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58화
“내가 묻잖아. 왜 화가 났는지.”
툰드라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르미 공자가 절차와 법도를 무시하고 귀족의 예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이, 뻥 치시네.”
제르미가 킥킥대고 웃었다.
제르미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너 그거 질투야.”
툰드라가 제르미와 눈을 마주쳤다.
둘의 눈에 허공에서 부딪쳤다.
“질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응. 질투.”
툰드라는 ‘헛소리는 집어치우시지요’라고 말을 하려다가 하지 못했다.
‘질투.
아무래도 제르미가 말한 것이 맞는 것 같다.
툰드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끝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질투한 것 같습니다.”
비올라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준 오빠는 내게 질투하지 않았어..
강한준은 한아린을 늘 가족으로 대했다.
늘 따뜻하고 배려 넘쳤지만 아린을 여자로 대한 적은 없었다.
질투했어도 한아린이 했지, 강한준이 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하네.”
강한준과 툰드라의 다른 점이 보였다.
강한준이었다면 질투라고 얘기하지 않았을 거다.
“제 소망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제르미 공자?”
“응. 반려견, 재미있는 꿈이던데.
근데 그게 진짜야?”
“네.”
툰드라는 반려견이라는 꿈에 절실했다.
그래서 ‘반려견’에 대하여 시간 날 때마다 열심히 공부했다.
여러 차례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듣고 최근 떠오르는 신흥 직종인 반려견 훈련사와 만나 상담을 받아보기도 했다.
“어떤 반려견들은 기질적으로 보호자에 대한 상당한 집착과 질투를 드러내곤 합니다.”
“호.”
“훈련 등으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긴 하지만, 저는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질투가 나는 모양입니다.”
비올라는 말하고 싶었다.
그거야 진짜 강아지 얘기고!
너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제르미! 당신은 왜 갑자기 엄청 납득하는 표정인 건데?
“그래서 질투했다?”
“그런 듯하네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감히 질투했어요.”
제르미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대고 웃었다.
“진짜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반려견이 제 꿈이니까요.”
말의 내용은 황당하고 웃겼지만, 태도 자체는 진중을 넘어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제르미도 진지했다.
“나는 신념 있는 사람을 좋아해.”
“신념의 가치는 타인이 평가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제르미가 툰드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얼핏 보면 격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꿈과 신념을 응원해.”
비올라는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저 말은 소설 속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는 말이었다.
「“네 꿈과 신념을 응원해.”」
그러나 글자 곧이곧대로의 뜻이 절대로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그 말은 제르미가 강한 경쟁심을 느낄 때 주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비올라는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툰드라의 신념(?)의 어느 부분에서 강한 경쟁심을 느낀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
진성 독자였던 한아린조차 제르미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였다.
작가는 블로그에 ‘사실 저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인 것 같아요. 정신 차려 보면 알아서 날뛰고 있더라고요. 제르미라는 캐릭터가 그런 것 같아요’ 라는 후기를 남기기까지 했었다.
단적인 예로, 제르미는 호기심 때문에 납치를 당해주는 또라이 캐릭터다.
제르미가 걸어 나갔다.
“아무튼 유적지 탐사는 같이하는 거예요. 3일 후에 봐요.”
그러면서 비올라와 툰드라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씨익 웃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말을 내뱉었다.
“내가 오빠니까 사석에서는 말 놓는다? 3일 후에 봐, 귀여운 비올라.”
툰드라의 귀에 세 개의 단어가 내리꽂혔다.
오빠.
사석.
귀여운.
툰드라는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올리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
비올라는 툰드라의 모습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비를 쫄딱 맞은 아기 강아지 같았다.
“반려견으로서 너무 부끄러운 모습이었나요?”
비를 쫄딱 맞은 데다가 꼬리까지 축 늘어뜨리고 발발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해요. 질투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괜찮아.”
비올라는 오히려 기분이 꽤 좋아진 상태다.
툰드라가 강한준과 현저히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인지했으니까.
“개가 개답게 행동한 건데, 뭘 자꾸 죄송하다는 거야?”
비올라가 툰드라의 허리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마치 주인이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듯.
그러자 툰드라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툰드라에게 꼬리가 있다면 팔랑팔랑 흔들렸을 것 같다.
방금 전까지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짜 강아지처럼 군단 말이야.’
어느덧 툰드라는 평안을 되찾았다.
그사이, 제논이 비올라의 방으로 들어와 물었다.
“그런데 툰드라. 당신은 어떻게 이곳에 제르미 공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까?”
비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툰드라가 그걸 알고 있었어?”
“네. 한참 동안이나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제르미 경이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비올라가 툰드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알고 있었어?”
“네.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냄새로요.”
순간, 툰드라의 코가 찡긋거렸다.
강아지들이 어떠한 냄새를 감지했을 때처럼 코가 움찔움찔했다.
그러자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냄새로 제르미 공자를 알아차렸다고요? 체취를 뜻하는 겁니까?”
“아니.”
“그러면요?”
“마나 특유의 냄새가 있어.”
비올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나 특유의 냄새?’
비올라는 소설 〈벨라투의 그림자>를 여러 번 정주행했고, 더 나아가 작가의 설정집까지 여러 번 완독했던 독자였다.
그런데 ‘마나 특유의 냄새’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도 그렇고 설정집에서도 그랬다.
“사람마다 그 냄새가 달라. 나는 제르미의 냄새를 느꼈어.”
“그렇군요. 신기한 현상이네요.”
소설 속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남주 툰드라에게, 소설에는 없던 새로운 능력이 생긴 모양이었다.
‘괜찮은 거겠지?’
제논이 또 물었다.
“제게도 그런 냄새가 나나요?”
“응. 그런데 네 냄새는 매일 바뀌어.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어째서요?”
“속이 의뭉스럽고 교활하게 느껴져서.”
“아. 평가가 박하네요. 그래도 우리가 벌써 5년을 함께했는데 평가가 그 정도밖에 안 되나요?”
툰드라는 가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받았습니다.”
제논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표정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툰드라는 딱히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공녀님께는 어떤 냄새가 나 나요?”
“그리운 냄새.”
툰드라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운 냄새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주인님의 냄새를 알고 있었어.”
“아주아주 오래전이요? 얼마나 오래죠?”
제논의 미소가 짙어졌다.
“비올라 공녀님을 만난 것은 5년 전이잖아요.”
“아니. 나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공녀님의 냄새를 그리워했어.”
비올라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얘가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가 아니에요.”
툰드라의 표정은 진지했다.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얘는 또 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툰드라를 보면 자꾸만 헷갈린다.
강한준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했다.
“헛소리가 아니면?”
“주인님의 냄새를 처음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았어요. 전 주인님의 냄새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처음 맡아본 냄새인데 익숙하고 그리웠어요.”
툰드라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솔직했다.
‘개는 깊은 생각을 안 해도 돼.’
사람 툰드라는 어떨지 몰라도 개툰드라는 솔직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비올라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마치 정말 오래된 인연의 실이 닿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툰드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왠지, 저는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아요. 냄새가 그렇게 말해줘요.”
***
그날 밤.
비올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툰드라의 말들을 곱씹어봤다.
‘그리운 냄새. 오래된 인연.
그리고 또 한마디.
‘왠지, 저는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아요. 냄새가 그렇게 말해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괜스레 가슴이 아파왔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 얼굴로 그런 말을 하냐고!”
아무래도 영 이상한 기분이었다.
툰드라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의도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툰드라는 자신의 진심과 느낀 바를 솔직하게 전달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툰드라는 그저 반려견으로서 충실할 뿐이야.’
강아지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고 했다.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강아지의 습성을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흉내 내고 있는 것이리라.
‘개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어.’
평생 주인만을 바라보고 주인을 위해서만 살아간다고 들었다.
강아지에게 있어서 주인은 세상의 전부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툰드라도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중이리라 생각했다.
‘그래. 툰드라는 그런 캐릭터니까.’
자기가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고 마는 캐릭터다.
그러니까 스스로 ‘반려견’이 꿈이라고 하면, 그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원작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능력이 새로 생긴 거고.’
더 나아가.
‘내 마나의 냄새도 오랫동안 그리 워하고 익숙한 냄새라고 느꼈겠지.’
툰드라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상황을 만들어갈 캐릭터다.
비올라는 그렇게 납득해야만 했다.
‘아. 머리 아프다.
어느덧 창살을 통해 환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째짹거리는 파랑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네.”
마침 제논이 침대 앞에서 시립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불을 발로 차버리시더라고요.”
“언제 왔어?”
“두 시간 25분 08초 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제 업무에는 공녀님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서 이불을 다시 덮어드렸어요.”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배앓이하시면 안 되잖아요.”
이 사기적인 육체가 배앓이 같은 걸 하겠어?
비올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괜히 제논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없었다.
툰드라가 툰드라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처럼, 제논은 제논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니까.
“자작 부인과의 약속은?”
“두 시간 후, 해맞이 홀에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조되어 있습니다.”
“그래. 세알 자작도 내용은 전혀 모르지?”
“네. 그냥 공녀님과 자작 부인의사교 자리로만 알고 있습니다.”
어젯밤.
비올라는 일라일 자작 부인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얘기를 좀 나누면 좋겠는데요.]
덕분에 아침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약간 들뜬 듯한 제논이 말했다.
“해맞이 홀의 드레스 코드는 노란색이랍니다.”
제논이 아공간을 열어 무려 서른여덟 벌의 노란 드레스를 꺼냈다.
마법으로 촤르륵 펼친 드레스들은 보기만 해도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다.
‘좀 더 단출하고 깔끔한 건 없을까?’
배 중앙에 저 커다란 리본은 뭐며, 저토록 과한 시폰 레이스는 또 무엇이며, 금실로 수놓은 저 사치스러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계에 빙의한 지 벌써 5년이나 되었지만 패션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걸로 할게.”
노란색 실크 재질에 비교적 단출한 드레스였다.
몸에 지나치게 달라붙지도 않고, 또 너무 벙벙하지도 않아서 움직이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걸로요?”
제논은 조금 아쉬운 듯했다.
“혹시 이건 어떠실까요?”
제논이 지목한 건 굉장히 화려한 레이스와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잔뜩 달린 겹 드레스였다.
제논의 눈에 굉장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마치 인형 놀이를 처음 접한 인류의 즐거움이 눈 속에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제논, 내 취향을 아직도 몰라?”
“알고는 있습니다만…….”
이내 제논이 부드럽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욕심이 너무 앞섰습니다.”
정중하고 따뜻한 어조였지만 비올라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무슨 욕심이 앞섰다는 건지까지는 추궁하지 않았다.
‘제논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 같은데.”
우여곡절 끝에 오전 9시가 되었다.
비올라는 제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해맞이 홀로 향했다.
해맞이 홀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길지 않은 직사각형 식탁이 보였다.
여덟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그곳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비올라 공녀. 어서 오세요.”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부인.
이름은 일라일이었으며 훗날 대마도사 벵가스의 어머니가 될 여인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비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시중을 드는 사람들과 집사는 모두 물렸다.
“자작 부인과 단둘이 오붓한 식사를 하고 싶어.”
“알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공녀님.”
식사가 진행되기 직전.
일라일 부인이 물었다.
“비올라 공녀. 제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나요?”
아무에게도, 심지어 남편인 자작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다.
자작 부인에게는 나름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그것만 알고 있을 것 같나요?”
“무슨 말이죠?”
“그 아이의 아버지가 세알 자작님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툭!
일라일 자작 부인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가 땅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