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44화 몇 분 전.
헤론은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비올라의 방으로 가고 있는 거지?’
아까까지 초급속 냉결 마법으로 보존시킨 화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비올라가 생각나서 이곳으로 왔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비올라의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데이아 언니가 되어주세요.”
방 바깥에서 기척을 느껴보니 비올라와 메데이아가 서로를 안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마나를 극도로 컨트롤하여 모든 기척과 소리를 죽였다.
소음이 전혀 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올라와 메데이아가 포옹을 하고 있었다.
비올라의 키가 많이 작아 뒤꿈치를 바짝 들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건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헤론의 이성이 생각했다.
이 무슨 아름답지 못한 광경인가.
벨라투의 형제들이, 어째서 저토록 무른 모습을 보이고 있단 말인가.
메데이아는 비올라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러고서 허리를 가볍게 숙이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아버지를 뵙습니다.
아버지이자 겨울성의 군주인 헤론을 향해 예의를 차렸다.
비올라는 따라 할까 따라 하지 말까를 고민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저런 깍듯한 예의범절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모든 사람이 으레 겨울 군주를 향해 경의를 표하지만, 사실 헤론은 그런 경의와 예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하나?’ 이 세계의 예의범절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근데 나, 아무래도 타이밍 놓친거 같아.’ 예의를 차리려면 진작에 했어야 했다.
지금 와서 가슴에 손을 대는 경례가 더 어색할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편하게 하기로 했다.
양쪽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경례를 하고 있는 메데이아의 몸이 움찔했다.
어서 오세요라니.
너무나 평범한 인사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곳은 평범한 가문이 아니라 벨라 투 가문 아닌가.
메데이아는 속으로 걱정했다.
‘비올라. 긴장을 풀지 말거라.’
상대는 아버지이기 전에 천살 공작헤론이다.
메데이아에게는 그랬다.
아버지인 헤론보다는, 겨울 군주헤론이 더 가까웠다.
“그런데 무슨 설명을 요구하시는 건가요?”
“하얀 벨라투를 지원하지 않았나?”
하얀 벨라투는 똑똑해야 한다.
상대의 속마음까지 꿰뚫고 읽어내서 지략을 짜내는 사람들이 하얀 벨라투다.
그러니까 지금 헤론의 말은.
‘하얀 벨라투라면 상황을 알아서 해석해라.
라는 뜻이었다.
“비올라를 안아보았습니다.”
“메데이아 언니를 안아봤어요.”
헤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상황을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알 텐데.”
메데이아는 잠시 고민했다.
아까의 대화는 벨라투로서 어울리는 대화는 아니었다.
특히 비올라에게 그랬다.
‘혈육 간의 전쟁. 후계자가 되기 위한 각종 권모술수와 암투, 다 싫어요. 저는 늘 가족을 바라왔어요.
제가 꿈꾸고 동경하던 가족의 모습은 이렇지 않아요.’
아버지가 저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메데이아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비올라를 지켜줘야 해.’
메데이아가 지극히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벨라투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덕목이지 않습니까? 상대를 안아보고 체형을 분석하며, 상대의 마나의 격과 흐름을 느껴보는 것 말입니다.”
“네가 비올라를?”
헤론은 메데이아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20대 초반에 1성 기사에 오른 인물이다.
헤론의 젊은 시절에 버금갈 정도의 성장을 이루어낸 검술가.
그런 메데이아가 굳이 비올라를 안아볼 리 없다.
체형 분석 따위는 애초에 필요조차 없으니까.
비올라가 말했다.
“제가 안아달라고 말했어요.”
“왜?”
메데이아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메데이아가 판단하기에 지금 헤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벨라투들이 벨라투스럽지 못하게 행동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서서 비올라를 변호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더더욱 벨라투스럽지 못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니?’
메데이아 언니가 되어주세요.
비올라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 메데이아는 결심했다.
이 아이의 언니가 되어주기로.
메데이아 ‘벨라투’ 언니 말고, ‘메데이아 벨라투 언니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아이를 지켜줘야 했다.
실망한 아버지로부터.
‘모르겠어.’
그러나 어떻게 지켜줘야 할지 모르겠다.
검과 검으로 맞서 싸우라면 어떻게든 싸울 수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달랐다.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도 절 안아줄 수 있으세요?”
비올라는 헤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헤론의 눈에 비올라의 움직임이 담겼다.
불현듯 아까 비올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작은 키로 발뒤꿈치를 들어가며 메데이아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비올라가 헤론 앞에 섰다.
비올라는 여전히 또래의 열 살 아이들보다 작았다.
“이유는?”
“안아주세요.”
메데이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너무나 위험해 보였다.
무턱대고 안아달라니.
저런 식의 무논리와 비합리야말로, 아버지가 혐오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유는?
하고 물었다면.
이유에 관하여 설명해야 한다.
이유는?
하고 물었는데 대답이 너무 엉뚱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을 것이다.
저 아이는 이제 열 살이고, 벨라투스럽지 않다면 제거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헤론이 비올라의 겨드랑이 안쪽으로 팔을 쑥-밀어 넣었다.
비올라는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오, 난다?’
일시적으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이 슝! 하고 떠올랐다.
‘깃털이라도 된 것 같네.”
비올라는 헤론에게 안겼다.
가슴팍에 귀를 대보았다.
쿵! 쿵!
심장이 뛰고 있었다.
누구보다 차가운 피를 가지고 있다 알려진 헤론의 심장도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평범하게 뛰었고, 평범하게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비올라가 헤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겨울 군주와 하얀 삭풍의 몸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어요. 아버지의 피를 직접 물려받은 메데이아 언니잖아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모르겠어요.”
“모른다?”
헤론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이 모든 행위가 의미 없는 행동이 되어버린다.
시간을 버려 버리는 소모적인 일이라는 얘기다.
“제 손과 손이 맞닿아야 뭐라도 파악하고 만져보고 할 텐데.”
팔을 뻗어봤지만 헤론의 가슴팍이 너무 넓었다.
“아버지 품이 너무 넓어요.”
“결국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구나.”
“아버지 품이 많이 넓고,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것을 파악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헤론은 비올라를 땅에 내려주었다.
비올라의 발이 땅에 닿았다.
“모든 시간은 의미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법이다. 벨라투는 모든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하고.”
“그냥.”
비올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
최애캐를 덕질했던 독자의 마음으로, 소설 속 세상을 꾸려갔다.
“안아주고 싶었어요.”
“어째서?”
메데이아는 혼란스러웠다.
비올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생각보다 아버지가 온건한 것도 이상했다.
‘아버지가 평소와 달라.’
만약 내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아마 크게 실망하셨으리라.
그런데 헤론에게서 실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뭔가 이상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모른다는 뜻인가?”
“네.”
비올라는 당당했다.
“하얀 벨라투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의 본질을 뚫어보는 통찰력과 혜안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곧 직관으로 연결되고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마음의 본질을 파악해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안아주시면, 그 마음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을까 했어요.”
비올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마치 나름의 고뇌에 빠진 아이 같았다.
“그런데 여전히 모르겠어요.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요.”
사실 이 질문은 헤론 벨라투의 마음속에 던지는 질문이었다.
헤론 벨라투도 지금 똑같이 느끼고 있을 테니까.
“왜 저는 아버지한테 안기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아버지는 왜 저를 안아줬을까요?”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
나는 왜 이 아이를 안아주었고, 추궁하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은 헤론 벨라투의 마음속에 큰 파도를 내었다.
그리고 그 큰 파도에 비올라가 더 큰 바람을 불었다.
“그냥. 많이 안아주시면 안 돼요?
합리적인 이유와 본질을 알아내 볼게요.”
비올라가 팔을 쭉 뻗었다.
결국, 헤론은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비올라를 다시 안았다.
비올라가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안아줘서.”
***
헤론은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 비합리적인 것투성이다.
‘나는 왜 비올라의 방으로 향했고, 또 군말 없이 비올라를 안아 들었지?’
비올라의 말이 헤론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런데 여전히 모르겠어요.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요.
‘그냥. 많이 안아주시면 안 돼요?
합리적인 이유와 본질을 알아내 볼게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데이아였다.
메데이아의 붉은 구슬 같은 눈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께서는 그 아이를 벌하실 건가요?”
“비올라를 말하는 것이냐?”
“네.”
메데이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행동은 벨라투스럽지 않다.
벨라투가 다른 벨라투를 감싸는 행위는 옳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고 싶었다.
비올라는 가면을 벗고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먼저 솔직한 모습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 어린아이가 먼저 용기를 내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용기를 낼 차례야.’
‘제가 언니를 잘못 봤고, 잘못 파악해서,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여도 괜찮아요.’
내가 실수하고 있는 거라도 괜찮아.’
완벽을 연기하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글쎄. 벌을 내리려면 그 자리에서 내렸겠지. 왜 내가 비올라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 생각했지?”
“…아버지께서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평소와 다르다.
평소보다 훨씬 유하게 대해주었다.
그 말은 곧.
비올라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모두버려 버렸다는 뜻이 된다.
메데이아 벨라투는 그렇게 해석했다.
헤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와 다르다라.’
그도 분명 인식했다.
평소와 많이 달랐다. 비올라를 대할 때면 평소와 많이 다른 모습이 나온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 임무를 비올라와 함께하고 싶어요.”
“네 임무는 폭풍 요새의 수장인 재칼을 죽이는 것이다.”
“알고 있어요. 지금 그 아이의 수준에서는 지나치게 위험한 임무라는 것도 알아요.”
메데이아는 생각했다.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비올라는 다시 한번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을 거야.’
여태까지 보여준 것들도 제법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폭풍 요새의 수장을 죽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들이 나이치고 훌륭했다면, 이번 임무는 나이와 관계없이 훌륭한 임무다.
해낼 수만 있다면 비올라의 입지와 위상이 단숨에 급상승하게 될 거다.
‘내가 도와준다면, 비올라는 다시 한번 벨라투로서의 힘을 증명할 수 있겠지.’
메데이아는 진심으로 비올라를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언니가 제 언니였으면 좋겠어요.
언니가 되어주기로 했다.
다음 날, 메데이아가 비올라의 방을 찾았다.
비올라는 마침 딸기 에이드를 마시던 중이었다.
메데이아는 비올라로부터 딸기 에이드를 건네받았다.
이런 달콤한 음료수는 오랜만이었다.
시원한 청량감이 온몸에 파고들었다.
“맛있죠?”
“맛있구나.”
메데이아의 눈에 비올라는 영락없는 열 살짜리 꼬맹이였다.
“비올라. 곧 임무 명령서가 하달될 거야.”
“임무 명령서요?”
“그래.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야.”
비올라는 순간 긴장했다.
메데이아가 받는 임무는 그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극악의 임무다.
‘구, 굳이, 나랑?’
메데이아가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네 언니가 되어줄게. 벨라투로서의 모습을 증명할 수 있도록, 더 도와줄게.”
아니요.
언니. 뭔가 핀트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폭풍 요새로 갈 거야.”
무슨 임무인지 알 것 같았다.
폭풍 요새의 수장 재칼을 죽이는 임무다.
그 대단한 메데이아조차도 죽을 뻔했던 임무이기도 했다.
“설마 폭풍 검 재칼 경을 죽이는 임무인가요?”
아니길 빌었다.
그 임무가 아니기를.
너무 위험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하얀 벨라투답구나. 정확해.”
“………”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소가 보였다.
너무 싱그러워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햇수로 빙의 4년 차.
오랜만에 숨이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