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46화 (46/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46화재칼에게 ‘폭풍 검’이라는 이명이 붙은 것은 그의 기세와 검기가 마치 폭풍처럼 강대하고 날카롭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소설 속에서 언급되었던

‘폭풍 같은 기세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메데이아와 재칼이 만들어내는 마나의 폭풍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죽이러 온 사신치고는 더없이 온화한 표정이군요.”

“저는 친선 사절단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친애하는 재칼 경.”

검을 뽑아 든 메데이아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둘 다 서로의 목적과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서로 모른 척했다.

“나는 폭풍 요새의 수장으로서, 벨라투의 공녀들을 환영합니다. 환영인사로서, 메데이아 1공녀와 검의 교류를 나누고 싶소.”

“얼마든지요.”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나섰다가 팔다리가 다 잘리는 거 아니겠지?’

실제로 그럴 것만 같았다.

무지막지한 괴생명체가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 해.’

무서워 죽겠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3년 동안 익힌 것이 이거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것.

‘저 둘의 기세 사이로 들어가면…… 진짜 죽을 거야.’

아무리 비올라가 천부적인 재능과 살성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열 살짜리 어린아이다.

작중 거의 절대자급으로 묘사되는 두 인물이 내뿜는 기세 사이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도, 믿는다. 작가의 설정값!’

비올라가 걸음을 옮겼다.

너무 무서웠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아씨. 모, 모르겠다.

아예 그냥 눈을 감고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눈으로 봐도 아무것도 안보인다.

차라리 눈을 감고 걷는 것이 마음편했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힉슨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비올라?’

비올라를 잡아야 하나.

위험한데.

그렇지만 나설 수는 없었다.

비올라가 출발 전에 신신당부했었다.

‘아저씨. 내가 도와달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그냥 묵묵히 날 기다려 줘.’

‘아저씨. 나 믿지?’

‘대신, 도와달라고 하면 날 지켜줘.

알겠지?’

비올라의 말대로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도와달라고 말을 할 때까지.

검을 뽑아 들고서 폭풍 요새의 환영 인사 의식을 치르는 메데이아도 비올라의 움직임을 느꼈다.

‘비올라! 뭐 하는 거야!’

지금은 기세 싸움 중이다.

양측이 내뿜는 무형의 마나가 서로의 공간과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다 투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메데이아와 재칼 사이의 공간은 죽음의 해협과도 같았다.

그곳을 향해 막내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기세를 느끼지 못할 리 없잖아!’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모했다.

열 살짜리가 버틸 수 있는 검압(劍壓)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기세를 거두어들일 수도 없었다.

기세가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승패가 갈릴 것이다.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에 재칼의 검이 자신의 목에 닿게 될 것이다.

벨라투의 1공녀로서 그런 패배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세를 거두지 않으면 비올라가 다친다.

비올라의 살갗에 가벼운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으, 으 뜨, 뜨, 따가워!’

마치 환영 만찬회 때 독이 살갗에 닿은 것만 같았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면도날이 연한 피부를 문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데이아는 갈등했다.

기세를 거둬야 해.’

폭풍 검이 먼저 기세를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쉬운 쪽은 자신이다.

비올라의 연한 살결에 새겨지는 붉은 상처들을 보니 가슴이 아파왔다.

‘아니.

그러나 비올라는 지금 비올라의 길을 가고 있다.

비올라가 무엇을 생각하고 꿈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비올라는 벨라투다.

벨라투가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고 걸어가고 있다.

‘오히려 나는, 비올라 벨라투를 존중해야 해.’

그때 재칼이 먼저 기세를 거두었다.

팽팽하게 자웅을 겨루던 마나의 전투에서 재칼이 패배했다.

“큭.”

역폭풍이 불어 재칼의 가슴을 강타했다.

빈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때 달려들어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왜, 검을 휘두르지 않았소?”

“폭풍 검께서 먼저 배려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제 동생을 위하여 먼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저의 패배군요.”

비올라는 침을 세 번이나 삼켰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칼춤을 추는 망나니들 사이를 비집고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목이 댕강! 잘릴 것 같은 그 생생한 기분.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덜덜 떨리는 속마음을 감추고 비올라는 허리를 숙였다.

기세를 거두어주셔서 감사해요, 재칼 경.”

재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서 비올라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모한 짓을 하였군요, 비올라 공녀.”

“그 무모한 짓을 어여삐 봐주셨지요.”

“내가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면 공녀는 크게 다쳤을 것입니다.”

비올라가 허리를 세웠다.

꼿꼿하게 자세를 세우고서 재칼을 바라보았다.

“저는 재칼 경이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었어요.”

“……”

순간 재칼의 몸이 움찔했다.

“재칼 경에게는 제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 알고 있어요.”

재칼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기사로 표현된다.

그의 냉철한 이성도 아이들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저를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무모하군요.”

재칼은 검을 갈무리했다.

메데이아와 검을 섞기에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비올라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하얀 벨라투, 비올라입니다.”

***

비올라 일행은 폭풍 요새의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겨울성의 별관만큼 크고 쾌적하지는 않았지만 당분간 지내기에는 충분히 훌륭했다.

메데이아가 말했다.

“재칼 경의 말이 맞아. 무모했어.”

“무모하지 않았어요. 저는 하얀 벨라투로서, 모든 것을 고려하여 행동했어요.”

“어떤 것들을 고려했니?”

비올라는 직감했다.

이 질문은 곧 막내에 대한 시험이었다.

‘대답 잘해야 해.’

제대로 못 하면 메데이아는 분명 크게 실망할 것이다.

“첫째로, 재칼 경이 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둘째로, 혹여 재칼 경이 그렇지 않더라도, 언니가 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저를 보호할 생각이었거든요.”

“왜 그렇게 확신했지?”

“적어도 환영 인사의 승패보다는, 언니가 저를 더 아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제가 언니였다면 그랬을 거니까요.”

비올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로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의 ‘진안과 비올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부딪쳤다.

오히려 메데이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아이. 진심이잖아.’

자신이 언니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저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묘하게 감동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 행동이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고, 하얀 벨라 투로서의 전략적인 접근이었다?”

“맞아요.”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가 뭔데?”

“재칼 경을 죽이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요.”

메데이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재칼 경을 죽이는 것이 나의 임무야.”

번외 임무서를 하달받았어요.”

이곳에 오기 전.

비올라가 직접 헤론 벨라투에게 서 명을 받았다.

혹여, 재칼이 공개적인 사과와 더불어 겨울성과 벨라투를 지지하겠다.

는 성명을 발표한다면, 재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재칼 경을 죽이는 것보다, 이쪽이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

“야만의 협곡을 든든히 지켜주는 훌륭한 기사이자 무인이잖아요. 만약 재칼 경이 없으면 모나크는 분명 겨울성에 협조를 요청할 거예요. 무역 로드의 활성화를 핑계 삼아서.

그리고 재칼 경을 살해한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해 주는 조건으로 말이에요. 그럼 겨울성의 전력은 필시약화되겠죠.”

비올라가 메데이아의 손을 잡았다.

“언니. 언니의 임무를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것도 진심이었다.

괜히 방해했다가는 목이 잘려 나갈수도 있다.

비올라는 가늘고 길게 오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암살을 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좋은 타이밍을 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은 근 시일 내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재칼 역시 암살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까.

“제가 먼저 재칼 경을 만나볼게요.”

***

툰드라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주인님의 시중은 제가 들겠습니다. 저는 옆을 지키는 반려견이니까요.”

“공녀님의 시중은 제가 들죠. 저는 공녀님의 직속 집사이니까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툰드라와 제논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 활활 타올랐다.

비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 그냥 내가 덮으면 돼.”

이딴 게 뭐라고.

저 둘은 왜 여기서 싸우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10분 동안.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공녀님은 새벽 3시 23분경이 되면 늘 이불을 발로 차는 습관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늘 공녀님의 시중을 들어왔고, 공녀님의 배앓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 공녀님을 보필하는 영광을 하사하여 주시면 좋겠어요.”

툰드라가 대놓고 적의를 내뿜었다.

“당신은 어째서 당신이 가진 특권을 양보하려 하지 않지?”

“특권을 내려놓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평소에 누리는 특권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특권층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나?”

“저는 그런 의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툰드라.”

비올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둘 다, 나가!”

제논과 툰드라는 비올라의 방에서 쫓겨났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동이 틀 무렵.

비올라는 힉슨과 함께 폭풍 요새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합! 합!

멀리서부터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폭풍 요새의 기사들이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올라는 연무장 한편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저들의 수련이 끝날 때까지.

수련을 진두지휘하던 재칼이 드디어 검을 내려놓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비올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비올라 공녀는 일찍 일어나는군요.”

“폭풍단의 위용이 대단하다 하여 한 번쯤 보고 싶었어요.”

비올라와 인사를 마친 재칼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군요, 힉슨 경.”

“피차 그렇게 반가운 얼굴은 아니잖아.”

퉁명스레 말한 힉슨이 재칼과 손을 맞잡았다.

인사 방식은 투박했으나 서로를 향한 약간의 호감은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새벽 4시부터 수련을 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힉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처럼 바른 생활을 하는 인간이 제일 싫어. 어떻게 인간이 그래? 기계냐?”

“폐인이 되었다 들었는데, 멀쩡하시군요?”

“어. 쟤 덕분에.”

재칼의 시선이 비올라에게 닿았다.

비올라가 왜 이곳을 찾아왔을까.

어제는 왜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들었을까?

그리고 비올라 덕분에 멀쩡해졌다.

는 건 무슨 말일까?

“폭풍단을 견학하고 싶다는 것이 진짜 이유는 아니겠지요. 왜 나를 찾아왔습니까? 그리고 힉슨 경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비올라가 벤치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자 재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비올라와 시선을 맞춰주었다.

“재칼 경은 힉슨 아저씨의 비화는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재칼 경은 안 슬퍼요?”

“무엇이 말입니까?”

소설 속에서 ‘극비’로 다루어지던 내용을 스스럼없이 말해 버렸다.

“아들이 사라졌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만.”

“어딘지 모르게, 힉슨 아저씨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어서요. 대륙 내에 그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어요.”

힘을 가진 주조연들.

사랑하는 가족의 납치.

남지 않은 증거.

“제가 재칼 경을 돕고 싶어요. 하얀 벨라투로서.”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다.

“우리 아저씨 같은, 슬픈 사람이 더 나와서는 안 되니까요.”

‘우리 아저씨’라는 말에 힉슨의 가슴이 울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