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55화시종장 델파는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찾아왔잖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문 쪽으로 소리 나지 않게 뛰어가 문을 잡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비올라는 델파를 스쳐 지나갔다.
델파의 몸이 움찔했다.
시종장으로 일한 지 어언 25년이 지났다.
그간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을 만나보았다.
그래서 마나를 가진 사람들에는 꽤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
비올라는 특별한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옆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는데 소름이 돋았다.
‘이게…… 소문의 살성(殺星)인가?’
열두 살의 소녀를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이 끈적끈적한 살기는 비올라 공녀가 겨우 열두 살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게 만들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비올라는 열두 살의 어린 소녀인데, 감각으로 느껴지는 비올라는 거인이었다.
한편.
비올라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툰드라도 멀쩡하다고 하고.’
침구를 깨끗한 것으로 갈았는지 새하얀 이불보가 눈에 들어왔다.
툰드라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툰드라가 멀쩡하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고.
기분이 좋은 것을 굳이 감추지는 않았다.
가볍게 미소 짓고 세알 자작을 향해 걸어갔다.
시종장 델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소?’
델파의 눈에는 마치 마녀의 비릿한 웃음같이 느껴졌다.
비올라의 실제 표정과는 상관없었다.
델파의 눈에 담긴 사람은 히죽 웃는 마녀였다.
천살 공작이 마녀를 들였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늦은 시간 실례하겠습니다.”
비올라가 소복소복 걸어 세알 자작앞에 섰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인지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사실 비올라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상태였다.
평소처럼 냉정하지 못했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관찰하지 못했다.
‘힉슨 아저씨가 그렇게 똑똑했었나?’
그런데 힉슨이 제논과 대화하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비올라는 그에 따라 행동하는 중이었다.
힉슨이 말을 해주니 이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힉슨에게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만약 제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면 실망입니다, 세알 자작.”
저만치 뒤에 시립한 델파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자작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작님의 말씀이 모두 맞잖아?’
아무래도 세알 자작이 추리한 것이 모두 맞는 모양이었다.
아까까지는 아무리 그래도 열두 살 꼬맹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저 공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어.”
비올라가 테이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시종장.”
“네, 공녀님.”
“따뜻한 우유 부탁해.”
부탁이란 말에 델파의 귀가 쫑긋거렸다.
‘부탁?’
지금의 저 비올라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명령이 아니고 부탁이라니..
새삼 너무나 친절한 명령 아닌가.
그런데…… 묘하게…….’
저 ‘부탁한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명령이 부탁보다 훨씬 익숙한 공녀일 텐데도 말이다.
자연스럽고,
그래서
너무나
더….’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렵다? 생소하다? 이상하다?
아니. 지배자스럽다.
저 정중한 말투와 부탁하는 태도가 기품 있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과연 지배자 가문의 후계자 중 한 명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탁한다는 한마디가 그렇게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꿀 넣어서.”
“……알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비올라는 욕심을 조금 더 부렸다.
“쿠키도.”
“네. 준비하겠습니다.”
델파는 묘하게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밖으로 나섰다.
지배자에 더없이 어울리는 분위기인데 꿀 넣은 우유와 쿠키라니.
그 간극이 델파에게는 신기하게 다가왔다.
세알 자작이 말했다.
“다행히 반려검은 곧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들었어요.”
“그리고 제 귀도 하루 이틀이면 회복한다더군요.”
“다행이네요.”
“절단면이 너무나 깨끗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자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녀께서 의도하신 부분이겠지요?”
제가 그런 건 아니고 제 안의 또다른 제가 그런 거긴 한데요.
제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네요.
속마음을 숨긴 채 여유로이 말했다.
“의도가 아니었다면 굳이 제가 거기서 무력을 행사했을까요?”
“역시 그렇겠지요. 그럼 제가 예상한 것들이 모두 맞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공녀 비올라가 아닌, 인간 비올라 양은 제게 사과하기 위하여 오신 겁니까?”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연기에도 이제 도가 텄다.
“사과?”
일부러 반말을 섞었다.
순간, 자작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저도 모르게 무기를 찾을 뻔했다.
‘무슨 기세가……!’
제1공녀인 메데이아를 어린 시절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메데이아가 뿜어내던 마나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진득한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단도를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를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자작님이 올곧은 신념을 가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특사를 자처해서 여기까지 왔고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실망이네요. 대뜸 사과부터 논하실 줄이야.”
자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어쨌든 벨라투는 자작가의 아들을 죽인 원수 가문이다.
자작은 전쟁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자작이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비올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벨라투에게 있어 자작님의 자제분이 중요한 사람이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비난을 감수해 가면서, 정식 절차를 무시해 가면서, 자제분을 사형에 처했을까요?”
“그건…… 제 아들이 겨울성의 지엄한 법도를 어겼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아. 감히 자작가의 아들 주제에 겨울성의 법도를 어겼으니, 기분 나빠서 죽여 버렸다?”
비올라가 피식 웃었다.
세알 자작의 가슴속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공녀는 명백히 이쪽을 비웃고 있었다.
자작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럼,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사이, 시종장이 꿀을 넣은 우유와 코코넛 쿠키를 가지고 들어왔다.
와그작!
비올라는 코코넛 쿠키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맛있네.’
역시 이 세계의 귀족가들은 베이킹에 일가견이 있단 말이야.
쿠키는 아주 흡족스러웠다.
자작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전쟁도 불사하려 했습니다.”
“알아요. 자작님은 그런 분이죠. 물론, 죽는 사람은 자작님이었겠지만.”
“죽음을 각오했기에 저는 확실한 해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자작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만약 확실한 해명이 없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벨라투에 선전 포고를 할 것입니다. 만약 공녀님이 제 목숨을 한 번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공녀님을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가능했겠어요?”
“모르겠습니다.”
아까 공녀의 움직임을 봤다.
열두 살의 움직임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작가의 모든 인원이 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저희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공녀님 일행을 포박하는 것은 가능하리라 짐작됩니다.”
“뭐. 일단 그렇다고 치죠. 그렇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불상사는 저지르지 않기를 바랄게요. 부디. 진심으로.”
솔직히 겁이 나기는 했다.
부디 진심이라는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으. 무서워.’
아무리 비올라로 5년을 살았어도, 한아린으로 21년을 살았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상황조차 없었으니까.
‘그래도……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의식적으로 마음을 더 편하게 먹기로 했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사형시킨 이유, 생각해 보면 간단하잖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답해주십시오.”
“제 아버지께서 자작님을 좋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원작 속에서도 헤론은 자작을 칭찬한다.
그래서 참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세알 자작가를 후원하기도 한다.
“그, 그게 무슨………!”
“자작님의 명예를 지켜 드리기 위하여, 아버지께서는 폭군의 오명을 뒤집어쓰셨다는 뜻입니다.
세알 자작가는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제 명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겨울성의 법칙을 어긴 것은 명분이었어요.”
비올라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제논.”
“네, 공녀님.”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제논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논의 손에는 새하얀 천이 들려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올려져 있었다.
“아드님의 피입니다. 흑마법에 중독된 상태였어요.”
비올라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정신이었다면 과연 겨울성에서 그런 난동을 피웠을까요? 겨우 에그타르트 때문에?”
흑마법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본능적인 쾌락을 탐하게 만든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게 만드는 대신, 강력한 마법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대신 크나큰 부작용이 하나 있었다.
마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몸이 폭발해 버린다.
살아 있는 생체 폭탄으로 변해 버린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흑마법을 아드님의 몸에 주입했어요. 그렇지만 알고 계시겠죠. 아드님의 동의 없이는 활성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결국 흑마법은 아드님이 원했던 거예요. 저 피에는 흑마법의 마나가 잔뜩 녹아 있었어요.”
이러한 내용은 작가의 설정집에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본편에서는 깊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젤톤은 그저 비첸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조연이었을 뿐이다.
“그 농도가 굉장히 높아서 그대로 두면 언제든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예요. 첫째로, 생체 폭탄이 되어버린 아드님으로부터 겨울성의 백성들을 보호해야 했고.”
비올라의 눈이 세알 자작을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하얀 우유 거품이 조금 묻어 있었다.
“둘째로 자작가의 명예를 지켜줘야 했어요. 그래서 그냥 사형에 처하셨어요.”
“……”
“아드님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자작님은 무얼 하고 계셨나요?”
“왜 제 아버지가 폭군이라는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써 가면서, 당신의 명예를 지켜줘야 했나요?”
내 최애캐는 사실 그런 캐릭터 아니라고!
조금 무섭기는 해도 7중첩 마법진이 걸린 야수의 관에서 귀여운 고슴도치들을 키우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제가 만약 아버지였다면, 자작가의 명예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세상에 까발렸을 거예요. 만약 그렇게 했다면, 자작님은 자결하셨겠지요.
올곧은 신념을 가진 분이니까.”
원작에서도 그랬다.
결국 자작이 전쟁을 일으키고, 헤론은 자작을 직접 죽여준다.
그의 명예를 위해서.
젤톤이 흑마법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에 영영 묻히게 된다.
“묻겠습니다. 제 아버지의 선택이 틀렸나요?”
자작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비올라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