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34화
“여기야?”
굉장히 규모가 컸다.
10층 건물이었다.
이곳은 판타지 세계였다.
마도공학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높은 건물을 짓는 건축 기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이곳의 마도공학이 본질적으로 과학 기술보다 떨어진다기보다는, 넓디넓은 땅을 가진 이 세계에서 건물을 굳이 필요 이상으로 높이 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10층이면 엄청 높은데?”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현대로 치면 대략 70층 정도 되는 빌딩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비올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건물주!’
조물주 위에 갓물주 있다고 했다.
‘근데 열두 살에 건물주야?’
어떤 의미로는 정말 사기적인 캐릭터였다.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체감하니 더욱 절절하게 느껴졌다.
다시 다짐했다.
친하게 지내야겠다.
“난 언니가 마음에 들어, 정말, 진심으로.”
테라 상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지사장은 누구로 내세웠어?”
“그런 말도 알아?”
빈민가 출신이라서 아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아버지가 괜히 벨라투로 데려온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근방에 명망 있는 상인이 있었어.”
‘있어’가 아니고 있었다’ 였다.
“지금은?”
“죽었지.”
비올라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원작에 이런 내용까지는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죽였어?”
“설마.”
그럼 그렇지.
벨라투가의 속성이 그렇다.
적에게는 잔혹하지만, 양민을 무턱대고 살해하지는 않는다.
“죽어 있더라.”
헤라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묻었어.”
“그럼 어떻게….”
거기까지 말한 비올라는 알 것 같았다.
‘세이반 마르코스!’
그렇다.
테라 상단의 주인.
현재 시점의 주인은 ‘세이반 마르코스’였다.
그는 시체로부터 얼굴 가죽을 벗겨 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을 재현해 낼수 있다.
세이반 마르코스가 얼굴 가죽을 벗겨내 사장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
잠깐 방심했다.
그래. 이 세계는 이런 세계지.
방심하면 안 돼.
비올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세이반 마르코스는 어디 있어?”
“세이반 마르코스?”
헤라는 고개를 돌려 비올라를 쳐다봤다.
헤라가 또 킥, 웃었다.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알아낸 거야?”
헤라가 손을 내밀었다. 비올라는 영문도 모르고 그 손을 맞잡았다.
헤라는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느껴져?”
“심장 소리?”
“응. 너라면 알 거야.”
뭘 안다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내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아. 그런 얘기였어?
“너를 만나게 된 것이, 좀 기쁘네, 비올라.”
비올라가 의도한 상황이기는 했는데 조금 낯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헤라는 벨라투치고는 비교적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아이다.
원작의 지식을 이용해서 이 아이의 마음을 훔쳐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스레 찝찝했다.
‘찝찝할 건 또 뭐야.’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진짜 친하게 지내면 되지 뭐.’
부자 친구 좋은 친구 아니겠는가.
그중에서도 건물주, 아니, 빌딩주친구는 더 좋은 거고.
이왕이면 저 빌딩주를 더 크게 키워주면 좋겠지?’
헤라는 여러 번 킥! 하고 웃었다.
헤라와는 분명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원작 속 지식을 이용해서, 헤라를 도와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헤라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 시기를 조금만 앞당겨 주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면 더 친해질 수 있을 거고, 내 편이 되어주겠지!
비올라와 헤라는 건물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뒤, 마차에 올라탔다.
“언니.”
“응?”
“돈 많아?”
헤라가 빙그레 웃었다.
“왜? 돈 빼앗게? 내 재화를 보니 욕심이 생긴 거야?”
“그깟 푼돈 빼앗아서 뭐 하게.”
훗날.
거상이 될 헤라다.
지금의 헤라도 부자겠지만, 미래에는 더더욱 부자가 될 사람이다.
“그깟 푼돈이라니? 나 그래도 꽤 부자인데.”
“부자 아니야.”
비올라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실이었다.
미래의 헤라와 비교하면 지금은 거의 거지 수준이었다.
확신에 가득 찬 비올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비올라가 확신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농담하는 게 아니잖아?’
헤라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건물 규모를 봤을 텐데 푼돈이라니.
‘빈민가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그런 것치고 배포가 고래만큼 큰 것 같았다.
미래의 재벌 친구를 얻게 될 것만 같은 한아린은 신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현금이야. 실물자산과 현금 자산은 다르잖아. 언니 현금이 늘 부족하지 않아?”
..
갑자기 웬 현금?”
“언니 사업에 동참하고 싶어.”
언니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둘한테 다 좋잖아?
“너는 얼마 있는데?”
“없어.”
“그런데 어떻게 동참해?”
“언니. 얼마 필요해?”
돈만 주면 헤라는 알아서 불릴 거다.
헤라는 돈에 관해서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
“내가 얼마 필요하다면 구해줄 거야?”
“응.”
“왜?”
“언니한테 투자하려고.”
헤라는 또 킥, 웃었다. 언니한테 투자하겠다니.
이 아이는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걸까?
“내가 떼먹으면 어쩌려고?” ”
“그럼 내 안목이 잘못된 거지.”
아냐. 언니는 안 떼먹어.
언니는 돈으로 장난은 절대 안 치는 캐릭터라구.
헤라는 다시 한번 킥, 웃었다.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원.
헤라가 말했다.
“1억 달리아.”
진짜 1억 달리아가 필요하다는 건 아니었다.
사실 헤라에게 있어서 1억 달리아가 그녀의 사업을 좌지우지할 만큼 커다란 돈도 아니었다.
이 1억 달리아라는 돈은 헤라가 생각했을 때 비올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나마 현실적인 액수이자 상징적인 숫자였다.
“1억 달리아?”
“그래. 너무 커?”
“아니. 생각보다 너무 적네.”
“그렇게 만만치 않을 텐데?”
“구해줄게.”
헤라는 흐음, 하고서 턱을 매만졌다.
“무슨 꿍꿍이야?”
“두고 보면 알아.”
며칠 후,
벨라투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재정집사부에서 난리가 났다.
*****
제논이 하얀 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공작님을 직접 찾아가시겠다고요?”
“응.”
“어째서요?”
제논이 이마를 한 번 더 닦았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목을 움켜쥐었을 때도 나지 않던 땀이 진짜로 났다.
“공녀님도 아시다시피 공작님은 아주아주 바쁘고, 시간을 금보다 귀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랍니다.
“그래서?”
비올라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리가 짧아 땅에 닿지 않았지만 분위기만큼은 이사벨라 공작 부인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약속을 잡지 않고 무단으로 방문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 하세요.”
“그러니까 집사보고 약속 잡으라고 말한 거야.”
“그러니까 약속을 잡는 이유가……
돈 빌려달라고 하신다는 거죠?”
제논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혹시나 싶어 확인했는데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이 달아날 거 같은데, 한 번만 재고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지만 비올라는 단호했다.
제논은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문을 닫고 나왔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엄살 가득했던 제논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비올라 앞에서 울상이던 모습은 온 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 시간이면 서재에 계시겠지?’
곧바로 공작의 서재를 찾았다.
똑똑.
노크하고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 기계처럼 살아가는 공작답게 서재 안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공작님. 비올라 공녀가 공작님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깃펜으로 무엇인가를 적던 헤론이 제논을 쳐다보았다.
“이유는?”
“그게…….”
머쓱한 듯 웃었다.
“용돈을 좀 달라고 합니다.”
제논을 쳐다보면서도 계속 움직이던 깃펜이 우뚝! 멈췄다.
제논이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안 된다고 할까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네가 말렸겠지.”
제논은 차렷 자세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헤론은 제논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불러와.”
“네, 알겠습니다.”
제논이 밖으로 나갔다.
헤론 뒤에 서 있던 칼튼이 물었다.
“화를 내지 않으시는군요.”
“재미있지 않은가.”
“공작님은 그 무엇보다도 시간을 귀히 여기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입을 다물어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칼튼은 입을 다물었다.
헤론이 책상 위의 서류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칼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작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공작은 헛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헛소리하면서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 이들을 혐오한다.
예정에도 없던 약속을 잡고서, 용돈을 달라는 헛소리를 하겠다니? 그런데 공작님은 그걸 받아들이셨다.
이상했다.
‘불러서 호되게 혼을 내실 생각이 신가?
얼마 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공녀였다.
헤론 공작이 의자에 앉은 상태로 비올라를 쳐다봤다.
“용돈을 달라고 했다지?”
“네.”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삼켰다.
무슨 아버지 분위기가 저렇게 살벌한 건지 모르겠다.
눈빛만으로 세상을 다 씹어 먹을 것만 같았다.
“왜?”
“돈이 좀 필요해서요.”
총집사 칼튼은 황당했다.
돈이 필요하니 용돈을 달라고 공작의 서재를 찾는 정신 나간 공녀는 처음 봤다.
이런 상황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칼튼이 보는 비올라는 당당했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뻔뻔했다.
‘저런 식으로 말하면 목이 잘릴 텐데….’
칼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이미 이 방법은 라엘이 사용한 방법이었고, 성공했었다.
「“저도 용돈을 좀 주세요.”
“어째서?”
돈이 좀 필요해서요.”
공작은 의외로 대놓고 뻔뻔한 것을 좋아한다.
뒤에서 흉계나 계략을 꾸미는 것보다는 앞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다만, 공작이 가진 흉흉한 기세와 살기 어린 눈빛 때문에 아무도 시도를 못 하는 것뿐이다.
독자였던 한아린은 최애캐인 헤론을 깊이 팠었고, 헤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를 딸로 삼으셨으니, 딸인 저는 용돈을 좀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찾아왔다?”
“용돈 핑계 삼아,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 말에 헤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총집사칼튼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