제논,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논은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비올라는 전혀 몰랐지만, 사실 제 논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제논은 고민했다.

‘이 말을 해도 될까요?’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제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벨라투의 공녀님이시죠.”

“그래. 잘 알면서 헛소리 늘어놓지 마.”

그 말에 제논은 또 조금 가슴이 아팠다.

저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그냥 알았다고, 다치지 않겠다고, 네가 슬퍼할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건 제 욕심이겠지요.

왜 이런 욕심이 드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주인을 모시는 집사에게, 주인께서 직접 명령을 내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무슨 명령?”

그 순간, 작가가 설정한 제논이라는 캐릭터의 설정값이 바뀌었다.

비올라도 제논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공녀님을 지키라는 명령이요.”

집사 자신의 의지로는 공녀를 지킬수 없다.

지킬 수 없는 게 아니라 지키면 안 된다.

집사는 집사이지, 호위 기사가 아니다.

집사의 보호를 받는 공녀는 벨라투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듣고 싶어요.”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을.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키게 되는 것.

그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저는 공녀님이 안 아프면 좋겠어요.”

“………..”

“그러니 제가 지켜 드리고 싶어졌어요.”

비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와. 진짜 진심 같았어.’

만약 소설을 열심히 파보지 않았다.

면, 제논의 캐릭터를 잘 몰랐다면, 이대로 홀라당 넘어갔을 것 같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제논은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비올라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아무리 소설 속 정보를 이용했기로 서니, 일곱 살에 불과한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모두 열 리는 없었다.

저 말에 휘둘려서.

‘나를 지켜줘’.

등의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 제논은 속으로 크게 실망할 거다.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면서, 벨라 투의 자격을 다시 의심하기 시작하겠지.

‘후, 낚일 뻔했어.’

표정과 말투가 너무 다정하고 간절해 보였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지키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네?”

“벨라투는 네가 아니라 나니까.”

벨라투는 지키는 자다.

북쪽 숲.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는 방패.

그것을 언급했다.

제논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제논이 허리를 세웠다.

빙그레 웃는 저 얼굴에는 비올라를 향한 호감이 잔뜩 녹아 있었다.

“이럴 때는 제가 집사인 것이 아쉽군요.”

“아쉽다고?”

“만약 제가 회슨 경과 같은 외부인이었다면, 제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주셨을까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로부터 하루 뒤.

황당한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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