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47화
“우리 아저씨 같은, 슬픈 사람이 더 나와서는 안 되니까요.”
힉슨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조금 과장하자면 하얀 콧김이 뿜어지는 것 같았다.
“들었냐?”
“무엇을 말이오?”
“우리 아저씨라고 했잖아.”
“그것이 중한 문제입니까?”
“그렇지.”
힉슨이 흐흐-웃음을 터뜨렸다.
기뻐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재칼은 힉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아저씨’가 뭐가 그리 중하단 말인가.
“아무튼. 내가 설명해 주지.”
힉슨이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힉슨도 딸을 잃었었다.
“그 상황이 너랑 내가 아주아주 비슷해.”
둘 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둘 다 강한 힘을 자랑하는 무인이었다.
“아주 교묘하게 계산된, 정확한 타이밍에 납치가 이루어졌어. 나는 그 흔적을 찾지 못했고,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가 폐인이 되고 말았지.”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무슨 짓들을 벌였는지 알아?”
“온갖 가문을 들쑤시고 패악질을 일삼았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성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다가 헤론 공작님에게 제압되어 별관으로 유배당하셨지요.”
“유배는 무슨. 내가 져준 거지.”
힉슨은 비올라의 눈치를 살폈다.
무려 ‘우리 아저씨’가 볼썽사납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힉슨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넌? 겨울성을 공격했지?”
“그렇습니다.”
“일단 협박당해서 그렇다 치자.”
힉슨도 그랬다.
이성을 잃고 행동했다.
비올라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왜 나 같은 어린애도 알아낼 수 있는 걸, 아저씨는 몰랐을까?
이게 다 우연이겠어?’
힉슨이 말을 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딘가 홀려 있었거든.”
“무엇에 말입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러나 마법의 일종인 건 확실해.”
비올라가 나섰다.
“3년 동안 추적한 결과예요. 저는 힉슨 아저씨의 원수를 함께 갚기 위해서, 그리고 하얀 벨라투로서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 이에요. 그래서 재칼 경을 돕고 싶어요.”
이 말은 재칼에게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돕는다는 게 더 수상하다.
“하얀 벨라투로서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움직인다라. 지극히 벨라 투스러운 발상이군요.”
“저는 벨라투니까요.”
“마법의 일종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파고드는 비겁하고 치졸한 마법이요. 제아무리 강력한 무인이어도 당하면 속수무책인 정신 계통 최면 혹은 암시 마법.”
힉슨도 그랬고 재칼도 그랬다.
그들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행동했다.
힉슨이 만약 정상 상태였다면 술에 찌든 폐인이 되지도 않았을 거고, 재칼이 만약 정상 상태였다면 겨울 성을 향한 저격 칼럼을 게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 다 자신답지 못한 방법이었다.
“사랑의 마음을 공포로 뒤바꾸어 이성을 마비시켰을 거라고 봐요. 아들을 영영 잃게 될까 봐 두려웠을 거예요. 그래서 재칼 경은 협박에 넘어가 겨울성을 적으로 돌리기로 결심했고요. 아들이 중요하니까.”
“저는 협박을 당했다는 말도, 아들을 잃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
재칼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올라가 가볍게 웃었다.
“열두 살이 되면 사교계에 발을 들일 수 있어요. 저는 사교계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될 거고요.”
이 역시 지극히 벨라투스러운 말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겠다니.
“그러기 위하여 저는 제 경쟁자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공부 했어요. 그건 폭풍 검의 후계자인 제르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죠.”
“…….”
“그래서 저는 제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르미의 동향을 살폈어요.”
“이곳은 보안이 철저한 요새입니다. 폭풍 요새 내에서,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납치도 가능한 곳인데 관찰이 불가능했을까요?”
재칼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비올라의 말에는 한 치의 빈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 살짜리 꼬맹이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노련한 능구렁이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재칼은 제르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 주었다.
따라서 크게 보호하지도 않았다.
스스로의 몸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 재칼의 지론이었으니까.
“게다가 전 테라 상단과 아주 각별한 사이거든요. 테라 상단이 이곳에 자주 들르지요?”
“맞습니다.”
재칼은 결국 비올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정황이 확실했다.
“비올라 양의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깨끗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군요.”
“너도 느꼈냐?”
힉슨이 킥킥대고 웃었다.
“머릿속에서 안개가 걷히는 느낌.
나는 그랬는데. 너는 어땠냐?”
“저도 그렇습니다, 힉슨 경.”
비올라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껍질만 깨주면 된다.
저들은 이미 경지에 이른 무인이고, 껍질만 깨주면 알아서 잘할 거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이제야 알것 같군요. 어딘가 고장 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세요. 제르미공자가 그토록 쉽게 납치당할 사람인지. 아들의 성격에 대해 고심해 보세요.”
“고맙습니다.”
“그럼 폭풍 검께서는 폭풍 검의 일을 하셔야지요?”
“그러지요.”
재칼은 집사를 불러 메데이아 공녀를 데려오라 일렀다.
메데이아가 도착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비올라? 힉슨 경?”
무슨 말이 오간 건지 알 수 없으나 결과가 놀라웠다.
“……그리하여 저는 겨울성의 군주인 헤론 공작님에게 친필 사과문을 작성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과는 조금만 뒤로 미루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시간만 조금 허락하여 주십시오.”
메데이아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비올라가 무슨 수를 쓴 것 같기는한데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겉으로는 잡아뗐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지를 준다면 아버님께 전달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메데이아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아버님께 보고를 올려야겠어.’
사과문이라니.
변수가 생겨 버렸다.
다시 임무를 하달받아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제가 무엇인가에 홀려 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군요.”
그 말에 비올라가 대답했다.
“그건 재칼 경이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예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까?”
“멋있어요.”
지금 이 순간, 한아린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았었다.
부모님을 증오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워했다.
‘조금은 부럽네.
재칼을 현혹시킨 흑마법은 ‘자식을 정말로 사랑하는 부모에게만 통하는 마법이다.
폭풍 검 재칼은 아들 제르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힉슨이 비올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흠흠, 가자.”
괜스레 화가 났다.
비올라의 눈에 서린 감정을 대충은 읽어냈다.
‘저토록 마음이 따뜻한 아이인데!
벨라투의 그 혹독한 후계자 경쟁을 시킨다니.’
아무튼 헤론 놈은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는 놈이다.
그까짓 놈보다 자신이 훨씬 더 괜찮은 어른이 되어주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재칼이 한쪽 무릎을 꿇어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비올라 양.”
“뭘요.”
“그대의 열두 살을 기대하겠습니다.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어 있기를.”
*****
헤론 공작은 재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재칼을 죽이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았다.
다른 방식으로 임무를 완수했구나.”
“재칼 경을 죽이지 않아도 될까요?”
“그래.”
메데이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헤론이 그걸 눈치챘다.
“왜 그러지?”
“훌륭한 무인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적수를 잃는 건 슬픈일이니까요.”
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벨라투스러운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좋은 아버지인 것 같더군요.”
“그렇군.”
헤론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메데이아를 내보낸 뒤 재칼의 서신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저는 아들을 반드시 구출해 낼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허락하여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헤론은 재칼을 비웃었다.
겨우 아들 때문에.
약점이 잡혀서 겨울성을 저격했다니.
재칼이 이토록 비합리적이고 멍청한 자였던가.
‘그리고……… 그는 좋은 아버지인 것 같더군요.
[비올라 양이 제르미에게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2년 후, 사교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이기 전, 제르미를 소개해 주고 싶은데 공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둘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간.
헤론은 저도 모르게 서신을 구겼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헤론의 허락 없이도 헤론의 집무실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칼튼이었다.
“공작님……?”
칼튼의 눈에 구겨진 종이가 들어왔다.
‘뭐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들었는데.
저것은 재칼이 보낸 사과문 겸 편지일 텐데.
왜 저것을 구기셨지.
‘뭔가…… 일이 잘못됐나?’
그러나 일이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공작은 재칼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한 달 뒤 재칼은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제가 제기했던 모든 것은 순전히 저의 망상이었으며 실수였습니다.
겨울성의 선견지명에 대한 부러움에 불찰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에 헤론 공작님과 벨라투 가문.
겨울성의 모든 백성에게 고개 숙여 깊이 사과합니다.]
자신을 한껏 낮춘, 진정성 있는 사과였다.
덕분에 재칼은 큰 비웃음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야만의 협곡’에 강력한 마물들이 생성되었고 폭풍 검 재칼과, 무사히 폭풍 요새로 귀환한 제르미가 마물토벌에 성공했다.
폭풍 검 재칼과 그의 아들 미공자 제르미의 명성이 더없이 높아졌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
비올라는 어느덧 열두 살이 되었다.
열두 살의 어느 봄날.
새 한 마리가 다리에 쪽지를 매달고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비올라가 창문으로 다가갔다.
깃털이 매끄러운 노란 새였다.
“새?”
다리에 매달린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를 열어 보니.
[곧 찾아뵙겠습니다.]
라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누구지?’
혹시 암살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겨울성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 작자는 없을 것 같고.
제논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폭풍 요새의 인장이 찍혀 있네요.”
“폭풍 요새?”
그러고 보니 회오리 모양의 인장이 보였다.
“폭풍 요새의 누군가가 내게 쪽지를 보냈다는 거야?”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왜?”
“그야.”
제논이 싱긋 웃었다.
어쩐지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공녀님이 이제 열두 살이 되셨으니까요.”
열두 살은 사교계에 입문할 수 있는 나이다.
공식적으로 귀족 영애로 인정받는 나이가 바로 열두 살.
혼담이 오갈 수 있는 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된 공녀님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으니까요.”
“그래?”
확실히 많이 성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한아린이 보기에는 아직 어린애였다.
지구의 기준과 이곳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 다시금 실감되었다.
“그리하여, 폭풍 요새의 공자께서 수작을 부리시는 것이 아닌가 감히 염려해 봅니다.”
이런 개수작이 있나.
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착각…… 이겠지?’
제논의 싱그러운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환청이었던 것 같다.
며칠 뒤.
폭풍 요새의 공식 사절단이 도착한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그것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그 소문 들었어?”
“제르미 공자님도 오신대!”
“진짜?”
제르미.
그 이름은 뭇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소폭풍 제르미 공자, 그분 말하는 거지?”
“누가 그분을 그렇게 부르니? 쌈박질 좋아하는 야만인들이나 그렇게 부르지.”
소폭풍 제르미.
그에게는 다른 이명이 있었다.
“미공자께서 겨울성에 오신대!”
겨울성 내에 소소한 폭풍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