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33화
“제 이름은 비올라 벨라투라고 해요. 올해로 일곱 살이 되었어요.”
간단해 보이는 이 인사말 속에는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벨라투임을 밝혔다.
“베, 벨라투?”
“벨라투라고 했어?”
비올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벨라투인 걸 모르고 접근했단 말이야?’
헤라에게 의뢰를 받고 고용된 용병들이라 짐작된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의뢰를 받은 모양이다.
‘하긴. 정신 제대로 박힌 용병이면 이런 의뢰는 수행하지 않겠지.’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임무.
몰락 귀족의 힘없는 어린 여자애를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놈들.
제대로 된 용병일 리 없다.
아마도 수많은 패악질을 해왔을 거다.
그렇기에 경각심 없이, 큰 걱정 없이 이번 임무도 덜컥 받아들였겠지.
잠시 당황하던 복면인들은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벨라투라고?”
“벨라투가 수행원 하나 없이 이런 외진 곳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으하하핫!”
“퍽이나 벨라투겠다!”
저들은 비올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첫째로 나는 벨라투임을 밝혔고, 둘째로 일곱 살이라는 것도 밝혔어.”
“도대체 이 아가씨는 뭘 믿고 이렇게 당돌할까?”
복면인들이 흐흐 웃으며 다가왔다.
“이곳, 겨울 성은 헤론 공작님의 엄격한 명령에 따라, 열 살 이하의 모든 어린아이는 보호받게 되어 있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무기로 위협하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쓰레기들이.”
쓰레기라고 확신하지만 혹시 몰라 물었다.
“무서우신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아이를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나요?”
“최소 스물 이상.”
마치 자랑하듯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 저번에 대량으로 한바탕하지 않았습니까? 서른 이상입니다.”
“아, 그랬었지.”
저들에게는 납치와 노예 판매가 곧 자랑거리인 듯했다.
후후 웃었다.
“특히 너같이 귀티 나는 어린애들은 비싼 값에 팔리지.”
비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제논, 깨끗한 물.”
비올라의 그림자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꿈틀 피어올랐다.
복면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림자 속에 기척을 완전히 숨길수 있는 경지.
복면인들에게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여기 있습니다.”
생수병을 받아 든 비올라가 손바닥에 물을 따라 귀를 씻어냈다.
“너무 더러운 말을 들어서.”
“너, 너, 넌 뭐냐!”
복면인들은 제논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네 명 중 가장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는 보지도 못했다.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털썩.
그의 몸이 쓰러졌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모두 다 독에 당했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고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쓰러진 분은 극독. 그리고 나머지 세 분은 마비 독에 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선택지를 드릴게요.”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시간 뒤. 저분은 어차피 죽어요.”
“여러분은 한 시간 내에 저자를 데리고 겨울 성을 빠져나가세요. 그러면 나머지 셋은 살려 드릴게.”
겨울 성 내에서의 살인은 금지되어 있다.
그렇기에 겨울 성 내에서 사람을 죽이면 일이 복잡해진다.
“지금부터 열을 세면, 여러분의 독은 풀립니다. 10. 9…….”
숫자를 모두 세었을 때.
제논이 손가락을 튕겼다.
거짓말같이 마비 독이 풀렸다.
“선택하세요. 같이 극독을 먹고 죽을래요, 아니면 한 명만 죽는 걸로 끝낼까요?”
“나, 나, 나가겠습니다.”
“한 시간이에요.”
“아, 알겠습니다.”
쓰러진 남자를 둘러업었다.
나머지 셋이 뛰기 시작했다.
비올라가 여유로이 웃으면서 말했다.
“언니. 지금 당장 안 튀어나오면, 테라 상단 모두를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비올라는 이 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말뿐인 경고는 힘이 없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리고 제논, 저놈들은 겨울 성을 벗어나는 순간 모두 죽여.”
*** ‘달밤’의 문이 또 열렸다.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휠체어에는 은발의 소녀가 앉아 있었고 가냘픈 팔로 바퀴를 굴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집사는 데려오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이런 버러지들을 데려온다는 말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그냥 이곳에 몰락 귀족의 영애가 오게 될 거라는 정보를 흘렸을 뿐이지.”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또 했다.
“집사를 데려온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해, 언니.”
“어째서?”
비올라는 원작 비올라 흉내를 내며 제논 쪽을 쳐다보았다.
“집사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말이야.”
히죽 웃었다.
“내가 전부 죽였을 테니까.”
벨라투의 순혈이 겨울 성 내에서 살인을 저지르면 사건이 커지게 된다.
공작 성에서 사찰단이 직접 나와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벨라투임을 고지했고, 일곱 살이라는 것도 미리 밝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게 위협을 했고, 나는 그들을 모조리 죽였겠지. 정당방이었을 거야.”
비올라는 울고 싶었다.
‘젠장! 또 발음이 썼잖아!’
다행히 헤라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겠지만,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볼까? 벨라투답지 못한, 이런 더럽고 치졸한 짓을 벌인 당사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보겠지? 언니의 입지가 더 좁아지지 않겠어? 오히려 나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
헤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비올라가 헤라 앞에 서서 헤라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언니를 좋게 봤어. 지금도 좋게 보고 있고.”
원작 속 비올라는 이런 뒤통수를 매우 싫어한다.
계략과 지략은 잔머리이고 비겁한 술수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아린은 아니었다.
헤라는 헤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고, 한아린은 헤라를 응원했던 독자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살려두는 거야.”
비올라와 눈이 마주친 복면인 하나의 몸이 움찔했다.
무슨 일곱 살 눈빛이 저렇게 살벌한 건지 모르겠다.
저 눈빛은 분명, 사람을 죽여본 눈빛이었다.
타고나기를 다르게 태어난 종족 같았다.
지금은 어리지만 조금 더 성장한다면 살인귀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니. 나한테 왜 거짓말했어?”
“너도 집사 데려왔으니 퉁 치는 게 어때?”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그래, 퉁 치기로 해.”
마음이 조금 놓였다.
‘다행이야. 내가 독자였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이곳에 왔다면 크게 당황할 뻔했다.
“내가 밀어줄게.”
비올라가 헤라의 뒤로 걸어갔다.
제논이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밀겠습니다, 공녀님.”
“괜찮아. 내 언니잖아.”
헤라의 몸이 움찔했다.
‘괜찮아. 내 언니잖아.’
저 말이 이상하리만치 나쁘지 않게 들렸다.
방금까지 비올라의 모습과, 지금 비올라의 모습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다르지 않아.
만약 비올라가 당황하거나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랬다면 ‘괜찮아. 내 언니잖아’라는 저 말이 따뜻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한심했겠지.’
비올라가 보여준 모습이 있기에.
절대자로서의 재능을 이미 증명했기에.
그래서 따뜻하게 들린 거다.
같은 말이라고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들리니까.
비올라가 휠체어를 밀었다.
“그래서. 진짜 테라 상단은 어디야?”
***
헤라는 비올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특히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
비올라가 말했다.
“당연히 돈이 최고지.”
“……돈?”
“사람은 돈이 있어야 돼. 돈이면 귀신도 부려.”
“거침없네.”
헤라가 풉, 웃고 말았다.
“비올라. 너는 공작가의 공녀가 되었어.”
“알아.”
“그런데 그런 천박한 말을 쓰면 되니? 돈이 최고라니.”
“언니는 돈 싫어?”
싫을 리 없다.
훗날 헤라는 어마어마한 거상이 된다.
그 지략과 수완을 바탕으로 하여 아주 크게 성공한다.
비올라는 헤라에 대해 잘 알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생각했어.”
“왜 우리 귀족들은 돈이 좋다고 얘기하지 못할까?”
“그까짓 체면과 겉치레가 뭐라고.”
」
헤라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좋아.”
“그럼 언니도 천박한 거네?”
“그럴지도.”
헤라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서렸다.
“너 되게 특이하다.”
“알아, 나도.”
이 세계관에 미친 자가 많은 것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빙의자만큼 특이한 사람은 없을 거다.
비올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귀족들이 돈 좋아한다고 말 안하는지 알아?”
“왜?”
“배부른 돼지들이라서 그래. 배고파 본 적이 없으니 고상한 척하는 거야.”
순간, 헤라가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올라는 순간 마음에 한 줄기 광명이 깃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작 속에 이런 설정이 존재했다.
「 「헤라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과 대화하면,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헤라가 이제 마음의 문을 열었다.
비올라가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됐다.
이 언니.
이제 확실히 내 편 될 거 같다.
그래서 원작 속 헤라가 했던 말들을 각색하여, 헤라를 위한 융단 폭격을 내려주기로 했다.
‘갑니다, 부자 꿈나무 언니!’
소설 내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돈을 벌고 싶다는 게 천박한 심성이라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돈 벌고 싶다 하면 천박하다는 개소리나 지껄이지.”
“너는 천박하다고 생각 안 해?”
“돈은 소중한 거야.”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본 한 아린은 더욱 잘 알고 있다. 돈은 중요하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 않니?”
“맞아.”
비올라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세계관 내 둘째가라면 서러울 금수저의 입양 딸이 되었으나 마냥 행복 할 수 없었다.
친오빠와 죽음의 경쟁을 하질 않나.
남주를 납치하질 않나.
복면을 쓴 괴한들에게 위협을 당하질 않나.
“돈 있어도 불행할 수 있지. 근데 돈 없으면 어떤지 알아?”
“어떤데?”
“다 불행한데, 돈 없는 것까지도 불행해. 이왕이면 돈 있고 불행한 게, 돈 없고 불행한 거보다 낫잖아.”
헤라가 또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귀족 영애가 할 말은 아니네. 자고로 귀족 영애는 불행조차 인내하고 고난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고난은 고난이지, 고난이 어떻게 달콤해?”
“정신 수양과 단련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가는 거지.”
“누가 그래?”
“다들 그래.”
“제정신이 아니네.”
“또한 가난은 행복의 잣대가 되지 않아.”
비올라가 히죽 웃었다.
“게네가 굶어봤대?”
“귀족이니까 안 굶었겠지?”
헤라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비올라와 대화하니 재미있었다.
귀족 특유의 느낌이 없었고, 헤라에게는 그것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올라가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런 걸 뭐라고 하게?”
“뭐라고 하는데?”
“개소리.”
비올라의 얼굴에 귀기가 서렸다.
역시 의도한 건 아니었다.
비올라라는 캐릭터가 갖는 본질적인 기운이었다.
생기를 잡아먹는 사이한 기운.
“그런 개는 내가 다 죽여줄게, 언니.”
마침 제논이 보고를 올렸다.
“모두 죽였습니다.”
비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찝찝하고 두려웠다.
그렇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헤라에게는 그 모습이, 마치 살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보였다.
살인에 익숙한 벨라투의 공녀처럼 보였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계절 사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이었다.
비올라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부자 꿈나무가 아니라…….’
꿈나무 따위가 아니었다.
이미 헤라는 부자였다.
“이게…… 언니 건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