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54화세알 자작의 방에 들어갔을 때, 비올라의 머리가 멍해졌다.
피 냄새.
저만치 멀리. 하얀 이불보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건 툰드라가 흘린 피가 분명했다.
머릿속에서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한아린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와 용솟음쳤다.
‘정신 차리세요!
‘응급! 응급입니다!’
‘비켜주세요!”
강한준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강한준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한 아린은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그곳에서 봤다.
피투성이의 강한준을.
강한준은 눈을 뜨지 못했었다.
그때의 그 장면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뇌리에 너무나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외면하고 또 외면해 봐도, 악몽처럼 떠올라 한아린을 괴롭혔었다.
당시 강한준은 의식을 잃은 채, 어딘가 괴로운 듯 이상한 신음성만 냈었다.
지금도 신음성이 들려왔다.
“으음….”
툭!
비올라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너냐?”
무릎을 꿇고 있는 세알 자작에게 걸어갔다.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힉슨이 비올라를 잡으려 했지만 제논이 막아섰다.
제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공녀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힉슨의 눈이 비올라를 향했다.
일반인들은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의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것은 분명 살성을 타고난 살인귀의 기운이었다.
세알 자작이 작게 신음을 토했다.
“윽.”
세알 자작의 오른쪽 귀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올라의 손속은 빠르고 잔인했다.
“네가, 감히, 내 소유의 개를 이렇게 만들었니?”
세알 자작은 잠깐 떨린 것을 제외하면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면?”
“공녀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것이 들어맞았고, 반려검은 적들을 상대하다 크게 다쳤습니다.”
그리고 비올라는 정신을 차렸다.
피투성이가 된 툰드라를 보고서 이 성을 잃었었다.
‘아냐. 이거 아니야.’
의식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작중 비올라의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고 뒤에 숨었다.
비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피가 줄줄 흐르는 자작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툰드라를 저렇게 만든 사람은 나야’대부분의 상황을 모두 예측했고 그대로 흘러갔다.
다만 툰드라가 저렇게까지 심하게 다칠 줄은 몰랐다.
명령을 내린 사람도 비올라 자신이었고, 툰드라를 다치게 한 사람도 자신이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툰드라는 남주니까.
어지간한 난관이나 어려움 따위는 아주 쉽게 극복할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지만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자작 앞에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게 되고, 그러면 귀를 그렇게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미안해요.”
다행히 잘린 것도 턱턱 붙이는 접합 마법이 굉장히 잘 발달된 세계라서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급한 불은 끄기로 했다.
“내 개가 회복하지 못하면 세알 자작가는 오늘로 멸족될 겁니다, 자작님.”
***
비올라 일행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이동했다.
약간의 다과와 차를 대접받았지만 비올라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저는 공작님께 보낼 보고서 초안을 일부 작성하겠습니다, 공녀님.”
“그래.”
제논이 품속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무엇인가를 적다가 비올라에게 물었다.
“어째서 자작의 귀를 자르셨는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제논은 속으로 기대했다.
비올라 벨라투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자신이 생각한 그림과 맞는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질문은 왜 하는 거야?”
“공녀님께서는 툰드라가 저 정도 다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을 거고.”
아니.
몰랐어.
남주라는 설정에만 너무 집중해서, 툰드라가 이렇게까지 다칠 줄은 몰랐어.
“자작가를 구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진행하셨습니다. 툰드라를 다치게 한 것이 자작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계셨을 테고요. 그런데 굳이 자작의 귀를 그렇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비올라는 잠시 침묵했다.
저 말이 맞았다.
특사로 파견되어 와서, 자작의 귀를 잘라 버린 행동은 경솔했다.
하얀 벨라투인 비올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날 수고롭게 만든 것에 대한 경고.”
제논의 펜이 바빠졌다.
무엇인가를 슥슥-써 내려갔다.
“경고였군요!”
제논은 조금 기뻤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맞았다.
비올라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한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럼 공녀님께서는 저들에게 일단 생명의 은혜를 빚지게 해놓고서, 벨라투로서의 질서까지도 확립하신 거군요.”
벨라투로서의 위신을 잃지는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자작을 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부러 생명을 구해주었다.
일단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귀가 잘리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명분이 선다.
힉슨이 코웃음 쳤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아닌가요?”
“비올라는 화가 난 거야. 툰드라가다친 것에 대해서.”
“공녀님은 상황을 가장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일 효율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풀어가고 계십니다.”
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힉슨이 본 비올라는 조금 달랐다.
툰드라를 보자마자 비올라는 약간 이성을 잃었었다.
‘마음에 드네, 꼬맹이.”
살과 피가 철로 이루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이 상당히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제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힉슨 경은 현명하지 못하군요. 공녀님은 철저한 계산 속에서 실리를 모두 취하신 것입니다.”
“그래. 그런 걸로 하자. 뭐가 어찌 됐든 세알 자작 녀석은 한 방 먹었겠어. 지금쯤 엄청 고민하고 있을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힉슨이 보기에 비올라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눈동자에는 뿌리 깊은 불안이 담겨 있었다.
비올라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
‘비올라의 눈에 담긴 불안을……
제논은 못 읽는구먼! 으하하핫!’
자신만 그것을 읽어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 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과 비올라가 더 가까운 사이이거나.
‘내가 비올라를 훨씬 더 잘 아는구만! 내가! 내가 더 비올라와 가깝도다!’
비올라는 지금 하얀 벨라투로서의 가면을 쓰고 행동하고 있다.
냉철한 척.
모든 상황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는척.
그렇지만 지금은 정신이 온통 툰드라 쪽으로 향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와주기로 했다.
‘내가 네 어른이 되어준다고 했었지?’
제논이 더 원하는 방식.
제논이 보고하기를 바라는 방식의 대화를 이끌어내 비올라를 도와주기로 했다.
“세알 자작 입장에서는 어떤 느낌 이겠어? 목숨을 구해주고 갑자기 귀를 잘라 버리다니. 누가 봐도 자작이 툰드라를 했을 리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그렇습니다.”
“세알은 꽤 똑똑한 놈이야. 신념있고 머리가 좋아서 짜증 나는 놈이었어.”
그래서 어린 시절 많이 때렸다.
힉슨은 그런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을 별로 안 좋아했다.
“이상하니까, 스스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거야. 왜 비올라가 그렇게 모순적인 행동을 했을까?”
“세알 자작 입장에서는 그렇겠군요.”
힉슨은 곁눈질로 비올라를 살펴봤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비올라는 지금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이야.’
철혈의 벨라투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왜 저렇게 평소답지 않은 거냐?
지켜주고 싶게.’
그래서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한 명이 모순된 두 가지 행동을 같이 했어. 자아가 두 개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겠지요.”
“그러면 세알 자작 놈은 이렇게 해석할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힉슨이 말을 이었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장이 세알 자작에게 보고를 올렸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고 따뜻한 차와 다과를 준비하여 올렸습니다.
귀는 좀 어떠신지요?”
“절단면이 지나칠 만큼 깨끗해서 하루면 회복된다더군.”
“그렇군요. 비올라 공녀가 배려하신 겁니까?”
“아마도, 열두 살에 이 정도 실력일 줄은 몰랐지만.”
“그 정도였습니까?”
“신관이 깜짝 놀라더군. 어린 시절의 메데이아 공녀에 필적하는 능력이라고까지 표현했어. 그러니까 특사로 파견되었겠지만.”
시종장은 세알 자작의 고용인이지만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굳이 자작님께 그렇게 했을까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게 메시지를 주고 있는 거야.”
“메시지요?”
“벨라투의 누군가는 내게 경고하고 싶어 한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헤론 공작이겠지.
세알 자작은 그렇게 판단했다.
허튼짓하지 말라고, 이상한 마음을 품으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고, 그렇게 경고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특사 신분의 비올라 벨라 투는 벨라투의 입장을 대변하여 내게 혹독하게 경고했어. 귀가 정말 아팠지.”
“…….”
“그렇지만 인간 비올라 벨라투는 나를 배려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일단 생명을 구해줘서 명분을 만든 다음 경고하는 방식.
“지나친 비약 아닐까요?”
“비올라는 철혈의 벨라투로 이미 이름을 얻고 있어. 게다가 2년 전부터 하얀 벨라투로 진로를 잡았다더군.”
“하얀 벨라투…… 말입니까? 하얀 벨라투는 도태된 벨라투 아닙니까?”
“원래는 그렇지.”
그렇기에 하얀 벨라투는 더욱 큰 성과를 보여야 한다.
“스스로 하얀 벨라투가 된 공녀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성적인 계획일 거야.”
“하지만…… 공녀는 겨우 열두 살입니다.”
“메데이아 공녀는 열두 살에 최연소 9급 기사가 되었지. 고블린 무리를 홀로 토벌해서. 그건 말이 되나?”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공녀는 벨라투가의 경고를 성공적으로 해냈어. 천살 공작은 나를 탐탁지 않아 하지만, 철혈 공녀는 내게 분명한 호감이 있을 거야.”
시종장은 세알 자작을 신뢰하지만 조금은 걱정도 됐다.
사실 지금 세알 자작가와 벨라투가가 평온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벨라투는 세알가의 장남을 죽여 버린 원수 가문이다.
“비올라는 벨라투 비올라와 인간 비올라 사이에서 교묘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내게 접근할 거야.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결과를 위해서.”
“저희를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자신의 성과를 위해?”
“아마도 그렇겠지.”
“그건 좀 기분이…….”
“그러니까 지켜봐야 할 거야.”
세알 자작이 침대 쪽을 쳐다보았다.
“공녀의 눈썰미와 지략이라면, 반려검의 생명이 위독하지 않다는 것도 진작에 알아차렸을 거야.”
피를 많이 흘려 의식이 없기는 했지만 조만간 회복될 만한 부상이었다.
그걸 눈치챘을 비올라가 굳이 이렇게 말했다.
‘내 개가 회복하지 못하면 세알 자작가는 오늘로 멸족될 겁니다, 자작님.’
“오늘이 지나기 전 비올라 공녀가 날 다시 찾아올 거야. 반려검은 회복 중이니, 대화를 시작하겠지.”
“……그게 그런 메시지였습니까?”
“그래.”
비올라가 다시 찾아올 거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겠지. 인간 비올라는 어쩌면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게 접근할 수도 있겠어.”
“인간적인 방법 말입니까?”
“내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사과라 든가.”
“사, 사과요? 벨라투가요?”
시종장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아들을 죽여 버린 것이 사과로 끝날 문제도 아니었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군.”
단순히 사과한다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해결될 것이다.
물론 죽는 것은 자신 쪽이겠지만.
“그래서 나는 잠시 지켜볼 생각이야. 너무 이상해서 지켜봐야만 할것 같아.”
철혈의 벨라투.
비올라 벨라투 공녀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비올라가 했던 행동들을 해석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공녀는 이미 나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졌다. 겨우 열두 살에.’
과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상황을 풀어갈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정말…… 비올라 공녀가 오늘 밤에 찾아올까요?”
귀족들 사이에서는 밤 10시가 넘으면 서로를 찾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있었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그럴 거야.”
밤 11시가 되었다.
“11시인데….
정말 찾아올까요?”
“찾아올 거다.”
그때쯤, 툰드라가 정신을 차렸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