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2화
“그럼 정말 몸 둘 바를 모르도록 해드리죠.”
사실 제르미는 제르미 나름대로 계략을 잘 짰다고 자부했다.
제르미 혼자 약속한 거지만 어쨌든 약속 날짜보다 하루 빨리 왔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그런데 비올라의 대답이 의외였다.
“지금 이곳이 그대와 나의 결투장이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제르미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결투장?’
내가 아는 그 결투장?
결투?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결투와 영애께서 생각하는 결투가 같은 뜻이겠지요?”
“물론.”
비올라가 단도로 제르미를 겨누었다.
제르미가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제가 생각하는 결투에 대해 말해 볼게요. 첫째, 승패를 결정하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 둘째, 원한이나 모욕 등을 풀기 위하여 일정한 조건과 형식 아래 벌이는 싸움을 뜻하는데요.”
“정확하네요.”
“제가 왜 결투를 해야 하죠?”
“그대가 나와 나의 가문을 너무 쉬이 보았으니까요.”
제르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대가 나를 너무 쉬이 보았으니까 요라고 말했다면 어느 정도 대화로 풀어나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나와 나의 가문’이라고 언급했다.
벨라투를 언급했다.
비올라가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어… 이게 아닌데.’
제르미는 난처했다.
그는 비올라와 결투를 치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저는 영애와 함께 유적 탐사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요.”
“약조된 것도 아니지만, 설령 약조되었다 하더라도 내일일 텐데요.”
비올라는 단도를 겨눈 채 말을 이었다.
“당신이 판을 짜고 움직이면 제가 그 위에서 뛰노는 체스판 위의 말이라고 생각했나요?”
“아, 아니 무슨 얘기가 거기까지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요.”
“그대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그러니까요.”
비올라도 안다.
제르미는 원래 천진난만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캐릭터다.
계략이나 음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의도도 순진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비올라 공녀랑 함께 유적 탐사하면 재미있겠다’ 혹은 ‘유적 탐사하다가 혹시 보물이라도 나오면 비올라 공녀 선물해 줘야지’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대는 그대의 판을 짰고, 제가 그 위에서 뛰놀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대를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라면 제가 순순히 그대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처럼 행동했지요.
그대는 저를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야…….”
그야 비올라 벨라투 공녀님이시지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비올라와는 영영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대답할 수 없게 만들었어. 내 꾀에 내가 넘어져 버린 셈인가.’
비올라가 말했다.
“어서 검을 꺼내 드세요.”
어느덧 자작령의 철갑 경비병들이 몰려와 사람들을 통제했다.
이 역시 비올라가 미리 요청한 내용이었다.
이곳에 몰려든 사람 중 일부는 경비병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요한,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
그러나 경비병들은 침묵했다.
사실 그들도 저 여자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지체 높은 영애이니, 영애가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만 하라는 자작의 명령을 받고 움직일 뿐이었다.
“누군데 감히 우리 제르미 경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거야?”
“그래도 장미꽃을 주지 않는 게 어디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제르미 경의 훌륭한 검술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
“어?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네.”
비올라는 느낄 수 있었다.
극성 팬들의 염원이 느껴졌다.
저들에게 있어서 제르미는 우상이고 신이었다.
그런 제르미에게 감히 무기를 꺼내 들었으니, 제르미가 아름다운 검술을 펼쳐 우아하게 제압할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와… 눈빛들 살벌하네. 어떻게 내 편이 하나도 없냐?’
끄응.
어떤 의미로 편견 없다고 해야 하나?
“제르미 경! 본때를 보여주세요!”
“제르미 경! 저 발칙한 영애를 혼내주세요!”
제르미는 더더욱 곤란해졌다.
‘아. 이게 아닌데…….’
이걸 노린 게 아닌데..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비올라를 만나려고 했는데, 꽤 머리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본때를 보여주라니? 발칙한 영애라니?’
제르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될 것 같았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저들의 호의가 상황을 꼬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자리를 옮기실까요? 이곳은 결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자작저 내부에는 자작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무장은 총 세 개였는데, 그중 하나를 비올라와 제르미가 쓰게 되었다.
“힉슨 경. 괜찮겠습니까?”
“그냥 평소처럼 해라. 뭔 놈의 학슨 경이야?”
자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애들 보는 앞이라 말을 좀 높여서 했는데 힉슨에게 그런 건 통용되지 않았다.
“괜찮겠냐?”
“괜찮겠지, 뭐. 비올라는 똑똑해.
늘 한발 먼저 앞서서 생각하지.”
자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무장에 올라선 비올라와 제르미를 쳐다보았다.
비올라가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열두 살 소녀다.
육체의 발육 상태가 제르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 나이대에는 한 살, 한 살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소폭풍이라 불리는 제르미 아닌가.
제르미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구경꾼도 없는데, 그냥 제가 사과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하기에 저는 벨라투의 사람이라서요. 제가 말했던 거 기억안 나나요?”
“어떤 거였죠?”
제르미와의 첫 만남에서 비올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공자는 공자의 진실 된 모습으로 다가오세요.’
“그런데 공자는 진실 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어요. 이해하기 어려운 술수를 부려 저를 움직이게 했죠.”
“끙. 그 부분은 정말로 미안해요.”
“사과로 끝날 수 있는 타이밍은 지난 것 같네요.”
“진짜로 저와 결투하시려고요?”
“저는 공자가 저를 사적으로 불러낸 순간부터 줄곧 진심이었어요.”
물론 진심이 아니다.
진짜로 싸우면 큰일 난다.
소폭풍 제르미와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 없다.
최후의 방편으로 진짜 비올라를 끄집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사실 지금 그걸 노리는 건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 공녀님과 싸워요?”
“왜요? 제가 벨라투라서요?”
비올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 옆으로 움직였다.
“벨라투는 정당한 결투로 인한 부상이나 사망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 후환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르미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사실 제르미는 아직 여자와 검을 맞대본 적이 없었다.
결투를
하는
것이
“레이디와
좀….”
“그 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비올라는 옳다구나 싶었다.
제르미라면 저럴 줄 알았다.
제르미는 ‘기사라면 레이디를 지켜야지’라는 마인드를 가진 주요 조연이었다.
다만 검술을 익힌 무인(武人)이라면 얘기가 달라져.’
설령 상대가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 상대가 무인이라면, 제르미는 최선을 다해 상대한다.
그것이 무인을 향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제르미는 아직 어리고 여성과 결투를 치러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아직 각성 전의 제르미란 뜻이었다.
「“나는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여성과 검을 맞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메데이아.”
“저는 그녀의 검을 단 3초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열아홉 살에 여자와 처음 싸워본다는 얘기가 등장한다.
「“저는 본래 여성은 약자라고 생각했던 아둔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메데이아 공녀를 만나고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
지금 시점의 제르미는 ‘여성은 약하다’ 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을 시기이고, 비올라는 그것을 제대로 짚었다.
“제가 여성이기에 그대가 상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그, 그건…….”
“지금의 저는 여성이기 이전에 무인입니다. 무인을 모욕하시려는 마음가짐. 잘 알겠습니다.
“아, 아니, 비올라 공녀. 그게 아니 라요.”
그러자 툰드라가 나섰다.
툰드라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말했다.
“주인님. 제가 대신하여 싸워도 괜찮을까요?”
“네가? 왜?”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주인님은 저보다 훨씬 강하신 분인데, 제르미 공자와 굳이 직접 검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르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저 말이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모욕을 했으니, 저쪽에서 모욕하는 것에 대하여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명분이 저쪽에 있었다.
“주인님의 개에 불과한 나를 상대로 꼬랑지를 내리고 도망치지는 않으시겠지, 제르미 공자?”
제르미의 눈에는 보였다.
지금의 툰드라는 눈이 돌아간 투견이었다.
***
결투의 입회인으로는 힉슨이 나섰다.
힉슨도 철검을 하나 들었다.
“뭐, 서로 죽이지는 말라고. 그럼 피곤해지니까.”
혹시라도 사고가 날 것을 대비하여 상황이 너무 위험해지면 힉슨이 제지하기로 했다.
비올라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아. 됐다.
직접적인 결투를 피하면서 벨라투로서의 위신도 지켰다.
힉슨이 개입했으니 누가 죽을 일도 없을 거다.
‘이번 사건으로 제르미가 날 좀 불편하게는 여기겠지?’
그게 최고다.
제르미 성격상 원한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조금 불편해하고 말겠지.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고다.
한편, 툰드라는 커다란 철검을 들고서 제르미를 응시했다.
제르미는 본래 사용하는 명검 대신 자작에게 빌린 평범한 철검을 들었다.
“툰드라. 넌 검을 익힌 지 5년 됐다고 했지?”
“그래.”
“나는 10년 넘었어.”
“알아.”
“그래서 이 검 쓰는 거야. 너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서로 검을 익힌 시간에 대한 공정함을 추구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을 대로.”
툰드라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지금 결투를 치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투는 고귀한 귀족, 혹은 훌륭한 무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건 사냥이다.
주인을 위한 사냥개.
그것이 반려견을 자처한 툰드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자부했다.
‘나는 그냥 사냥하면 돼.”
그 방법이 고귀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냥만 하면 되었다.
원작 속 주인공과는 마인드가 달라졌다.
‘나는 네놈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들었고.
첫 만남에서부터 그랬다.
심지어 네놈은 내 주인님의 방에서 걸어 나왔지. 그것도 야심한 밤에.’
그게 툰드라의 분노를 자극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르미는 은근한 오기가 생겼다.
‘비올라 공녀는 그렇다 치고.’
저 눈빛.
결투를 하러 나온 무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이쪽을 어떻게든 씹어 먹겠다는 강렬한 눈빛이 느껴졌다.
그러자 약간의 오기가 생겼다.
‘비올라 공녀를 독점하고 싶은 반려견의 소유욕이라.’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그냥 비올라 공녀랑 친해지고 싶어서였는데.”
여자로 보인다거나 그런 개념은 아니었다.
여자로 보기에 비올라는 너무 어렸다.
애초에 제르미는 여자에 관심도 없었고, 제르미가 보기에 비올라는 재미있으면서 신기한 공녀였고,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나도 오기가 생기잖아.’
비올라에게 저토록 집착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꼴사납다고 느껴졌다.
저 혼자만 비올라와 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만 친해질 수 있는 거 아닌데 말이야.’
그 속마음을 읽었는지, 툰드라가 말했다.
“네 눈빛. 마음에 드네.”
“아무래도 나 진심으로 싸워야겠어. 오기가 좀 생겼거든.”
“무슨 오기?”
“그냥. 그런 게 있어.”
둘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