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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61화 (61/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1화힉슨의 사과는 꽤 투박했다.

“……하다고.”

“뭐라고?”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뭐가?”

힉슨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나이를 먹으니 사과하는 것이 뭐가 이렇게 힘든지.

“옛날에 내가 너 많이 때렸잖아.”

“술에 쩌든 개망나니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냐?”

“그리고 말을 정정하지.”

세알 자작은 따뜻한 홍차를 마시던 컵을 내려놓았다.

투명한 컵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피어올랐다.

“네가 날 많이 때린 것이 아니라.”

“……?”

“대응할 가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그래?”

“폭력에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은 귀족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어.”

세알 자작이 피식 웃었다.

“과거 일이라면 됐다.”

“진짜?”

“네가 딸을 잃었을 때, 솔직히 고소하다고 생각했거든.”

힉슨이 인상을 찡그렸다.

애써 마음먹고 사과하러 왔더니 아픈 곳을 긁어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확 한 대 쳐버릴까.

어차피 망나니로 소문난 지 오래니, 망나니로 살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잠깐 들었다.

“나의 마음이 그토록 악했다. 그러니 서로 퉁 치도록 하지.”

“네가 퉁 친다는 말도 쓸 줄 알아? 맨날 품위니 명예니 떠들어대서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는데.”

“합의하도록 하지.”

세알 자작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가 악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사과한다. 용서를 구한다.”

“속으로는 뭔 생각을 못 해. 됐다.

아무튼 내 사과는 받아준 거다? 나중 가서 딴말하기 없기다?”

힉슨이 세알 자작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아들 일은 안타깝게 됐다.”

둘에게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한 명은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또 한 명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세알 자작은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힉슨의 손을 놓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네가 비올라 공녀의 보호자를 자처했다지?”

힉슨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서렸다.

검지를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아니? 비올라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던데?”

“비올라 공녀가?”

세알 자작이 본 비올라는 냉철하고 합리적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성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 옆에 좋은 어른이 있어 주면 좋겠다. 어른이 필요하댔어.”

“의외군.”

“뭐가?”

“좋은 어른으로 널 선택했다는게.”

“그러게.”

힉슨이 생각해도 웃기기는 했다.

비올라는 자신의 무엇을 보고 도와 달라고 말을 했을까.

왜 자신한테 손을 내밀었을까?

“내가 본 비올라 공녀는 철두철미한 성정의 소유자다.”

“알아. 그것도 비올라의 모습이지.”

“비올라 공녀는 네 도움이 필요함과 동시에, 네 필요를 알아차렸던 거야.”

“내 필요라니?”

“망나니 같은 너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비올라가 나를 도와주고 싶었다고?”

힉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비올라를 만나고서 인생이 변했다.

‘패배자처럼 살아가던 나를 갱생시켜 줬지.’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일종의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걸까?

“결과적으로 보면 나를 도와준 게 맞기는 하네. 근데 그게 왜?”

“비올라 공녀는 하얀 벨라투다. 나는 그보다 하얀 벨라투에 어울리는 후계자를 본 적이 없어.”

맞는 말이었다.

힉슨이 보기에도 그랬다.

“비올라 공녀는 자질을 판단하는 혜안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들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네게 손을 내밀었고, 굳이 이곳에 특사로 찾아와 나를 제 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사랑하는 여인의 배 속의 아이.

그 아이는 아내의 외도로 인하여 태어나게 될 아이다.

“뭔데 뜸을 들여?”

“그리고 내 아이의 후견인을 자처했어.”

“뭐야, 너 아기 생겼냐?”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내 아이는 아니지만.

그 말은 삼켰다.

아내를 용서하기로 한 시점에서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나와 부인의 아이다. 그런 거다.

용서하지 않았으면 몰랐으되, 용서한 시점에서는 아내의 모든 것을 품어주어야 했다.

그것이 세알이 생각하는 용서였다.

“우리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마법적 재능이 있다는군.”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걸 알았대?”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힉슨이 헹! 코웃음을 쳤다.

“행!”

“왜 그러지?”

“벨라투에 대해 지나치게 환상을 갖고 있는 거 아니냐?”

뭐?”

힉슨이 콧구멍을 후볐다.

굉장히 심드렁한 태도였다.

“헤론 벨라투가 내 친구인 거 알지?”

“그래.”

“벨라투가 아무리 괴물 같은 피여도, 그런 능력이 있겠냐?”

“…….”

“환상을 가져도 적당히 가져야지, 인마. 비올라가 왜 그런 말을 했겠어? 그냥 너를 도우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냥 명분을 준 거잖아. 태아의 마법 재능을 어떻게 알아보냐? 걔가 신이냐?”

세알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태아의 마법 재능을 알아본다? 그건 마탑 마법사들도 불가능한 얘기였다.

‘아…….’

세알은 깊은 충격에 빠져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비올라의 다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힉슨이 피식 웃고서 말을 이었다.

“걔가 천 개의 가면을 쓸 줄 아는 철혈의 벨라투인 건 맞아.”

“………..”

“근데 진짜는 따뜻하고 귀여워.”

“따뜻하고 귀엽다의 기준이 영 이상하군. 혹시 미쳐 버린 건가?”

진짜야. 본인은 자각 못 하는 것 같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하긴. 내가 말해놓고도 좀 이상하긴 해. 그렇지?”

힉슨이 크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비올라의 따뜻하고 귀여운 모습은 나만 아는 거다!

그 소중한 비밀을 홀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알 자작의 집사가 황급히 노크했다.

“무슨 일인가? 방해하지 말라고 일렀거늘.”

“성내에 일대 소란이 일어서 보고 드립니다.”

“소란?”

“제르미 경이 나타나는 바람에”

집사가 보고를 이었다.

미공자 제르미가 나타났고 그의 미모를 추종하는 수많은 여인이 엉겨붙어 작은 사고들이 일어났다는 얘기였다.

자작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마차와의 접촉 사고가 세 건, 서로 밀치다가 다친 사고가 여섯 건.

머리채를 잡고 싸운 사건이 두 건.

대략 요약하면 이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집사가 안경을 고쳐 쓰고서 보고를 이어갔다.

“젊은이들의 신문화라 합니다.”

“신문화?”

“예. 거의 광기다 싶을 정도의 호감을 표현하는 이 무리를 일컬어 ‘소녀 팬’ 혹은 ‘팬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소녀 팬? 팬덤? 별 희한한 용어가 다 있군.”

“그들 중 일부는 상당히 과격합니다. 제르미 공자를 우상화하여 따르기도 합니다.”

“도대체 영지에는 무슨 일이라고 하던가?”

집사가 숨을 깊게 마셨다.

이게 본론이었다.

“하필이면 아리따운 영애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래서 소란이 더욱 커졌단다.

그 ‘아리따운 영애가 자신이라 지레짐작한 몇몇 극성 팬이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비올라 공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

[마을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비올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짧은 쪽지 끝에는 ‘제르미’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비올라는 소설 내용을 떠올렸다.

「제르미가 변장 없이 마을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극성 팬덤에 의한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써 소란이 일고 있을 거다.

‘팬덤 문화가 생기는 초창기니까….’

작가도 직접 서술했다.

제르미는 이 세계의 1세대 아이돌에 가깝다고 말이다.

성숙한 팬덤 문화가 자리 잡기 전, 극 초창기로 보면 되었다.

그렇다 보니 21세기 대한민국보다.

극성 팬이 훨씬 많다는 설정이었다.

‘안 나가는 게 좋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괜히 제르미와 엮였다가는 그 팬덤으로부터 온갖 쌍욕과 돌을 맞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쪽지에서 글씨가 저절로 생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글자가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면 비올라 벨라투 찬가를 부를 겁니다.]

비올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올라 벨라투 찬가?”

제르미의 팬덤에게 벨라투의 위대 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르미가 비올라 벨라투 찬가를 부르는 순간, 대륙의 수많은 제르미팬이 비올라를 부모의 원수처럼 여길 것이다.

‘무슨 꿍꿍이야, 도대체?”

비올라는 제논을 불렀다.

“가면.”

“네, 공녀님.”

인형술사 세이반 마르코스의 특제가면이다.

가면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사람의 얼굴과 똑같았다.

변장을 끝마친 비올라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제논, 따라와. 툰드라도 함께.”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든든한 호위 둘을 대동하여 광장으로 향했다.

일부러 자작가 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자작에게 부탁하여 치안 경비병들을 미리 배치했다.

‘이러면 괜한 시비는 피할 수 있을 거야.”

광장 중앙 분수대 근처에는 제르미가 앉아 있었고, 그를 보기 위한 수백여 명의 팬이 제르미를 둘러싸고 훔쳐보고 있었다.

일부는 일생의 소원을 이룬 것처럼 펑펑 울기까지 했다.

“제논, 자작령이 수백 명의 소녀가 모일 정도로 큰 영지였어?”

“바로 옆 백작령에서 마차를 타고 넘어온 것 같습니다, 공녀님.”

“………그래.”

“제르미 경을 만나는 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전시에나 쓰는 단단한 마차와 투마(馬).

거기에 세이반 마르코스가 만든 가면,그도 모자라 자작령의 치안 경비병 들까지.

“내가 죄 없는 백성들을 벨 수는 없잖아. 저들이 실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만반의 주의를 기울여.”

“비올라 벨라투임을 밝히는 것이 더 조용하게 넘어가지 않을까요?”

비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논이 훌륭한 집사인 건 맞지만 극성 팬덤의 무서움은 잘 모르는 듯했다.

“벨라투의 이름도 소용없어. 저들 앞에서는.”

“…그럴까요?”

“저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노려볼 거야. 만약 내가 비올라 벨라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눈앞이 깜깜하다.

저들은 절대로 비올라 벨라투를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 명 혹은 수십 수백만 명의 적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거다.

생각만 해도 하늘이 노래지고 두려웠다.

그렇지만 말은 다르게 했다.

“그들은 비올라 벨라투에게 실례를 저지를 거고, 그러면 비올라 벨라투는 그들을 죽여야겠지. 나는 필요하지 않은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

“역시 공녀님이시네요.”

어느덧 분수 앞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제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제논도 가면을 착용했다 -마차에서 내렸다.

비올라는 수많은 시선을 느꼈다.

와.

짜릿짜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러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아니야. 비올라. 가만히 있어.”

어찌나 찌릿한 살기가 느껴지는지 원작 속 비올라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극성 팬덤의 살기는 한편으로는 벨라투의 살기보다 더 지독한 부분이 있었다.

“이 상황을 다 예측했군요, 제르미공자.”

“오셨군요.”

제르미가 분수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허리를 숙였다.

“반가워요. 레이디께서 와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럼 정말 몸 둘 바를 모르도록 해드리죠.”

“무슨 뜻이죠?”

제르미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서 일부러 비올라를 불렀다.

이런 상황이면 천하의 비올라도 옴짝달싹 못 할 거라는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제르미는 비올라를 아직 잘 몰랐다.

제르미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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