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59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세알 자작님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일라일 자작부인은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실제 비올라는 웃지 않았지만 일라일 자작 부인의 머릿속에서 비올라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침착해야 해.’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저는 이렇게 칠칠치 못한 행동을 하곤 한답니다. 남편은 제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봐주고요.”
마치 포크를 떨어뜨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자작 부인이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비올라 공녀가 저와의 사적인 만남을 원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설마 그 이유가 이렇게 철없는 것이었나요?”
일라일의 머릿속에서 비올라는 그저 벨라투의 ‘철혈 공녀’였다.
피가 철로 만들어진 냉혈하고 잔혹한 벨라투의 공녀.
겨우 열두 살에 불과한 나이로 무려 철혈이라는 이름을 얻은 불세출의 천재이자 누구보다 ‘벨라투스러움’을 가진 소녀였다.
‘절대 약점을 잡히면 안 돼.’
그러면 평생이 힘들어질 거다.
평생을 공포 속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비올라 공녀는 지금 제게 아주 큰 실수를 하고 계신 거예요. 제 명예를 더럽히실 생각인가요?”
더욱 강하게 몰아붙여야 했다.
지금 일라일 자작 부인에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었다.
“저는 문제를 공론화시켜 문제 삼을 예정이에요.”
“정말요?”
“네. 이건 저를 모욕하는 것을 넘어서 세알 자작가를 조롱하는 행위니까요.”
비올라는 여유로운 척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미 이런 상황은 많이 겪어봤다.
이 세계의 끝판왕 격인 아버지를 상대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일라일자작 부인은 쉽게 느껴졌다.
“제게는 훌륭한 개가 한 마리 있어요.”
“개요?”
“세상은 그 개를 일컬어 반려검이라 부른다죠.”
“아.”
반려검.
일라일 자작 부인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철혈 공녀가 5년 전 거두어서 심복으로 키우고 있는 인물이자, 힉슨경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는 그 소년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왜 제가 사람을 개로 삼았을까요?”
“그게 지금 주제와 관련이 있나요?
저는 지금 공녀가 저와 자작가를 모욕하고 조롱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냄새를 맡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래요.”
사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어제 알기는 했지만 덕분에 이런 핑계가 가능해졌다.
“처음 듣는 말일 거예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왔으니까.”
“비올라 공녀의 비밀에는 관심 없어요. 알고 싶지 않아요. 그보다 저를 모욕한 것에 대한 해명을 부탁합니다.”
비올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한편, 일라일 자작 부인은 저 여유로운 모습 속에서 어딘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뭔가를 정말 알고 있는 거야?’
필사적으로 여유로운 척하지만 속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열두 살 소녀에게서 저 정도의 여유와 압박감이 느껴질 줄은 몰랐다.
비올라 벨라투에 관한 소문이 어느 정도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제 개는 사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냄새의 특별한 마나가 존재하거든요.”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그런데 자작 부인의 몸에서는 두명의 냄새가 난다고 했어요. 덕분에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자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한 것까지는 인정하기로 했다.
더 이상 감추어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임신한 것은 맞아요. 그렇다면 공녀는 모욕이 아니라 축하를 해줬어야 옳지 않을까요?”
“그런데 또 재미있게도, 다른 사람 냄새가 섞여 있다고 하네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소설을 읽었던 한아린이기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왜 배 속의 아이에게 다른 남자의 냄새가 섞여 있을까요?”
“근거 없는 중상모략으로 제 마음을 어지럽히지 마세요.”
자작 부인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의 즐거운 식사는 여기까지겠네요. 다음에는 유쾌하지 못한 자리에서, 좋지 못한 얼굴로 만나 뵐 것 같군요.”
“왜 그 아이에게서 꽤 정순한 마나가 느껴질까요?”
뒤로 돌아 걸어 나가던 자작 부인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 아가의 아버지에게는 타고난 마나가 풍부했을 거예요. 그러나 무인의 마나는 아닌 것 같네요. 신분도 낮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 이름까지 말할까요? 이쯤에서 그만둘까요?”
“그 아버지는 높은 산 위에서 내려왔지요? 달콤하고 다정한 말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을 거예요.”
비올라는 그 이름을 알고 있다.
루이바르텐가의 차남 세르폰 루이 바르텐.
험준하기로 소문난 파르아산 꼭대기.
파르아 분지에 위치한 루이바르텐가의 차남이 불륜 상대였다.
일라일 자작 부인은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날 밤의 일은 실수였다.
그날 밤은 불꽃이 예뻤고 하늘의 달이 아름다웠으며 사람들의 웃는 표정이 좋았다.
그날따라 포도주가 정말 달콤했고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수였겠죠.”
소설에서 본 대로 읊었다.
“그날 밤은 불꽃이 예뻤을 거예요.
달빛이 유난히 푸르렀을 것이고.”
“.……그만.”
“사람들의 웃는 표정에 기분이 좋았을 거예요.”
“그만하세요.”
“그날따라 유독 포도주가 달콤하고 강가에 부는 밤바람이…….”
“그만!”
자작 부인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 알고 있어. 정말로 다 알고 있는 거야.”
철혈 공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서, 자신의 약점을 잡고 흔들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악마의 피와 독사의 혀를 가지고서.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도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뭐죠?
왜 나를 찾아와 협박하는 건가요?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 거죠?”
자작 부인은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일은 실수였어요.”
실수였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와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다시는 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분위기에 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반성했다.
“실수라고 해도 잘못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세알 자작님을 만나보았고, 그분은 존경받기에 충분한 분이셨어요. 명예를 중시하고 올곧은 분이셨지요.”
자작 부인도 인정했다.
몰락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 정도까지 성장했다.
태생의 한계 때문에 고위 귀족이 되지는 못했어도 세알 자작가는 내실이 탄탄한 귀족가 중 하나였다.
세알 자작은 남자로서도 훌륭했고, 남편으로서도 다정했다.
내게는 당신밖에 없소, 부인.’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그는 미사여구 없이 담백한 말로 늘 사랑을 고백해 주었다.
아름드리나무처럼 항상 옆에 든든하게 서주었다.
자작은 늘 듬직했고 굳건했다.
그에 반해 재미는 조금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 재미있는 사람에게 저도 모르게 홀렸었다.
‘오늘 밤은 부인의 눈동자에 건배를 하고 싶어요.
‘모든 것을 잊고 나랑 즐기며 별을 보아요.’
비올라는 절망적인 표정의 자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씨는 다 뿌렸다.
이제는 추수할 차례다.
“협박의 의도는 없어요.”
…거짓말.”
“벨라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요.”
그 말에 흐느끼던 자작 부인이 고개를 들고 비올라를 쳐다봤다.
“벨라투의 이름을 건다고요?”
“금지되어 있는 행동이죠. 벨라투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건, 가주에게만 허락된 행동이에요.”
비올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자작 부인이 입만 뻥긋하면 저는 후계자 후보에서 단칼에 잘려 나갈 거예요. 경솔한 입을 가진 자는 후계자의 자격이 없으니까.”
“………..”
“우리는 지금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쥐고 있는 거예요. 이제 내 말을 좀 믿겠어요? 저에게 있어서 벨라투의 후계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자작 부인이 더 잘 아시리라 믿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벨라투의 후계자 자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후계자는 메데이아다.
비올라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정해 놓았다.
그러나 일라일에게 있어서 비올라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협박이 아니라면 무슨 상황인가요?”
“자작 부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친구요?”
“배 속의 그 아이는 마법사로 대성할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어마어마한 재능이죠.”
그 아이는 훗날 대마도사가 될 아이랍니다.
벨라투와 소설 후반부의 비올라를 괴롭힐 주역 중 하나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악당이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세력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이건, 저를 위한 투자죠.”
“투자…… 요?”
일라일 자작 부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차라리 이쪽이 훨씬 마음이 놓였다.
친구라는 추상적인 단어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이 더 와닿았다.
‘비올라 공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혈 공녀.’
그렇기에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입양딸.
스스로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외부의 힘이 없는 그 입양 딸이 세력을 넓히는 중이라고 이해하면 편했다.
“정확히는 배 속의 아이에게 투자하기 원해요. 장성하여 저를 도울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요.”
비올라는 한참 동안이나 자작 부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세알 자작님은 똑똑한 분이라고, 제가 말을 했었죠.”
“네.”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과연 그분이 아무것도 모르실까요?”
순간, 자작 부인의 몸이 또 움찔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알고 있어요. 그분께서는 진심으로 자작 부인을 사랑하고 계세요.”
“그런 분이 자식의 명예와 가문의 명예만을 위하여, 죽을 줄 알면서도 진군을 생각했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을 영지에 남겨두고? 부인이 얼마나 슬퍼할지 알면서?”
독자였던 한아린이 못내 안타까웠던 부분이었다.
자작에게는 자작의 속사정이 있었다.
그는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이 맞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부인을 두고 죽음을 결심할 만큼 모진 사내도 아니었다.
만약 아내의 외도 사실을 몰랐다면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자작 부인의 외도가 자작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제가 특사로 오지 않았다면 자작님은 벨라투에게 전쟁을 신청했을 거고, 아마 지금쯤 자작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분은 자작 부인만 남겨두고 죽음을 선택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비올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택은 자작 부인의 몫이에요. 저는 벨라투의 일원. 하얀 벨라투로서 모든 상황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살펴보고 말씀드리는 거니까.”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잘못은, 자신만이 바로잡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귀족은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잡아야만 할 책임이 있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제가 느낀 세알 자작님은, 자작부인께서 외도보다 더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용서하실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문을 닫고 나섰다.
그로부터 하루가 흘렀다.
새벽 12시 30분경.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공녀. 잠시 얘기를 나눌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일반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공문도 없었고 미리 오간 얘기도 없었다.
게다가 시간은 12시 30분.
일반적으로는 만남을 갖지 않는 시간이었다.
‘세알 자작?’
문을 열자 수척한 얼굴의 세알 자작이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기다란 검이 들려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검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