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38화헤론 공작은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창을 통해 푸르스름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옆으로 몸을 돌렸다.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 작은 액자가 보였다.
마도 촬영 장치를 통해 사진으로 담은 라엘의 모습이 있었다.
공작은 라엘과의 추억을 곱씹었다.
‘내가 당신의 아내여서 다행이에요. 나만 당신을 소유할 수 있잖아.’
공작은 라엘의 사진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비올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 아이.’
예전부터 느꼈다.
라엘과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있었다.
이런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외롭지 말라고, 라엘이 내게 보내준 아이인가.
‘그럴 리 없겠지.’
라엘과 비올라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점도 없다.
비올라는 그저 이용하고 버릴 패로서 입양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포션에서 왜 그리운 감정이 뚝뚝묻어날까?’
포션에서 어떻게 그리운 감정을 읽어냈을까.
라엘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포션만 보고 그런 것들을 알아냈을까.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죽음보다 더한 사랑. 그리고 간절한 염원. 그게 보여요.
이쯤 되면 라엘이 비올라의 꿈에 나타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라엘.’
공작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옆에 있어 달라고 수만 번 기도했지만 신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었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밀 금고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극상 보존 마법으로 보존된 꽃반지가 하나 있었다.
‘라엘. 당신은 내게 해당화를 선물하곤 했었지.’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공간에서, 라엘은 공작에게 해당화 꽃반지를 엮어주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공작은 얼굴을 붉혔었다.
‘사내는 이런 걸 하지 않소.’
‘사내가 아니라 남편은 이런 걸 해요.
그날 라엘의 눈웃음이 너무 예뻐서.
라엘이 행복해하는 것이 행복해서.
그래서 라엘 앞에서는 늘 그 꽃반지를 꼈었다.
그때마다.
라엘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었다.
‘엄청 잘 어울려요. 당신. 예쁘네요.”
공작가의 그 누구도 모르는, 헤론과 라엘만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비올라의 하는 짓을 보면 꼭 라엘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데요.’
‘아빠 엄청 잘생겼어요.”
‘무지 예뻐요.
이성은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런데 감성이 계속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비올라는 마치, 라엘이 자신을 위해 보내준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
헤론은 해당화 화관을 비밀 금고 속에 넣고서, 다시 한번 라엘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왠지.
라엘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고 싶구나.’
라엘이 보고 싶은 건지.
당돌한 입양 딸이 보고 싶은 건지.
공작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헤라가 포크로 딸기를 확! 찍었다.
어찌나 세게 내리찍었는지, 과즙이 주변으로 팡! 튀었다.
“제정신이야?”
“응. 제정신.”
“네가 왜 하얀 벨라투를 자원해?”
“전에도 한다고 했잖아. 언니 머리 나빠졌어?”
사실이었다.
1년 전, 비올라는 헤라에게 미리 언질을 줬었다.
하얀 벨라투가 될 거라고.
당연히, 헤라는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얀 벨라투를 조롱하기 위한 말인 줄 알았어.”
“언니가 하얀 벨라투잖아.”
“…….”
“언니 내 사람이야. 근데 내가 왜 하얀 벨라투를 조롱해?”
비올라의 선한 눈동자를 보았다.
헤라는 그 선한 눈동자를 보며 숨이 턱! 막혔다.
“가끔 헷갈려.”
“뭐가?”
“너 내 앞에서는 그렇게 착한 눈망울을 하고서.”
“언니 앞에서만 그러는 거 아냐.”
“그럼?”
“언니랑 아버지 둘 앞에서 그러지.”
세상에 딱 둘.
헤라는 그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퉁명스레 말했다.
“아무튼, 넌 철혈의 벨라투잖아. 누구보다 벨라투스러운 벨라투의 입양딸. 환영 만찬회를 기점으로 벨라투에 선전포고를 해버린 막내 벨라 투.”
환영 만찬회 때의 비올라는 여전히 공작가의 전설처럼 남아 있다.
아마 벨라투의 역사서에도 크게 기록될 것이었다.
그만큼 비올라 벨라투의 등장은 공작가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줬었다.
“응, 그랬지.”
“근데 왜? 왜 하얀 벨라투인데?”
헤라는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역사상 하얀 벨라투가 패권을 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잘해봐야 이인자다.
헤라는 하얀 벨라투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니. 언니 나 믿지?”
“여태까진 믿었지!”
헤라가 보아온 비올라는 뛰어난 수완가였다.
메이플 마을을 괴롭히던 멧돼지 무리를 조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했고, 땅을 잔뜩 사들여 엄청난 투자 이익을 뽑아냈다.
“너 최근에 산적 무리도 토벌했다며.”
“응, 뭐. 그랬지?”
정확한 내막은 조금 달랐다.
이제는 완전히 사람(?)이 된 힉슨과 소설 속 남주 툰드라를 대동해서 갔었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툰드라가 혼자서 산적 일곱 명을 죽이고, 힉슨이 세 명을 죽였다.
비올라는 그냥 구경만 했다.
“그 산적의 우두머리가 제국 기사 출신이었다지?”
“정규 기사는 아니고, 견습이었던 것 같아.”
“아무튼! 열 살에 열 명이 넘는 산적 무리 토벌이 쉬운 줄 알아?”
이런 능력을 가진 동생이 왜 검은 벨라투가 아닌 하얀 벨라투로 진로를 잡는단 말인가!
왜 저 뛰어난 재능을 썩힌단 말인가!
“언니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
“아무튼 나는 하얀 벨라투가 되기로 결정했어.”
나는 가주가 목표가 아니라 가늘고 길고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야.
그러려면 하얀 벨라투가 제격이라고,어쩔 수 없어, 언니.
“네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
“언니는 3년 전에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
3년 전에도 헤라는 비올라를 비난 했었다.
그 쓸모없는 땅을 왜 사냐고.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3년 후, 어떻게 됐어?”
“그건 운이 좋았던 거야.”
“언니 사업가잖아.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비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해진 살기를 일부 내뿜었다.
지금 철혈의 공녀가 있게 한 일등 공신.
살성을 타고난 신체의 살기가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사실 비올라는 딱 여기까지밖에 못하지만, 아무튼 살기의 농도는 진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언니한테 실망할지도 몰라.”
“…….”
헤라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 헤라도 알고 있다.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 속에 이루어진 도박성짙은 투자였다.
비올라가 다시 싱긋 웃었다.
“언니의 속상함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냐. 언니는 날 좋아하고 있고, 나도 언니를 좋아하고 있어. 언니가 나를 위하는 마음은 잘 알아.”
“됐어. 어설프게 달콤한 말은 필요 없어.”
“어설프게 달콤하지 않을걸?”
비올라가 헤라 앞에서 허리를 살짝 숙였다.
휠체어에 앉은 헤라와 눈을 마주쳤다.
헤라의 손에 손을 포갔다.
“언니처럼 뛰어난 수완을 가진 사람이 하얀 벨라투라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조롱받고, 미묘한 무시를 받는 게 싫어.”
헤라는 비올라의 눈을 마주했다.
“뭐, 뭐라는 거야?”
“나는 훌륭한 벨라투가, 내 언니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시받는 게 싫다고, 사실 하얀 벨라투가 없으면 검은 벨라투도 없을 텐데. 나는 그 꼴 못 봐주겠어.”
“…그래서 너도 하얀 벨라투를 지원했다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이유가 없다고는 안 할게.”
“…….”
헤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데.”
자신의 오른손에 올려진 비올라의 손 위로, 또 왼손을 포갔다.
“기분이 싫지는 않네.”
그 어떤 벨라투도 헤라에게 이렇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오로지 비올라만 이렇게 말해주었다.
헤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천 개의 가면을 쓸 줄 아는 벨라 투’제논이 내린 평가는 그랬고 헤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비올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3년이 지난 지금도.
비올라 벨라투의 진심을 모르겠다.
‘진심이든 가면이든.
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했다.
사실은 가면일 확률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나는 네 말이 마음에 들어.’
헤라가 말했다.
“아버지도 널 검은 벨라투의 재목으로 생각하셨을 거야.”
“그랬겠지.”
숨을 가다듬은 헤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허락하셨을 리 없다는 거 알지?”
“알아.”
비올라가 허리를 세웠다.
“아마 무지막지한 시험을 내리시겠지.”
*
지난 3년간, 툰드라는 힉슨 밑에서 검술을 배웠다.
힉슨은 강맹한 힘을 바탕으로 한 패도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검술가였다.
툰드라 역시 힉슨의 영향을 받아 강한 힘 위주의 무거운 검술을 익혔다.
툰드라는 길이가 무려 2m에 달하는 대검(大劍)을 다루었는데, 그 솜씨가 또래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늘 노력했다.
비올라 벨라투 옆에서 부끄러운 반려견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반반백서는 벌써 30번도 넘게 읽었다.
툰드라는 아공간에 대검을 갈무리한 뒤 노크했다.
“주인님, 부르셨어요?”
툰드라는 성큼성큼 걸어 비올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앞으로 바빠질 거야. 얘기는 들었지?”
“하얀 벨라투를 지원하셨다고 들었어요.”
검은 벨라투든.
하얀 벨라투든.
아무렴 어떻든 상관없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비올라는 자신의 은인이었고,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해?”
“공작께서 주인님을 시험하실 것 같아요.”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괴롭힘 수준의 임무가 주어질 거다.
사실 공작은 하얀 벨라투가 아니라 검은 벨라투를 원하고 있으니까.
난 죽어도 검은 벨라투는 안 해!’
일인자가 될 생각도 없고 진짜 만살(萬殺) 공녀가 되고 싶지도 않다.
비올라가 생각하기에 이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툰드라가 말했다.
“주인님.”
“왜?”
“고개를 들어도 될까요?”
“안 돼.”
비올라는 3년간, 5초 이상 툰드라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몸속 비올라가 또 튀어나올 수 있으니까.
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네.”
“대신 머리 쓰다듬어 줄게.”
눈을 마주치지 않는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툰드라 입장에서, 본의 아니게 밀당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슥슥—
툰드라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좋네요.
이 손길이 좋았다.
이 손길을 위해 산적을 토벌했다.
주인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툰드라의 가슴속에 몽글몽글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주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강아지의 마음이 이러할까.
또 다른 욕구도 피어올랐다.
‘눈을 보고 싶어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냥 눈을 보고 싶었다.
늘, 먼발치에서만 비올라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여전히 허락하지 않으시지만……….
3년 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먼발치에서 훔쳐만 봤다.
야속하게도 주인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게 조금 슬펐다.
‘그렇지만 욕심부리지는 않을게요.
언젠가.
때가 되면.
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겠지.
‘충분한 교감 후에는 당당하게 요구해도 될 거야.’
반반백서를 읽고나니 크게 급하지는 않았다.
충분한 교감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다른 반려견들처럼 행동할 수 있으리라.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툰드라는 비올라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3공자. 쿤도?’
툰드라는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저자가 여기는 웬일로?”
그의 몸에서 피 냄새가 잔뜩 나고 있었다.
쿤도의 눈빛이 어딘지 요상하고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