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48화미공자 제르미.
최근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입문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아름다움은 뭇 영애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소문으로는 아름다운 용의 화신이라더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미인이라더라, 그 청초하다는 레빌리아 꽃조차도 제르미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더라.
제르미 주변에는 늘 많은 소문이 따라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문이 쓸데없이 부풀려진 것이라고 시샘하기도 했다.
‘그렇게 미인이라면 어째서 폭풍요새에서 두문불출하겠어?’
‘본인의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지.’
그도 그럴 것이, 귀족가의 자제라면 열두 살이 되는 해에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
보통은 5월에 열리는 귀족 연회인
‘물망초 연회에서 그 존재를 뽐내곤 했다.
그러나 제르미는 단 한 번도 사교장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겨울성 내.
전 대륙에 명물로 알려진 에그타르트 맛집 아줄레지아.
그곳에 한 소년이 줄을 섰다.
복장은 꾀죄죄했고 허리춤에는 녹슨 검을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행색이 남루했고 잘생긴 미소년도 아니었지만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비올라 공녀가 이곳의 에그타르트를 사랑한다지.
그는 공식 사절단 일행에서 빠져나와 아줄레지아로 왔다.
‘어차피 자유 시간이니까 괜찮겠지.’
공식 일정의 시간은 지킨다.
그 외의 시간은 자유다.
겨울성 내에서 소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될 것이다.
‘비올라 공녀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어.’
비올라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
철혈의 벨라투.
뛰어난 혜안으로 어린 나이에 큰 부자가 된 영애.
그 유명한 힉슨 경과 각별한 사이이며, 1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1공녀 메데이아와 본격적인 후계전쟁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입양 공녀.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만한 실력 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면을 썼으니 괜찮겠지.’
이 가면은 겨울성의 제작 공방에서 나온 가면으로, 거의 마법에 준하는 퀄리티를 자랑하는 가면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겨울성의 변장술사 세이반 마르코스의 사업체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건 확인되지 않았다.
제르미가 앞사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그런데요.”
“오, 견습 기사 지망생인가?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비올라 벨라투 공녀님에 대해 아세요?”
처음부터 말이 많았던 남자는 자랑스레 수많은 정보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됐다네. 그뿐인 줄 아나? 환영 만찬회에서 철혈 공녀라는 이명을 얻으신 분이지. 메이플 마을에서 기승을 부리던 멧돼지 무리를 모조리 썰어버렸다는 소문도 있어.”
실상은 조금 다르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소문은 그렇게 났다.
제르미가 눈을 크게 떴다.
“멧돼지요?”
“그래. 그냥 멧돼지가 아니야. 마나를 먹고 자란 마물 멧돼지였대.”
“제국의 기사님들도 마물 멧돼지를 혼자서 죽이는 건 어렵다고 들었어요.”
제르미도 마물 멧돼지를 경험해 봤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놈은 ‘샤벨’이라는 특수한 종의 멧돼지였다.
놈은 최소 7급 기사는 되어야만 사냥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분은 겨우 열 살에 모조리 도륙해 버렸지.”
“대단한 분이시군요!”
제르미는 샤벨 멧돼지를 떠올렸지만, 실상은 그냥 멧돼지였다.
“뿐인 줄 아나? 우리 겨울성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있네.”
“뭔가요?”
“비올라 공녀께선 멧돼지 무리를 모조리 토벌하고 그 피를 받아 축배를 드셨다지.”
물론 그런 적 없었다.
“피를 마신 그분을 본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군.”
꿀꺽.
제르미는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철혈의 악귀. 살성의 화신.”
“그, 그렇군요.”
비올라에 대한 소문은 대체로 그러했다.
‘궁금하네.’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소문이 날수 있는 걸까.
열 살에 샤벨종 멧돼지라니..
그 유명한 메데이아와 비교가 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와. 사람 정말 많다.
제르미는 30분 넘게 줄을 섰다.
에그타르트의 달짝지근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날아왔다.
그의 코가 벌렁거렸다.
‘맛있겠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겨울성까지 찾아와 에그타르트를 먹는지 알 것 같은 냄새였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 그는 아줄레지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엥?’
아줄레지아 안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
그리고 폐를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
숨이 멎을 듯한 살기를 내포한 보라색 눈동자.
앙!
덥석!
그와는 별개로 에그타르트를 사랑하는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비올라 벨라투!’
비올라 벨라투가 이곳에 있었다.
***
우습게도, 비올라에 대해 잘 안다고 떠들던 남자는 비올라를 알아보지 못했다.
제르미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초상화와 너무 다른데.’
비올라의 얼굴을 담은 마법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시중에 돌아다니는 건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 비올라는 마치 마녀같이 불길하고 음침한 얼굴이었다.
만약 비올라 신체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날카로운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면, 비올라라는 사실을 모를 뻔했다.
‘초상화보다 훨씬 더 연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고.
흉폭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눈망울 자체는 초롱초롱했다.
제르미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흐음.’
이곳에서 비올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줄레지아의 주인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줄레지아의 주인은 계속해서 비올라를 신경 쓰며 눈치를 보고 있었으니까.
“에그타르트 세 개요.”
“우리는 한 사람에게 두 개밖에 팔지 않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두 개 주세요. 그런데요. 저 분, 혹시 지체가 높은 분인가요?”
사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괜스레 비올라의 이름을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응을 보니 확실하네.”
재미있는 건 겨울성 내에서 그토록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비올라조차도 네 개의 에그타르트만 구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툰드라의 몫으로 산 것이었다.
“툰드라. 이거 내가 먹는다?”
“예. 저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르미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 저 소년이 툰드라구나.’
나이는 17세.
자신과 동갑이라고 했다.
힉슨 경의 유일한 제자라고 했던가.
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검술을 익혀 겨울성의 잠룡(潛龍)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반려검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하지.”
어째서 반려검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비올라 공녀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진심을 다해 비올라를 보필하기 때문에 반려검이라는 이명이 붙었다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실상은 반려견이 와전된 거지만.
“에그타르트 두 개. 나왔습니다.”
제르미는 쟁반에 에그타르트 두 개를 받아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
비올라 벨라투.
그리고 툰드라를 향해서.
***
비올라는 고민했다.
에그타르트가 겨우 한 개 남았다.
이걸 집에 가져가서 먹을까, 아니면 여기서 먹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 먹어야 더 따뜻하고 달콤해.’
그렇지만,
‘이게 끝이잖아. 좀 아껴 먹는 게 좋지 않을까? 마침 배도 부르고.’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앙!
덥석!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에그타르트는 참기에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발견했다.
‘엥?’
푸석푸석한 은발.
얼굴에 가득한 주근깨.
평범해 보이는 얼굴.
꾀죄죄한 복장과 녹슨 검.
「제르미는 늘 변장을 하고 다녔다.」
소설 속 묘사와 일치하는 소년이 이곳에 있었다.
마침, 제르미의 사절단이 겨울성에 도착했다는 소식도 알고 있었다.
‘설마 진짜 제르미?’
검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에 푸른색 매듭을 매고 다녔다.
푸른색 매듭은 폭풍 검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했으며, 그의 동생이 손수 묶어준 것이기도 하였다.」
푸른색 실로 만든 매듭이 보였다.
‘제르미다!’
여기에 제르미 팔라일이 나타났다.
마음이 급격히 불편해졌다.
원작에서는 폭풍 요새와 팔라일 가문은 겨울성의 적이 된다.
제르미는 팔라일 가문을 이끄는 어린 가주였으며 메데이아와 그 유명한 ‘정상 전투’를 치르게 될 인물이기도 했다.
정상 전투는 세르크 산맥의 정상인 매화봉에서 7일 동안 펼쳐졌으며 둘다 큰 부상을 입게 된다.
‘메데이아 언니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비올라가 기습하게 되고…… 치명상을 입히지.’
가족을 사랑했던 메데이아는 비올라의 술수에 휘말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된다.
아무튼 중요한 건.
‘훗날 메데이아 언니와도 비견될 정도의 무인이 되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원작 속에서는 벨라투를 원수로 생각하는 가문이고.’
물론 원작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작가의 설정값은 잘 안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디테일은 바뀌어도 흐름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상태다.
‘굳이 가까이 둬서 좋을 게 없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
일단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의 변장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건 소설 덕분이었으니까.
‘소설 봐서 네 변장 알아봤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근데 왜 여기로 와?”
툰드라의 눈빛이 은발의 소년을 향했다.
“…누구?”
“자리가 별로 없어서요. 여기 4인 석 같은데 합석해도 될까요?”
툰드라가 짧게 대답했다.
“안 돼.”
“왜요?”
“너는 낯선 사람이니까.”
개는 주인을 위하여 경계를 서야 한다.
툰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신 제가 에그타르트 하나 드릴 게요.”
“그래도 안…….”
비올라가 말을 잘랐다.
“앉아.”
비올라는 누군가 훔쳐 가기라도 할 것처럼, 쟁반 위의 에그타르트를 재빨리 가져왔다.
제르미는 가볍게 미소 짓고 비올라 앞에 앉았다.
“견습 기사 지망생?”
“네. 열심히 노력 중이에요.”
툰드라가 대놓고 비웃었다.
“네가 견습 기사 지망생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기세를 감춘 주제에.”
탁자 밑으로 단도를 가져다 댔다.
단도가 제르미의 무릎에 닿았다.
“무슨 꿍꿍이냐?”
제르미가 헤헤 웃었다.
과연 겨울성의 잠룡이라더니.
자신의 기세를 읽어낸 것 같았다.
“꿍꿍이는 없어요. 그냥…….”
에그타르트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 손님이니까.”
“손님이요?”
“그래. 칼 내려도 돼. 겨울성 내에서 폭력을 행사할 셈이야?”
툰드라는 잠자코 단도를 갈무리했다.
어쩐지.
이 은발의 소년이 신경 쓰였다.
“뭐야, 영애도 제 정체를 알아차리 신 건가요?”
“폭풍 검을 상징하는 푸른 매듭을 달고 다니면서, 모른 척해주길 바랐나요?”
소폭풍 제르미와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다.
이 정도 되는 위험 인물은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가장 안전하다.
‘차라리 정체를 다 까발리고 시작하는 게 변수가 없을 거야.”
그래서 알은체했다.
변수 없이 통제된 환경에서 간단한 담소만 나누고 헤어지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자.
앙!
덥석!
얼른 에그타르트를 먹었다.
“저는 다 먹었어요. 공자는 공자의 진실 된 모습으로 다가오세요. 저는 이만.”
변장한 가짜 모습과는 대화하고 싶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에그타르트를 얻었으니, 이제 볼일은 없었다.
비올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툰드라가 그 뒤를 따랐다.
툰드라는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여러 번 제르미를 쳐다보았다.
‘뭔가 불길하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저 소년은 불길했다.
제르미는 빙그레 웃고서 하나 남은 에그타르트를 입속에 넣었다.
저도 모르게 볼에 손을 댔다.
‘마,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에그타르트는 처음 먹어본다.
비올라가 그토록 행복한 표정을 짓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올라 공녀.’
소문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저 차분한 모습 뒤에 잔악무도한 모습이 숨겨져 있다라.
소문만 들었을 때는 희대의 철혈공녀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마녀를 떠올리고 있었나?’
그래서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친해지고 싶다.
앙!
덥석!
그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제르미가 헤헤 웃었다.
코를 슥-문질렀다.
소문이랑 많이 달랐다.
‘철혈 공녀가 저렇게 귀엽단 말이야?’
자신의 검집에 매달린 푸른 매듭을 쳐다보았다.
늦둥이 여동생인 제시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매어준 매듭이었다.
‘이거, 좀, 위험한데.
귀여우면.
‘잘해주고 싶잖아.’
그때, 갑자기 소동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자작가의 자제인 나를 이토록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두 개 밖에 팔지 않는다고? 나를 기만하려는 것이냐! 평민 놈이 알량하고 얄팍한 재주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내가 친히 네놈의 목을 쳐버리겠다!”
그런데 평민인 아줄레지아 사장의 대답이 묘했다.
“이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공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