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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65화 (65/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5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제논이 싱긋 웃었다.

착한 표정과 따뜻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제르미 공자의 뒷조사를 좀하려고 하거든요.”

“……음?”

매사에 긍정적이고 별생각 없는 제 르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킥킥 웃고 말았다.

“제 뒷조사요?”

“네.”

제논이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제 르미를 바라보았다.

제르미도 하하 웃으면서 제논을 마주 보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 그러니까 제 뒷조사를 말하는 거죠? 다른 사람 아니고 저.”

“네. 제르미 공자의 뒷조사를 좀하려고요.”

“이렇게 대놓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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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을 좀 받고 싶어서요.”

“제가 허락 안 하면 뒷조사 안 할 건가요?”

“그래도 하죠.”

“그럼 왜 물어봤어요?”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다르잖아요. 허락받는 거랑 허락받지 않는 거랑.”

제르미는 잠시 두 눈을 깜빡였다.

제르미에게도 제논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인 듯했다.

제논의 성격에 제법 익숙한 비올라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근데 왜 뒷조사를 하겠다는 거지?’

제르미의 성격상 그냥 오케이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제논이 굳이 제르미의 뒷조사를 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없었다.

“제 뒷조사를 허락하는 대신 조건을 하나 걸죠.”

“무슨 조건인가요?”

“말 놓을게요.”

제르미가 히히 웃었다.

비올라는 저 웃음이 약간 얄미웠다.

반말 못 하다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뭐만 하면 말을 놓는단다.

대놓고 뒷조사를 하겠다는 제논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말 놓겠다는 제르미나.

‘둘 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제정신이 아닌 인물들이 세상천지에 널려 있다.

“근데 내 뒷조사는 왜 하는 거야?”

“음.”

제논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거짓이란 없었다.

“헤론 공작님이 명령을 내렸거든요.”

“겨울성의 군주께서?”

“네. 서면을 통해 직접 명령하셨어요.”

“왜?”

“글쎄요. 명령을 받은 입장에서 왜라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짐작 가는 부분이 있을 거 아냐.”

비올라도 제논의 말에 집중했다.

헤론이 갑자기 왜 제르미의 뒷조사를 시킨단 말인가.

원작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었다.

설정집의 내용까지 떠올려 봤지만 헤론이 제르미의 뒷조사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비올라는 많은 것을 바꿔왔고, 그로 인한 나비 효과를 배제할 수 없었다.

비올라는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겨울성과 폭풍 요새 사이에 어떤 정치적인 이슈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제르미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역시 헤론 공작님도 어쩔 수 없는 아빠네.’

비올라처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르미는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곧 사교계에 입문할 딸에게 접근하는,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니는 미공자 제르미.’

제르미는 자신을 둘러싼 온갖 소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제일 황당한 소문은 이미 스물네 명의 아내를 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허황되기 짝이 없는 소문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소문조차 믿기도 했다.

‘그런 내가 딸 옆에 둘러붙었으니.

그러니 뒷조사를 하라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제르미가 말했다.

“근데 이렇게 대놓고 해도 돼?”

“비밀로 하라는 명령은 못 받아서요.”

“그래도 보통 비밀 아니야?”

“비밀을 요하는 임무 같은 경우는 비밀 임무라는 표식이 붙어서 전달됩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는 말은 굳이 비밀을 요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제르미가 후후 웃었다.

그러니까 명분은 뒷조사인데.

뒷조사라고 쓰고 경고라고 읽는 편이 나은 것 같았다.

딸을 가진 아버지의, 딸에게 접근하는 시커먼 마수를 향해 내뱉는 경고,

‘대놓고 지켜볼 테니 알아서 몸을 사려라, 뭐 이런 뜻인가요?’

제르미는 점점 더 재미있다고 느꼈다.

툰드라 때문에 이미 한 번 오기가 생겼었다.

‘툰드라야 그렇다 치는데.

툰드라의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했다.

툰드라를 거두어 여태까지 도와주었으며, 툰드라가 무려 반려견을 자처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툰드라가 비올라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헤론 공작님까지?’

점점 더 오기가 생겼다.

왜 자기들끼리만 비올라랑 친하려고 하지?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지?

그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해, 재미있어.’

아주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많이 친해지고 싶어지네. 점점.”

비올라는 괜스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목적지인 ‘붉은 나무 숲’에 도착할 때까지 비올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왜 그럴까.

무슨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얽혀 있는 걸까.

하얀 벨라투로서 나는 어떤 입장과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걸까.

‘역시 소설 속에 없는 내용을 풀어가는 건 머리 아파.’

어쨌든 붉은 나무 숲에 도착했다.

나무줄기가 붉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바로 ‘붉은 나무 숲’이었다.

“여기서 우리 1차 탐사대가 실종되었거든. 실종된 위치는 이쪽이야.”

제르미가 지도의 한 곳을 짚더니 앞장서서 움직였다.

두 시간쯤 걸었을 때, 제르미가 다시 한번 지도의 위치를 짚었다.

“2차 탐사대가 여기서 실종되었어.

그리고 3차 탐사대가 이곳에 유적지가 있을 거라는 보고를 올렸지.”

유적지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은 탐사대의 역할이다.

그 유적지를 활성화시키고 안을 제대로 탐사하는 것은 ‘힘을 가진 자들의 책임이자 의무였다.

“아주아주 좋은 게 나오면 좋겠다.”

소설 속 설정에 따르면 ‘황금 마도 문명’이라 불리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

현재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지는 이 ‘황금 마도 문명의 잔재이며, 이곳에서 수많은 마법서와 역사서 그리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마도 물품과 지식들이 발굴되었다.

“이왕이면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거면 좋겠어. 비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황금 마도 문명의 물건들은 대부분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그중 일부는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힘이 있는 자들.

그러니까 무인(武人)이나 마법사들은 유적지를 제대로 탐사하여 그 문명을 세상 밖으로 끌고 나와야 했다.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근데 나는 여기서 뭐가 나오는지 알잖아.”

수호령과 계약할 수 있는 특별한 마법진이 생성된다.

정령과의 친화도가 낮아도 정령과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별한 공간.

‘그러려면 일단 삼지창 형태의 나무를 찾아야 하는데.’

비올라는 이곳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함정이 있는지, 어떻게 정령과 계약을 하게 되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다.

‘일단은 가만히 있자.

대외적으로 비올라는 이곳에 처음 온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이상한 일이었다.

숲속에 들어온 지 여섯 시간이 흘렀다.

숲속의 밤은 굉장히 빨리 찾아왔다.

‘벌써 어두워졌네.’

화르륵!

제논이 모닥불을 피웠다.

“이 근방에 위험한 마물은 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 혹시 모르니 제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위험한 마물이 없는데 탐사대가 왜 두 번이나 실종됐겠어?”

비올라가 핵심을 짚었다.

“네 기준에서 위험한 마물을 분류하지 말고, 마나가 없는 일반 백성들 기준에서 위험한 마물을 분류해.”

“그렇다면 이곳은 아주 위험한 숲입니다, 공녀님.”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제논이 빙그레 웃었다.

‘저를 시험하시는군요.

벨라투의 집사라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위험하지 않은 상황이고 연습이어도 실전처럼 해야 한다.

비올라 벨라투는 지금 그런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었다.

긴장 늦추지 말고 실전처럼 하라고.

위험하지 않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진솔한 경고였다.

‘역시 우리 공녀님!’

비올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기준 좀 제대로 잡아주라.

네 기준에서 안 위험한 거는, 내기준에서는 위험하거든요.

‘아무튼.…… 최선을 다해 불침번을 서기는 하겠네.”

사실 비올라는 이 어두운 숲속이 무서웠다.

소설 속 표현에 따르면 희미한 귀곡성이 들리는 숲이라고 했다.

유령형 마물들이 종종 출몰하여 붉은 나무 숲에 들어온 탐험가들을 홀리기도 한다고 했다.

‘제논이 진지하게 불침번을 서주면 안전할 거야.’

휘잉—

어디선가 불길한 바람이 불어왔다.

히이이이~

귀곡성도 들려왔다.

바람결에 파묻힌 귀신의 소리가 비올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으. 잠을 못 자겠어.’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바닥은 왜 이렇게 축축한 건지.

일정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이 마법 텐트 안이 괜스레 축축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이 되었다.

불길한 느낌의 바람도 없어졌고 귀곡성도 사라졌다.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주변을 밝혔다.

‘안 되겠다.’

소설 속에서 제르미는 꽤 오랜 시간 이곳을 헤맸다고 나와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며칠 뒤 우연히’라는 설명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며칠도 더 있기 싫어.

집의 따뜻한 침대와 맛좋은 음식들이 떠올랐다.

아. 에그타르트 먹고 싶다.

벌꿀을 뿌린 팬 케이크도 먹고 싶다.

자글자글한 얼음을 띄운 딸기 에이 드도 먹고 싶다.

아니야. 오늘은 왠지 딸기 쉐이크가 더 땡겨.

“언제까지 헤맬 거야?”

“오늘이 겨우 2일 차인데?”

“이상한 걸 아직도 모르겠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제르미는 무인이지 전문 탐험가가 아니니까.

탐험가들도 두 번이나 실종되었다.

‘생각해 보니 되게 비합리적인 시스템이네.’

일반 탐사대가 먼저 유적지가 있을 곳을 탐사하고, 그에 대한 보고를 올린다.

그러면 힘을 가진 귀족 계급이 재방문하여 유적을 탐사한다.

‘아무튼 비합리적이라니까. 탐험가랑 그냥 같이 오면 훨씬 편할 텐데.’

그것에 대한 이유와 개연성이 존재하기는 했다.

귀족이 함께 있을 때 일반 백성이 죽거나 다치면, 그 책임은 오로지 귀족에게 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힘 있는 자’의 책무가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탐험을 먼저 시키고, 귀족들끼리 따로 움직인다.

‘안 되겠어. 내 안전 보장과 행복한 노후를 위해 이 설정도 손을 좀 봐야겠어.”

훗날, 사회 개혁가 중 한 명인 루카스가 나타나 사회를 변화시킨다.

탐험가 중 실력 있는 탐험가들에게 귀족 계급을 부여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지금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비올라가 단도를 꺼내 들어 나무줄기를 살짝 그어보았다.

“이 단도는 겨울성 공방에서 나온 특상품이야.”

“그래 보이네.”

“어지간한 나무는 닿는 순간 흠집이 났겠지.”

그런데 흠집이 나지 않았다.

“붉은 나무는 이렇게 단단해. 그래서 한때 마법 방어구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어.”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화공(火攻)에 너무 취약하거든.

마법 문명이 발달하면서 불 계열 마법도 함께 발전했고, 붉은 나무로 만든 방어구는 불 마법에 너무 취약했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어.”

비올라가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저 나무 끝을 봐.”

제르미가 고개를 꺾어 나무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들이 이상하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네. 인위적으로 깎여 있는 모양이야. 이 단단한 나무를.”

나뭇가지 중 일부가 삼지창 형태로 생겼다.

붉은 나무의 특성이라고 보기에는, 몇몇 나무만 그렇게 생겼다.

누군가가 조각을 한 것처럼.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저렇게 만든 거잖아. 일일이 말을 해줘야 알겠어?”

비올라가 뚜벅뚜벅 걸어가 나무에 손을 댔다.

그런데 그때, 비올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비올라의 머릿속에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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