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57화제논은 이내 이 기운의 주인공이 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제르미 공자의 기운인데?’
미공자 제르미.
그가 이곳에 찾아온 것 같았다.
‘기별은 따로 없었는데?’
그렇다고 제르미가 이곳에서 난동을 피우거나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사고는 치지 않겠지.
딱히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폭풍 검을 익힌 자는 그 패도적인 기운 때문에 은신이 어려워.’
그래서 암살 같은 건 무리다.
폭풍 요새와 세알 자작 사이에 딱히 원한도 없고,
‘그럼 여기 온 이유는 공녀님 때문이겠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차를 준비해야겠네요.
독을 좀 넣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넣지 않기로 했다.
한편, 비올라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얼굴에 황당해졌다.
“제르미 공자?”
다시 확인해 봤지만, 창문이 확실했다.
‘여기는 7층인데?’
비올라가 머무는 방은 7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나를 활용하여 하늘을 나는 방법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건 마법사들 얘기였다.
제르미는 검술가였다.
‘뭐야, 도대체?’
창문 너머로 활짝 웃고 있는 제르미가 보였다.
‘얼른 열어줘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올라가 창문을 열자 제르미가 깡총 뛰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우와. 재미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제르미와는 그렇게 멀지도, 또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제일 좋다.
비올라는 그렇게 판단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로프?’
제르미의 허리춤에는 로프가 매달려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 줄을 달고 내려온 모양이다.
“어때요, 반갑죠?”
“공식적인 기별은 없었는데요.”
“친구끼리 기별이 있어야만 만날수 있나요?”
“우리가 친구였나요? 그리고 지금은 밤 11시인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제르미는 뜨억!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시간이 이렇게 늦은지 몰랐다.
“9시쯤 된 줄 알았어요.”
허리춤의 로프를 들어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준비로 집중하느라…….
“언제 옥상에 올라갔어요?”
제르미가 검지로 좌우로 흔들었다.
“올라가다뇨? 침투했는데. 올라가는 거랑 침투는 달라요. 아주 긴박감이 넘쳤다고요.”
“.……그래요. 침투.”
제르미는 옥상에 오후 6시에 도착했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깜짝 등장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한 시간.
다시 숨어서 로프를 찾는 데 두시간.
로프를 가지고 다시 옥상으로 침투하는데 한 시간 30분.
기타 등등.
“뭣 하러 그런 거예요? 그냥 자작가에 연락하고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면 될걸.”
“깜짝 방문이니까요.”
“이거 외교적으로 굉장히 문제 되는 행동인 건 알죠?”
경우에 따라서는 암살자로 취급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귀족가 사이에 엄청난 실례인 것은 분명했다.
“폭풍 요새는 정치, 외교적으로 독립된 곳이라서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고 생각해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히히히. 아버지한테 혼 좀 나고 말겠죠, 뭐.”
제르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 근처에서 근사한 유적지를 하나 탐방할 계획이었는데, 하필이면 비올라가 세알 자작가를 방문한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친구 얼굴도 좀 보고 인사도 할겸.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왜 정문 놔두고……….”
“그야 그 유적지는 비밀이거든요.
비밀 얘기를 하러 오는데 당당하게 찾아올 수는 없잖아요. 소문이 퍼지면 안 돼요. 조심조심 또 조심이 제 모토랍니다.”
그런 인간이 호기심 때문에 납치당하냐?
비올라는 크게 따지고 싶었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는 통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기에.
“무슨 유적지인데요?”
“정확한 이름은 몰 ,라요, 그냥 어떤 미치광이 마법사의 실험실이라고 불려요.”
“비밀이라면서 왜 가르쳐 줘요?”
“우린 친구니까요.”
소폭풍 제르미의 표정은 티 없이 깨끗했다.
악의라든가, 불손한 의도 같은 건 단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했다.
제르미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비올라 공녀님.”
“네?”
“사실 나 귀찮죠?”
“티 났어요?”
“티 엄청 나요.”
“그럼 이만 물러가 주시겠어요? 저는 곧 사교계에 입문해야 할 나이인데, 원치 않는 소문의 당사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상대가 제 르미라니. 최악이네요.”
제르미가 뒤통수를 살짝 긁었다.
“그렇게까지 최악인가요?”
“네.”
완전히 최악이다.
소폭풍이자 미공자로 이름 높은 제 르미다.
제르미는 소설 속에서 압도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으며, 작가가 비유하기를 소설 속에 존재하는 ‘1세대 아이돌’과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극성 악성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혹은 거느리게 될 미공자라는 뜻이다.
얽히면 매우 매우 피곤해질 것이 뻔했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요. 그냥 반가워서.”
제르미가 시무룩해졌다.
‘너무 심했나.’
그래서 다른 말도 조금 해줬다.
“저도 반갑기는 했네요.”
“정말요?”
비올라가 사회적 가면을 썼다.
제르미와 친해질 생각은 없지만 아주 등 돌릴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적당히 웃어주었다.
비올라와 제르미가 문 쪽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제르미는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뭘요?”
“비올라 공녀는 생각보다 엄청 귀여워요.”
특히 에그타르트 먹을 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취향이 특이하시네요.”
비올라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다.
빙의한 직후 가장 많이 했던 것이 거울을 보며 얼굴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 신체에 귀여움 따위는 한 움큼도 안 묻었다고.
제발 귀여웠으면 좋았을 텐데.
한아린이 접했던 수많은 로판처럼, 귀여운 공주님으로 빙의해서 뿌!
빠! 삐! 쀼! 꺄! 하고 동동대면 사랑받는 캐릭터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마침 벽면 거울에 비친 비올라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도 안 귀여워.’
예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예쁜 것과 귀여운 것은 또 별개였다.
눈에 힘을 조금만 줘도 살기등등해 지는 것이, 과연 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적인(?) 신체다웠다.
“진짠데. 귀여운데.”
“그럼 귀여운 걸로 해요.”
“솔직히 애늙은이 같다는 말 많이 듣죠?”
“종종 들어요.”
심지어 힉슨은 비올라더러 동안이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비올라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자. 문은 이쪽이니 살펴 가시길.”
문밖에, 툰드라가 서 있었다.
낯빛이 굉장히 어두웠다.
***
몇 시간 전.
툰드라는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보고 싶다.
반려견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기다림이 이런 걸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보고 싶지?’
반려견이 꿈이라지만 그래도 개는 아니다.
‘왜 비올라가 보고 싶은가?‘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툰드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거동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소설 속.
이성적인 남주로 설정된 툰드라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칭찬받고 싶어서다.
비올라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면 마음속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든다.
단순히 기분이 좋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은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툰드라 스스로도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칭찬. 받고 싶어.’
몸을 일으켜 복도 쪽으로 나갔다.
‘주인님은….’
툰드라는 주변 마나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비올라는 ‘살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 혹은 지나쳤던 자리에는 특유의 혈향 같은 마나의 냄새가 남아 있다.
툰드라의 눈에는 그것이 하나의 길처럼 보였다.
‘저쪽이다.
비올라가 머무는 방문 앞에 섰다.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칭찬, 해주시겠지?’
생각해 보니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주인을 찾아도 되는 걸까?
이성적인 남주는 또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였다.
‘나는 개니까.’
개가 주인을 만나러 가는데 시간을 정할 리 없지 않은가.
개는 개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예의범절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올라도 개처럼 굴라고 직접 말해 줬었다.
그래서 보고 싶은 마음과 칭찬받고 싶은 마음을 참지 않았다.
그런데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공녀는 생각보다 엄청 귀여워요.”
“취향이 특이하시네요.”
“진짠데. 귀여운데.”
“그럼 귀여운 걸로 해요.”
“솔직히 애늙은이 같다는 말 많이 듣죠?”
“종종 들어요.”
비올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톤이 높았다.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였다.
‘주인님?’
분명히 남자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제르미의 목소리다.
툰드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쥐었다.
툰드라는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갈등을 하다가 ‘나는 개니까’ 라는 이유로 비올라를 찾았다.
칭찬받기 위해서.
비올라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면 해서.
‘제르미는 나랑 달리 사람이야. 그것도 귀족의 법도를 아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
아주 잠깐,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려야 했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이성적인 그는 또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귀족가의 공자가 예의범절을 무시하고 주인님을 찾았어. 이 늦은, 야심한 시각에.’
저토록 후안무치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툰드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주인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주인이 화를 내지 않는데, 개인 자신이 화를 낼 명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화를 낼 수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다.
화를 낼 수 없고, 내지도 못한다.
명분도 없고 상대가 납득할 만한 근거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화가 나는 걸까?’
제르미가 비올라를 찾아와 단둘이 담소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비올라가 가르쳐 줬었다.
‘사람은 깊은 생각을 해야 하고, 개는 깊은 생각을 안 해도 돼.’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화가 많이 난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렸고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툰드라? 여긴 어쩐 일이야?”
·임무를 완수했다는 보고를 드리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제르미가 손을 흔들었다.
“오잉? 툰드라. 안녕? 반가워. 제 르미야. 우리 구면이지?”
“저는 안 반갑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말을 놓을 만큼 편한 사이였던가요?”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제르미가 무안한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툰드라는 제르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서 말을 이었다.
“저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고 칭찬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래.”
비올라가 툰드라를 쳐다보았다.
툰드라의 어깨와 입가가 움찔움찔떨리고 있었다.
‘오빠가 화났을 때, 딱 저랬는데.’
강한준은 화난 것을 티 낸 적이 없었다.
적어도 한아린 앞에서는 화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아린은 강한 준이 화가 난 것을 늘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화가 나면 어깨와 입가가 늘 움찔거렸었으니까.
“칭찬해 줄게. 이리 와.”
툰드라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올라가 툰드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툰드라의 머리를 슥슥-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네.”
툰드라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조금이 아니라 대놓고 풀어졌다.
화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보호자의 손길에 마냥 행복해하는 강아지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닌 것 같은데.”
비올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너. 왜 화났었어?”
툰드라의 몸이 움찔했다.
전혀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는 거 아니야. 왜 화가 났는지 묻는 거야.”
“…….”
비올라는 이미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실상 툰드라는 화가 났다는 것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그냥 던져나 봤다. 왜 화가 났냐고.
그랬더니 죄송하단다.
화가 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였다.
‘왜 한준 오빠랑 똑같은 방식으로 화를 내는 건데?’
여러모로 헷갈리게 만든다.
강한준이 아닌데 강한준처럼 행동하고, 강한준의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내가 묻잖아. 왜 화가 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