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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67화 (67/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67화와락.

비올라가 제르미를 껴안았다.

제르미의 품속에 안긴 비올라는 흐느끼고 있었다.

“…지 마.”

“뭐라고?”

순간, 제르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죽지 말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올라가 저런 말을 하니 소름이 끼쳤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붙이가 날아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지 마.”

“응?”

“이대로 죽어버리면 평생 동안 원망할 줄 알아.”

제르미는 비올라가 다른 누군가에 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직감했다.

‘환상?’

비올라는 아무래도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환상 속에서 소중한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는 듯했다.

‘비올라에게 소중했던 사람이 죽었나?’

오늘따라 유독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 누구보다 강인해 보였던 육체가 부서질 것처럼 약하게 느껴졌다.

“죽지 말라고, 제발. 눈 좀 떠.”

“돈가스 사달라고 조르지 않을게.

귀찮게 안 할게. 그냥, 그냥 눈만 좀 떠, 제발.”

제르미는 비올라가 환상에 빠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령 친화도가 어마어마하게 높다.

보니 정령들이 보여주는 환상에 취약한 것 같았다.

‘벨라투의 피를 이었다면 정령들의 장난에 당하지 않을 텐데.’

정령 친화도가 높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괜찮아, 비올라. 나 안 죽었어.”

제르미는 비올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비올라라면 분명 저 환상을 부수고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토닥여 주는 거밖에 없어.”

의외이기는 했다.

비올라의 약한 모습. 비올라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누구를 저토록 그리워하는 걸까?”

환상 속 상대가 누구길래, 비올라가 저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그 대단한 비올라가 말이다.

제르미의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빈민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었지?’

아마도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공작이 처음 발견했을 때, 유리 조각으로 노예 상인을 찔러 죽였다고 했었다.

‘버림받은 게 아니라…….’

비올라의 흐느낌을 들어보면, 버림받은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죽지 마.’

‘이대로 죽어버리면 평생 동안 원망할 줄 알아.’

그러면 환상 속 상대는 부모님일확률이 매우 높았다.

제르미는 확신했다.

‘비올라는 지금 엄마나 아빠를 보고 있는 거야.

가슴이 무척 아파왔다.

***

일곱 살의 제르미는 한 소녀를 짝사랑했었다.

소녀를 만나기 위해 매일 저녁 스본 사거리로 나섰다.

소녀는 스본 사거리에서 구걸과 동냥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불행히도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쨍그랑.

구걸 통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감사합니다.”

“5달리아야.”

“고맙습니다.”

“내가 용돈 모아서 주는 거야.”

제르미는 매일 소녀를 찾았다.

용돈을 모아서 준다고 생색을 잔뜩냈다.

소녀는 그때마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허리를 숙였다.

6개월이 흘렀다.

“고맙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은 못해?”

“그게….”

제르미는 늘 불만이었다.

소녀에게서 다른 말도 들어보고 싶은데, 매일매일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제르미는 그제야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제르미야.”

이때 제르미는 굉장히 떨렸다.

그냥 이름을 알려주는 것뿐인데도 설레고 가슴 벅찼다.

“근데 너는 엄마 아빠가 없어?”

“없어.”

“왜?”

“버렸어.”

그때, 제르미는 처음 알았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있구나.

버림받은 자식도 있구나.

‘마음이 아파..

다시 6개월이 흘렀다.

소녀의 이름은 므엘란이었고 나이는 동갑이었다.

제르미와 만난 지 1년쯤 되었을때. 므엘란이 물었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그야….”

그야 좋아하니까!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여덟 살의 제르미는 자기가 왜 므엘란에게 잘해주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 그야 친구니까.”

친구라는 말에 므엘란이 밝게 웃었다.

1년 만에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친구. 듣기 좋은 말이네.”

“그, 그렇지?”

“그럼 나한테 적선하는 건 이제 그만둬.”

여덟 살이 된 므엘란은 구두를 닦는 일을 배웠고, 생활비 정도는 벌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은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 므엘란과 제르미는 처음으로 다투었다.

제르미는 내가 내 돈 주겠다는데 왜 싫다고 하냐고 신경질을 냈고, 므엘란은 나는 이제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날 밤.

폭신한 침대에 누운 제르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짜증 나.”

아무리 생각해도 뭘 잘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유모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짜증 나는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픈 거랍니다, 도련님.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흘러도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자장가처럼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가 계속 거슬리기만 했다.

‘내일은 사과해야지.’

해가 밝아오면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르미에게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므엘란이 슬퍼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제르미는 스본 사거리로 나섰다.

‘므엘란이 왜 없지?”

매일같이 나와 구두를 닦던 므엘란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제르미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제르미는 므엘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강도 무리가 스본 뒷거리의 빈민가를 습격했다고 했다.

그 일로 폭풍 요새의 경비병들은 크게 문책을 받았고, 황급히 조사단을 꾸리기도 했다.

폭풍 검 재칼도 크게 노했다.

‘강도단을 추적한다.

그들은 강도임과 동시에 노예 상인 이기도 했다.

그제야 제르미는 알 수 있었다.

므엘란이 노예 상인에게 잡혀갔다는 사실을.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아버지!”

제르미는 자신도 추적에 합류하겠다며 울부짖었으나 재칼 경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홉 살밖에 안 된 제르미에게는 위험하다는 것이 대외적인 이유였고, 제르미에게서 지나치게 강한 살 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진정하고 생각의 방에 들어가 있거라.’

‘이 일은 어른들의 일이다.

제르미는 3일 동안 독방에 갇혔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제르미는 므엘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므엘란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제르미는 7일 동안 독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모와의 대화가 제르미를 다시 일으켰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므엘란이 있어요.”

“무슨 소리야? 므엘란은 한 명이잖아.”

“폭풍 요새처럼 치안이 좋은 곳에서도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져요.

이 세상에는 비슷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죠.”

제2의 므엘란, 제3의 므엘란, 제4의 므엘란.

이 세상에는 므엘란이 많았다.

“도련님은 힘을 가지셨잖아요.”

폭풍 검 재칼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벌써 뛰어난 무인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제르미를 소폭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힘을 가진 자는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요. 그리고 그 힘을 약한 자를 위해 써야 해요.”

“왜?”

그것이 옳은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니까요.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도련님은 가슴이 아팠죠?”

“……응.”

“많은 사람이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면 어떨 것 같아요?”

“슬플 것 같아.”

“그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 그것이 귀족의 의무랍니다.”

제르미는 확실히 느꼈다.

므엘란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또 다른 므엘란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1년이 흘렀을 때.

제르미는 므엘란의 유골이 묻힌 무덤 앞에서 검을 들고 다짐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날 이후로 제르미는 노예 상인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노예 상인을 발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였다.

명성이 점점 높아져 제르미는 ‘소폭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제르미는 품에 안긴 비올라를 보며 옛날을 회상했다.

제르미는 노예 상인과 ‘아이를 버린 부모’를 용서하지 않았다.

반대로, 버림받은 아이를 돕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므엘란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다해야 할 책무라고 생각했다.

비올라의 말이 귓가에 계속 아른거렸다.

‘죽지 마.”

‘이대로 죽어버리면 평생 동안 원망할 줄 알아.’

비올라의 화려하고 밝은 면만 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가에 입양된 행운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마냥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입양되기 전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일곱 살의 어린 몸으로 노예 상인을 찔러 죽였다는 사실이 부각되어 그 이면의 것들을 보지 못했다.

왜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빈민가를 홀로 전전하고 있었는지.

왜 그녀가 스스로 유리 조각을 들어야만 했는지.

‘지켜줄 사람이 없었겠지.’

므엘란과 똑같았다.

둘에게는 모두 보호자가 없었다.

아무도 둘을 지켜주지 못했다.

만약 지켜줄 사람이 있었다면, 므엘란은 지금도 살아 있을지 모른다.

‘비올라도 마찬가지였어.”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므엘란은 노예 상인에게 잡혀갔고, 비올라는 노예 상인을 직접 죽였다는 것이었다.

‘비올라에게도 어른이 있었다면.

유리 조각을 쥐지 않아도 되었을 거 야’제르미가 말했다.

“괜찮아.”

“.…가지 말라고.”

“괜찮아, 비올라. 내가 지켜줄게.”

비올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조금 더 꽉 껴안았다.

비올라의 파르르 떨리는 몸을 꽉안아주었다.

“네가 보는 건 환상이야.”

비올라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 하얀 가운을 입고 분주히 뛰어다니는 의사들.

주황색 옷을 입은 구급대원들. 무어라 알 수 없는 용어들로 긴박하게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강한준.

그것들이 보였다.

춥고 무서웠다.

강한준이 이대로 떠나 버릴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체온이 느껴졌다.

‘따뜻해.’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꽉 자신을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 같은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비올라 벨라투가 된 이후로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포근함이었다.

“정령과의 친화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정령들의 환상에 속은 거야. 아무도 죽지 않았어. 괜찮아. 네 옆에 있어.”

제르미는 다짐했다.

비올라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부모를 잃고 빈민가에 버려져,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어린 비올라를 지켜주겠다고 다짐했다.

“이겨낼 수 있어, 비올라.”

너무 어두워서 비올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그렇지만 비올라와 눈을 마주쳤다.

어둠 사이로 비올라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느껴졌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가 유리 조각 들지 않아도 돼.

그때의 너는 부모님을 잃었고 빈민가에서 살아갔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는 이제 벨라투의 공녀가 되었고, 지금은 내가 옆에 있어.

“우린 친구잖아.”

비올라의 눈에 보이던 환상들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그만둬, 얘들아.]

[계속 장난치면 우리가 소멸될 거야.]

정령들에게는 장난인 환상이었다.

이 환상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는데 ‘인간의 진심 어린 염원과부딪치면 깨진다는 것이었다.

[저 애는 뭐야?]

[우리 몸이 다 부서지겠어.]

정령들은 더 이상 장난을 칠 수 없었다.

제르미의 진심과 염원이 정령들의 환상을 부쉈다.

어느새 비올라는 평안을 되찾았다.

새근새근.

비올라가 잠들어 버렸다.

제르미는 가만히 앉아서 비올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잘 자.”

환상은 깨진 것 같았다.

이제 일어나면 다시 비올라 벨라투가 되어 있을 거다.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어린 소녀가 아니라, 철혈 공녀 비올라가 되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아쉽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제르미는 잔뜩 긴장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비올라를 조심스레 벽에 눕히고 일어섰다.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한국이 뭐야?”

제르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 네가 강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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