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45화
“ “설마 폭풍 검 재칼 경을 죽이는 임무인가요?”
임무명 ‘폭풍의 눈’으로 요약되는 이 임무는 한아린이 꼽는 최악의 선택 탑 5 중 하나였다. 비올라도 최근 소식지 동향을 알고는 있었다.
재칼은 여러 차례 소식지에 칼럼을 실었다.
[겨울성에 몰아주는 특혜는 근절되어야 한다.
겨울성의 전사들을 존중하나, 이번 정책은 잘못되었다.
벨라투 공작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옹졸하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중앙 대륙의 중심모나크로부터 겨울성을 잇는 무역로드인 ‘골든 로드’를 대대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벨라투의 막내 공녀가 무려 수십억 달리아의 이득을 보았다.
따라서 재칼의 주장은 분명 일리 있었다.
[당시 벨라투의 막내 공녀는 불과일곱 살에 불과했다.
백성들은 평생 만져보기조차 힘든 2억 달리아로 그곳에 투기하였다.
이것은 차명을 이용한 불법적인 거래다.]
소식지의 내용은 수많은 사람에게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벨라투 공작가가 사리사욕을 탐하여 불법적이고 잘못된 방법으로 재산을 불렸다는 여론까지 형성되었다.
비올라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이랑 다르지만 비슷해.”
원작 속에서는 다른 이유로 재칼이 시비를 건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3년은 더 지나야 한다.
‘원작보다 빨라졌고, 내용도 달라졌어. 그런데 공작가를 물고 늘어지는 건 똑같아.’
디테일은 바뀌었지만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작가의 설정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맞아. 최근 대륙 동향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재칼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러면 아버지가 범인으로 지목될 텐데요?”
“그게 상관이 있어?”
메데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비올라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관없죠.”
아무렴 어때.
물증만 없으면 된다… 라는 것이 메데이아의 생각일 것이 분명했다.
‘언니가 자애롭고 따뜻한 편이기는 하지만…… 벨라투라는 걸 잊고 있었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다.
‘확실하게 물증이 없어야 한다.
비올라는 잠시 잊고 있던 이 세계의 본질과 속성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 잊지 말자. 여긴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 속이야.
비올라는 홀로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이 사건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 야’재칼에 대해 떠올려 봤다.
작품 속에서 재칼은 긍지 높은 폭풍 요새의 수장으로 표현된다.
겨울성이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북방의 방패라면, 폭풍 요새는 ‘야만의 협곡’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는 방어 요새였다.
「그는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대쪽 같은 성정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한 번은 제국의 높은 관리가 찾아와 뇌물을 주며 자신의 아들을 폭풍요새의 폭풍단에 입단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다.
「“불법적인 청탁과 뇌물은 받지 않습니다.”
“내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오?”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과 원칙을 따를 뿐입니다. 한 번만 더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면, 저와 폭풍 요새의 긍지를 짓밟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혀,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돌아가십시오.”
」
만약 제국의 대신, 셀리나가 아니었다면 재칼은 큰 불이익을 받게 되었을 것이라는 서술이 존재했다.
어쨌든 재칼은 결코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원칙을 어기는 행위를 극도로 경멸하며, 늘 스스로를 단련하고 정진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딱 한 번. 인생의 신념을 버릴 때가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소설과 큰 흐름이 같다면, 지금 재칼은 자신의 의지로 칼럼을 기고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세력이 개입했다.
현시점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독자였던 한아린은 잘 알고 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았다.
오늘은 하늘이 굉장히 높았고, 햇빛은 풍성함을 머금은 황금색이었다.
비올라가 별관을 찾았다.
“아저씨.”
“응? 왜?”
힉슨은 명상하던 중이었다.
눈을 뜨지 않고 명상에 계속 집중했다.
“재칼 경이랑 친분 있지?”
“있지.”
힉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왜? 재칼을 죽이라디?”
“나한테 그런 임무를 주시겠어?”
어쨌든 이 임무는 극비 임무다.
적어도 ‘재칼을 죽이는 임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조건 감추어야 했다.
상대가 힉슨이라도 말이다.
“상대는 재칼 경이라고, 폭풍 검재칼. 나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재칼 경을 죽여?”
힉슨은 가부좌를 튼 채로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3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힉슨은 한참이나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네.”
“내가 재칼 경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봤는데.”
“근데?”
“소식지에 칼럼을 기고해서 겨울성을 모함하거나 핍박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대륙 정세나 정치에도 크게 관심 없는 사람이잖아.”
“그거야 모를 일이지. 그놈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비올라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소식 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재칼이 기고한 칼럼과 더불어 재칼의 사진도 있었다.
“그냥, 나는 이 사진을 보니까 아저씨가 떠오르더라.”
“내가 훨씬 잘생겼거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무인(武人)은 나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저씨는 무인이 아닌가 봐. 자기 객관화가 너무 덜 됐어.”
“그렇게 진심으로 말할 일이야?”
힉슨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눈을 가렸다.
“슬프구나.”
장난을 치고는 있지만 힉슨은 실제로 슬펐다.
다른 사람의 어떤 말에도 상처 입지 않는 힉슨이지만, 비올라는 달랐다.
힉슨에게 있어 비올라는 마음으로 낳은 딸이었다.
딸에게 지적받는 못난 아빠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튼, 내가 만약 재칼 경이었다면 말이야. 이런 식으로 칼럼을 쓰지 않았을 것 같아.”
“그럼?”
“폭풍단을 이끌고 겨울성에 찾아와 정식으로 항의했을 것 같아. 그리고 공녀인 나와 함께 대질하여 진상을 파악하려고 노력했겠지.”
힉슨은 재칼을 떠올려 봤다.
‘음. 확실히 그놈이라면.
이런 방법은 재칼답지 않기는 했다.
잘못이 있는 당사자에게 직접 추궁하고 따지는 것이 재칼의 방법이었다.
“이건 흡사 항의가 아니라 여론 선동 같아서.”
“흠.”
“그리고 재칼 경도 아버지에 대해 잘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우리는 한때, 여러 번 함 .
께 등을 맡기고 싸웠던 동료였으니까. 서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재칼 경은 아버지가 겨우 20억달리아 때문에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할까?”
“겨우 20억이라니.”
힉슨은 쿡쿡대고 웃고 말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1억 달리 아조차 만져보지 못한다.
20억 달리아는 분명 굉장히 큰돈이다.
그러나 비올라의 말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벨라투답네.’
그녀는 벨라투였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공작의 딸이다.
20억 달리아에 벌벌 떠는 벨라투는 이상하다.
오히려 ‘겨우 20억밖에’라고 표현하는 쪽이 훨씬 벨라투스럽다.
“재칼 경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
“아니. 아닐 것 같은데.”
“이상하잖아.”
비올라가 검지로 소식지의 사진을 짚었다.
“이 사진 보면서, 아저씨가 떠올랐다고 했지?”
“응.”
“재칼 경에게도 어린 아들이 있다.
고 하지 않았어?”
힉슨의 표정이 굳어졌다.
***
메데이아는 꼼수를 쓰지 않았다.
아예 공식적으로 폭풍 요새를 방문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마법으로 전해진 공문은 하루 만에 승인되었고, 1공녀 메데이아를 필두로 한 방문단이 편성되었다.
비올라는 거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공식적으로 방문해서 살해하겠다.
는 벨라투나.’
무려 1공녀 메데이아가 온다.
폭풍 검 재칼도 벨라투의 속셈을 모를 리 없다.
‘그걸 다 알면서도 환영한다는 재칼이나.’
대놓고 찌르겠다는 검.
그리고 대놓고 막아보겠다는 방패.
둘의 싸움이 될 것이다. 원작에서는 그랬다.
‘막아야 해.”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재칼의 가문인 팔라일 가문과 척을 지게 된다.
팔라일 가문은 후에 급격하게 성장하는 가문이다.
주요 조연 중 한 명이자 미공자 혹은 소폭풍이라 불리던 제르미가 이끄는 팔라일 가문은 크게 성장하여 훗날 벨라투 공작가의 커다란 적이 되었다.
‘여주였던 비올라도 여러 번 죽을 뻔했지.’
심지어 1공녀인 메데이아도 죽을 뻔했다.
아무튼 매우 위험한 적이 된다.
그건 막아야 했다.
‘내 장밋빛 미래를 망치게 둘 수는 없어!’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제논이 방으로 들어왔다.
거울에 제논의 모습이 보였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공녀님의 수행은 제 몫인데요, 공녀님.”
“알아. 그렇지만 제논은 행동에 제 약이 있잖아. 제국에 수배 중인 몸이니까.”
비올라는 자신의 공식 수행원으로 집사인 제논과 더불어 툰드라를 지목했다.
제논은 그것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비올라가 몸을 돌려 제논과 눈을 마주쳤다.
제논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폭풍 요새는 겨울성과 달라. 훨씬 더 제국 중심부에 가까워.”
제논은 제국의 2급 기사 스무여 명을 몰살시킨 장본인이다.
제국의 수배를 받고 있는 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동행에는 가면술사이 자 변장술사 세이반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무리 세이반 경의 도움이 있다.
고 해도, 그게 만능은 아니잖아.”
“…….”
“네가 함부로 나서서 어떤 곤욕을 치르는 그건 나와 상관없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줄줄 내뱉었다.
3년 동안 많이 익숙해졌다.
“괜스레 일을 그르쳐서 내 얼굴에 먹칠하거나. 내 행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면 나는 그 죄를 물어 네 목을 벨 거야.”
“목이 잘리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공녀님.”
아. 물론 그러시겠지요.
예전에도 ‘제 목을 잘라 드릴까요?‘라고 말했던 제논이다.
그게 진심이어서 소름이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두려워.”
?예?”
제논의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누구보다 벨라투스러운 벨라투.
철혈 공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제 논의 눈에 담겼다.
“난 나의 유능한 집사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내 명령에 따라.”
제논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
가 이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었다.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공녀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음 날, 겨울성에서 마차 세 대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겨울성 남쪽.
야만의 협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폭풍 요새였다.
이동 관문을 통해 이동하고서도 한참을 달려야 했다.
마차 속에서 비올라는 창밖을 응시했다.
‘이 대륙이 넓기는 넓구나.’ 사실 얼마나 넓은지는 제대로 감이 오질 않았다.
막연하게 굉장히 넓다고만 느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메데이아를 필두로 한 벨라투의 사절단이 폭풍 요새에 도착했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험한 길을 지났다.
야만의 협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요새.
그 앞에 벨라투 공작가를 상징하는 황금 사자의 깃발이 나부꼈다.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들렸고, 거대한 철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메데이아 1공녀. 그리고 비올라 6공녀.”
철문 속에서 중무장한 누군가가 홀로 걸어 나왔다.
폭풍 요새의 수장.
폭풍 검 재칼이었다.
재칼의 손에는 기다란 검 하나가 들려 있었고, 푸른빛 예기가 서려있었다.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로웠다.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으며 아공간에서 거대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재칼 경.”
둘의 기세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주변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무슨 급전개란 말이냐!’
대뜸 칼부림이라도 할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기세에 스치기만 해도 몸이 조각 나겠어.’
이 세계의 절대자들이 만났다.
아주 작은 실수도 죽음으로 이어질 거다.
‘나는, 나대로, 잘해야 해.’
지난 3년간 잘해왔다.
오늘은 더 잘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