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42화 (42/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42화

“좋아요. 대신 딸기 우유는 다 마시고 가도 되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끌었던 이 행동을, 메데이아는 다르게 해석했다.

“여유 있구나.”

형제 중 그 누구도 비올라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대놓고 적대감을 보이는 2공자나 3공자도 사실 이렇게까지 평온한 모습으로 딸기 우유를 마신 적은 없었다.

더더군다나 연무장으로 가자는데 말이다.

비올라에게서는 긴장하거나 겁먹은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맛있잖아요. 제논이 직접 만들어준 거예요.”

“집사가?”

“네. 딸기를 직접 갈고 얼려서 만들어줘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얼음은.”

제논과 비올라가 동시에 말했다.

“눈꽃처럼.”

“눈꽃처럼.”

제논이 허리를 숙였다.

“공녀님께서 딸기 우유를 워낙 좋아하셔서요. 제가 연습 좀 했습니다.”

“제. 당신은 빙검(劍)의 대가라지요? 그 능력으로 딸기 우유를 만들고 있는 건가요?”

“1성 기사께서 대가라고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제 검술이 이런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 기쁩니다.”

“라스본 빙검식으로 극세 분쇄하여 만들어낸 딸기 우유라니. 흥미롭네요. 다음에 저도 대접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비올라는 최대한 천천히 딸기 우유를 마셨다.

메데이아는 귀부인과 같은 모양새로 홍차를 마시며 비올라를 기다려 주었다.

‘저 모습마저 예쁘네.”

최애캐가 헤론이었다면 차애캐가 메데이아였다.

메데이아는 늘 올곧았고 강직했으며, 그 어떤 시련과 위협에도 굴복한 적이 없었다.

늘 평안을 유지하는 고요한 호수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홍수를 일으켜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호수.

비올라는 딸기 우유를 아껴 마셔가면서 메데이아에 대한 정보를 정리했다.

「메데이아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원했다.」

메데이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는데, 거기에 더해 필사적인 노력까지 겸비한 노력형 천재였다.

「강력한 패권 아래, 더 이상 다치거나 죽는 형제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녀는 강해져야만 했다.」

그녀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가장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소설 후반부.

비올라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캐릭터이기도 했다.

「 “비올라. 높이 성장했구나.”

“언니. 나는 당신을 동경하면서 동시에 증오했어.”

소설 후반부가 되어서도, 메데이아공녀는 넘어서기 어려운 거대한 벽이었다.

「“당신은 늘 찬란했고 고고했어.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어. 제일 역겨웠던건. 당신이 피도 섞이지 않은 동생인 나조차도 사랑했다는 거야.”

“문제는 내가 당신을 공격할 거라는 걸, 언니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잖아.”

비올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 붉은 눈동자에서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원작 속 비올라가 그나마 마음을 열고 정을 준 사람이 메데이아였다.

비올라에게 있어서 메데이아는 애증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약 당신이었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않았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주지 않았겠지.

당신은 내가 가장 존경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존경할 벨라투야. 그런데, 왜.」

그날은 마침 비가 왔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그날,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충분히 성장했으니까. 난 이미 지쳤어. 그러니까 편히 쉬고 싶어.”

비올라는 그녀의 무기인 단도를 휘둘렀다.

메데이아의 몸이 기울어졌다.

「“네게 무거운 짐을 떠넘겨서 미안하구나. 못난 언니를 용서하렴.”」

쓰러지는 와중에도 메데이아는 중심을 잡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했단다. 내 가족. 내 동생아.”」

그 말을 끝으로 메데이아는 눈을 감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 자세 그대로,살아생전 올곧았던 메데이아는 마지막까지 올곧았다.

1공녀는 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해.”

그렇다면 방법은 있었다.

***

연무장.

그곳에는 마침 툰드라가 검을 배우고 있었다.

“오, 메데이아. 여긴 어쩐 일이냐?”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제논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힉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올라가 아무리 천재여도, 네가 시험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에요.”

“내가 막겠다면?”

“벨라투의 의지를 막는 자는 무너뜨릴 수밖에요.”

“네가? 날?”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힉슨이 눈을 부릅떴다.

“많이 컸네, 옛날에는 요만했던게.”

마치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저씨는 많이 작아졌어요. 그때, 아저씨 손이 엄청 컸었는데.”

“내가 작아진 게 아니라, 네가 커진 거지.”

힉슨은 휴, 한숨을 쉬었다.

“누가 벨라투 아니랄까 봐 흉흉한 눈빛 보소. 그러다 아주 날 잡아먹겠다?”

“필요하다면요.”

힉슨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중재자는 있어야겠지?”

“아저씨가 맡아주신다면 안심이 되겠네요.”

“말리다가 누구 하나 베어도 난 모른다.”

“그 누구가 제가 될 수도 있겠네요?”

“높은 확률로?”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었다.

“제 동생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네요.”

“어. 내가 마음으로 품은 딸이거든.”

“딸이요?”

“못 들었어? 헤론 놈에게 정확히 그렇게 전달했는데.”

“처음 들어요.”

메데이아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얼굴에 생기가 도네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당시 메데이아는 몇 년 뒤 힉슨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인 아버지가, 망가진 친구인 힉슨을 죽여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펐었다.

그런데 6년이 흐른 지금.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선 힉슨은 전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원인이 비올라, 너구나.’

비올라를 향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무기를 들음. 어떤 무기를 사용하니?”

“단도를 사용하고 있어요.”

“태생적으로 불리한 무기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

메데이아가 검을 뽑았다.

스릉—

맑은 검명이 연무장 안에 울려 퍼졌다.

햇빛을 받은 것도 아닌데 번쩍였다.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칼날은,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명품 같았다.

“단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게 최우선이란다.”

“알고 있어요.”

“그래. 내가 너무 당연한 얘기를 했나 보네.”

“언니.”

“왜?”

“핸디캡을 주세요.”

만약 상대가 다른 벨라투였다면 이런 식의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1공녀 메데이아였다.

“어떤 핸디캡?”

“언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반드시 이길 수 있어요.”

“그래?”

메데이아가 씨익 웃었다.

핸디캡을 달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저 모습이 밉지 않았다.

‘실력을 확인하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3공자 쿤도의 몸에 상처를 입힌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실력인지.

그것만 확인하기로 했다.

“갈게요, 언니.”

비올라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그를 위하여 그 어떤 검술보다 보법이 중요해져. 남들보다 최소 반박자는 빠르게 타이밍을 읽고 들어….”

메데이아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비올라가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보법이 아니야.’

그냥 걸어왔다.

“그런 식으로 들어오면 베여.”

메데이아가 검을 휘둘렀다.

후웅—

메데이아의 검이 비올라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가 허공에 나부꼈다.

비올라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동요가 전혀 없네?”

메데이아의 시선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와씨, 개무서워!’

속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내가 이 짓을 3년째 해오고 있다고.

많이 익숙해졌다.

피에 미친 살인귀 꿈나무 비첸을 상대로도 많이 연습했다.

매일같이 제논의 시험 아닌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런 것쯤이야.’

메데이아는 신중한 캐릭터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도 않을 거다.

그렇다고 비올라 자신을 베지도 않겠지.

‘언니는 혈육을 절대로 베지 않아.’

그래서 원작 속 비올라는 메데이아를 싫어했다.

자신은 죽자고 덤비는데, 메데이아는 늘 그것을 받아주기만 했다.

그게 원작 속 비올라를 화나게 만들었었다.

그렇지만 지금 비올라는 원작 속비올라가 아니었다.

‘난 화 안 나.’

날 안 베는 게 왜 화가 나?

절대 화가 날 일이 아니지.

오히려 땡큐, 땡큐, 오, 땡큐지!

메데이아가 말했다.

“무턱대고 다가오면, 베여.”

또다시 위협적인 검로로 검이 날아들었다.

비올라는 피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미세하게 비올라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비올라의 목에 가벼운 상처가 났다.

핏방울이 송송 맺혔다.

‘으, 으윽, 쓰라리다!’

그렇지만 연기에는 이제 토가 떴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갔다.

검술 천재 메데이아는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비올라는 그냥 걸어가서 메데이아를 허리를 꽉 껴안았다.

“이겼다.”

챙!

소리와 함께 비올라가 쥐고 있던 단도가 땅에 떨어졌다.

비올라가 단도를 땅에 버려 버린 것이다.

메데이아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제 중 누군가와 포옹은 단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체형을 분석하기 위한 포옹이 아니라 진짜 포옹은 말이다.

뭔가 기분이 미묘했다.

“비올라. 너무 무방비한데. 내가 적이었으면 넌 절명했을 거야.”

“그럼 찌르면 되잖아요.”

“…….”

“하지만.”

비올라가 메데이아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한 발자국 뒤로 떨어졌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언니한테 대놓고 적개심을 드러내는 2공자나 3공자가 살아 있을 리 없었겠지요.”

비올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 혹시 괜찮다면 주변을 물려도 될까요? 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1공녀 언니.

후계자는 너로 정했다!

순순히 차기 공작이 되어주세요.

‘나의 편안하고 찬란한 노후를 위하여!’

그 밑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