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6화
[너. 정체가 뭐야?]
비올라는 순간 깜짝 놀랐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령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정령인가?’
정령들이 말을 할 때 이런 느낌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말을 건 상대는 아무래도 정령인 것 같았다.
“비올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제르미는 나뭇가지 끝이 삼지창 모양으로 갈라진 붉은 나무 앞에 섰다.
“그러니까 요 녀석이 수상하다는 거지?”
“그래.”
여기까지 힌트를 줬으니 이제는 알아서 하겠지.
비올라는 그냥 지켜봤다.
사실 이다음은 잘 모른다. 소설 속에서는 제르미가 우연히 이 이상한 나무를 찾았고, 나무를 통해 유적지에 들어갔다고 쓰여 있었다.
“흠.”
그사이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체가 뭐냐니까?]
[대답해.]
비올라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지.
말을 하면 혼잣말처럼 보일 텐데.
‘소설 속에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유적지 속으로 들어가면 정령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붉은 나무 숲에서 정령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제르미가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유적지 안에 들어가고 난 이후였다.
정령이 왜 여기서 나온 건지 알수가 없었다.
[내 목소리 들리는 거 다 알아.]
[너처럼 정령 친화도가 높은 사람은 본 적이 없는걸.]
설마….’
비올라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챌수 있었다.
‘정령 친화도가 엄청 높아서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작품에는 정령 친화도라는 설정이 존재한다.
이것은 타고나는 것으로서 정령과의 계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설정되어 있었다.
비올라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왜?’
작품 속 비올라에게는 정령 친화도가 없었다.
벨라투가의 지배자로 성장하는 위대한 벨라투였지만 정령술사와는 거리가 아주 먼 캐릭터였다.
‘왜 정령 친화도가 높지?’
비올라는 이 작품의 찐독자로서 한가지 사실을 유추해 냈다.
‘내가 빙의를 해서 그런 것 같아.’
설정상 정령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다.
그 존재들은 계약자와의 계약을 통해 힘을 발휘하고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되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계약을 통해 정령문을 열었다’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다른 세상에서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려면 정령 문을 열어야 해.’
그게 이 소설의 설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법칙에 따라 한아린은 정령 문을 넘어 비올라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도 정령 문을 넘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령 친화도가 엄청 높은 캐릭터가 된 거야.’
그때 제르미가 말했다.
“역시 이 나무가 수상해.”
그리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특별한 마나 마법 술식이 새겨져 있어. 이 마법 술식은 게르만토 제 3공식에 의거한 환영 마법 술식인데….”
이 시대의 무인들은 늘 마법사와의 전투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마법을 익히지는 못해도 마법사들의 이론이나 연구에 대해서는 꽤 박식한 편이었다.
그건 제르미도 마찬가지였다.
제르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마법은 정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정령의 도움 없이는 이 가벼운 환영 마법을 깨지 못해. 마법 술식을 역산하여 깨뜨리지 않는 한 말이야.”
교과서에는 그렇게 나와 있었다.
가벼운 환영 마법이지만 이 환영마법을 깨려면 정령의 도움이 있거나 마법을 인지한 뒤, 그 마법을 해체하는 수순을 밟아야만 했다.
“근데 비올라 너는 그냥 봤잖아.”
비올라가 본질을 꿰뚫어 보니 환영마법이 저절로 해제되었다.
비올라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령 친화도가 엄청 높아서 그래.”
비올라는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제르미와 함께 갈 곳은 정령 친화도가 없는 사람조차도 정령과의 계약을 이루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그런데 애초에 정령 친화도가 아주 높은 사람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려나?’
어쩌면 소설 속에서 언급만 되는 정령 왕같이 어마어마한 존재와 계약을 맺는다거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수호 정령으로 정령 왕이 나타나 준다면 최고일 텐데.
“내 정령 친화도가 생각보다 높은가 봐.”
“신기하네. 정령들과 벨라투의 피는 상성이…… 아.”
제르미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비올라 벨라투는 벨라투의 피를 잇지 않았다.
누구보다 벨라투스러운 벨라투라서 잠깐 잊고 있었다.
‘비올라는 입양 딸이었지.’
그 단순한 사실을 아예 잊고 있었다.
‘그러면 말이 되네.”
지극히 벨라투스러운 벨라투가 정령 친화도마저 높다니..
제르미 입장에서는 굉장히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재미있는 애야.’
역시 친해지고 싶다.
비올라랑 친해지면 신나고 즐거운 일이 가득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제르미가 붉은 나무에 손을 대었다.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해 보면 뭔가 달라질 거 같은데.”
***
비올라는 어지러웠다.
속이 메스꺼웠지만 참았다.
제르미도 속이 안 좋은 건 매한가지인 듯했다.
“우와. 이렇게 속이 안 좋은 이동게이트는 처음이야.”
붉은 나무가 이동 게이트였다.
그곳을 통해 어둡고 습한 동굴 같은 곳으로 이동되었다.
붉은 나무를 매개체로 하여 유적지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호호호호.]
[낄낄낄.]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 너도 들려?”
“어. 들려.”
제르미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서 귀곡성이 들렸던 건 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 소리 같네.”
“그러게.”
이 웃음소리들이 붉은 나무 숲으로 새어 나가면서 이상한 소리를 냈었던 것 같다.
“실종된 탐험가들은 여기까지 들어왔었을까?”
“그랬던 것 같아.”
비올라가 땅을 내려다보았다.
흙과 진흙 중간쯤의 질퍽질퍽한 바닥이 보였다.
“발자국들이 있어.”
“그렇네.”
제르미는 혼자서 피식 웃었다.
제르미는 비올라가 굉장히 신기했다.
‘살성을 가진 아이가 검은 벨라투를 마다하고 하얀 벨라투를 자처했다더니.’
이런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이동 게이트를 순식간에 찾아주고, 땅바닥의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았다.
[나를 찾을 수 있겠어?]
[나를 찾아봐.]
[기다릴게.]
여기저기서 작은 불덩이들이 날아 다녔다.
커다란 반딧불이 같았다.
불덩이들이 날아다닐 때마다 주변이 잠깐씩 밝아졌다.
“기다란 통로가 있어. 가볼래, 비올라?”
“그래.”
비올라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어둡고 기다란 통로를 지나가면서 제르미는 저도 모르게 정령들의 환상에 걸려들었다.」
소설 속 진행에 따르면 제르미는 정령들의 환상에 빠져들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령들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일부러 해치려고 해친다기보다는 장난을 치다가 죽이는 경우가 존재했다.
장난치려고 건 환상 마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었다.
「제르미는 일주일 동안이나 환상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환상에 빠져 일주일을 헤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탈수로 죽었을만한 사건이었다.
다만 제르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일주일 동안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심각한 탈수와 배고픔에 제르미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제르미다운 상황이었다.
탈수와 배고픔 때문에 정령들의 환상 마법을 깨고 나오다니.
‘배고프지 않았다면 환상 마법에 잡아먹혀 죽었겠지?”
정령들은 아마 왜 죽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령들은 물을 마시지 않고 밥을 먹지도 않으니까.
그야말로 장난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셈이었다.
정령들의 목소리가 안
근데…
들리네.”
저벅저벅.
비올라와 제르미는 계속 걸었다.
걸어 들어갈수록 통로가 비좁고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따금 불을 밝히는 저 반딧불이 같은 것의 개수도 줄었다.
“비올라. 손 줘.”
“손?”
“응. 너무 어두우니까. 손잡고 가자.”
비올라도 그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제르미가 손을 잡았다.
‘손이…… 생각보다 크네.”
열두 살 비올라의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열일곱 살 제르미의 손이 생각보다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제르미. 이동 게이트에 정령들의 환상 마법이 걸려 있던 거, 기억하지?”
“기억해.”
“그러면 이곳의 정령들이 또 다른 환상 마법으로 장난을 쳐놨을 확률이 높아.”
“알겠어. 조심할게.”
여기까지 했으면 됐겠지.
이 정도면 말해주면 이제 제르미가 알아서 잘해줄 것이다.
약간 안심한 비올라는 제르미의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어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
“아니. 안 들려.”
거기까지 말한 비올라는 순간 움찔했다.
갑자기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남자 목소리. 여자 목소리. 어른 목소리. 아이 목소리. 온갖 목소리가 뒤범벅되어 말을 걸어왔다.
[여기는 왜 왔어?]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네 진짜 이름이 뭐야?]
비올라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진짜 이름.
비올라의 진짜 이름은 한아린이었다.
목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한국이 뭐야?]
[한아린이 뭐야?]
비올라는 순간 두려웠다.
내면의 모든 것을 다 읽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세계는 판타지 세계관이고 마녀사냥 같은 끔찍한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한국이니.
한아린이니.
다른 세계에서 왔다느니..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
벨라투가의 명예와 위신을 더럽힌 죄로 참수당할 거다.
그 두려운 마음을 읽었는지, 목소리들이 또 말했다.
[그래. 목이 잘릴 수도 있어.]
[여긴 왜 온 거야?]
비올라는 대답하려고 했다.
조용히 좀 하라고.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이…… 안 나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목구멍에 아주 커다란 가시가 걸려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거대한 바윗덩이가 목과 가슴을 동시에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준이 뭐야?]
[네 개가 강한준이야?]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준은 어디 있어?]
웃음소리가 짙어졌다.
[우와! 자동차 사고가 뭐야?]
[응급실이 뭐야?]
***
비올라가 처음 몸을 움찔 떨었을때.
제르미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손잡아서 긴장했을 리는 없고’비올라라면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이유일 텐데.
‘음. 내가 아는 척하면 민망하겠지?’
처음에는 모른 척했다.
그런데 비올라의 손에서 땀이 줄줄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올라?’
어두웠다.
반딧불이 같은 불덩이도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제논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올라의 손을 안 잡고 있었다.
면….’
그랬다면 비올라의 기척도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손을 잡고 있어서 다행이야.’
비올라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제르미는 한참 동안 고민해야 했다.
‘비올라가 이상해.’
그렇지만 비올라라면 도움을 필요로 할까?
내가 돕는 것이 비올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근데….’
이상하게 걱정이 됐다.
비올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이 문득 두려웠다.
신기한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은 아득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평소의 제르미는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감정이었다.
“비올라. 괜찮아?”
비올라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딘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데.’
손을 꽉 잡아보고 어깨를 흔들어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불안감이 그 크기를 한층 더해갔다.
“왜 그래?”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비올라!”
그 순간, 제르미에게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