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0화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악당 하이 디는 잔혹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제멋대로 날뛰다가 참다못한 수호 정령의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 “미안해, 하이디. 나는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수 없어.”
“너를 포기하는 대가로 나는 소멸하겠지만.」
어떻게든 하이디를 지켜주고 싶었던 켈베론은 결국 하이디를 포기하며 자신의 소멸을 택해 버린다.
「“내 이름은 켈베론, 위대한 정령 왕이 될 몸이시다!”
“내 이름은 하이디야.”
」
처음 하이디와 계약하게 된 켈베론은 언제나 하이디를 응원하고 지원해 주었다.
처음에는 하이디의 삶이 옳은 건 줄 알았다.
처음의 켈베론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생 정령이었으니까.
「 “하이디. 이런 게 정말 옳은 걸까?”
켈베론은 죽어가는 소년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 순간들이 모여 7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7년의 시간이 흐르고 켈베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삶은 켈베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정령으로 이름을 떨치게는 되었으나, 사실 그는 위대한 정령 왕이 되고 싶었던 거지, 무시무시한 정령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따뜻한 정령이고 싶은데.’」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위대한 정령 왕이 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정령 왕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조금 슬프네.」
7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예쁜 꽃에 물을 주고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는 것이었다.
사실 위대한 정령 왕이니 뭐니 떠들었던 것은 그 소박한 꿈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켈’의 성을 가진 정령은 그런 작은 소망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제 꿈을 꾸지 못하게 되었어.」
붉은 피의 정령 켈베론.
대륙에서는 켈베론을 그렇게 불렀다.
악마 하이디와 함께 다니는 악의 정령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 소멸을 담보로 계약을 파기하면서 하이디에게 말했다.
「“너를 원망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하이디는 웃으며 대답했다.
「“운명은 바뀌지 않아, 켈베론.”」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주 어두운 동굴 속.
그곳에서 하이디는 즐겁게 웃었다.
「“너는 피의 정령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거야. 그리고 피의 정령답게 잘 살아왔어. 자부심을 가져도 돼.”」
아니야.
난 자부심을 가진 적이 없어.
켈베론은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못했다.
내가 내 삶을 부정하면, 하이디의 삶도 부정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향은 조금 잘못되었을지 몰라도 하이디는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나는 그 삶을 부정할 수 없어.’」
비록 잘못되었지만, 하이디가 죽어가는 마당에 굳이 하이디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켈베론이 말했다.
「“고마워. 하이디를 만나서 즐거웠어”J켈베론은 따뜻한 물방울이 되어 소멸했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린 대가였다.
그래도 따뜻한 물방울이 되어, 하이디를 조금이라도 따스하게 덮어주었다.
그것이 켈베론의 마지막 배려였고 , 사랑이었다.
「“멍청한 정령 놈.”」
하이디는 벽에 등을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나약한 놈 따위와 계약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이디는 분노했다.
계약 정령 따위가 감히 계약을 먼저 파기하다니.
침을 퉤! 뱉었다. 침에는 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
「“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실 꽃밭을 일구고 싶다나 뭐라나.
그런 쓸데없는 꿈을 꾸는 정령과 계약하는 게 아니었다.
더 심지가 굳은 정령과 계약했어야 했다.
‘켈’의 성에 속은 게 잘못이었다.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했다. 켈베론.”」
낄낄대며 웃었다.
「“소멸된 걸 보니 꼴 좋구나.”」
하이디는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
비올라가 말했다.
“우리 집에 엄청 큰 마거리트 꽃밭이 있어.”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도와준다면 훨씬 더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생각해 봐.
켈의 성을 이은 물의 정령이 꽃에 물을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화단이 생길까?”
“나, 나는 위대한 정령 왕이 될 몸이다. 그런 소박한 얘기 따윈 나와 어울리지 않아.”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비올라는 턱을 매만졌다.
켈베론은 하이디 같은 악덕 정령술사조차도 소중하게 여겼다.
그것이 계약자에 대한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정령이다.
‘마지막에 진짜 불쌍했는데.”
생각해 보니 켈베론은 굉장히 불쌍한 정령이었다.
켈베론은 분명 좀 더 행복하게 살수 있었다.
‘하이디를 지키는 것보다는 나를 지키는 게 훨씬 좋을걸?’
문득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칼을 들고 실실 웃는 비첸이 떠올랐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군림하는 헤론도 떠올랐다.
20대의 나이로 벌써부터 세계관최강자에 근접한 메데이아도 떠올랐다.
켈베론에게 약간 미안해지기도 했다.
‘아닌가….’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너는 물방울에서 태어났겠지?”
“물론이지. 나는 위대한 물의 정령이니까.”
“물방울이니까 방울이.”
“..뭐?”
“아니다. 방울이는 강아지 이름 같으니까 퐁퐁이로 하자.”
“그게 뭔데?”
“뭐긴 뭐야, 네 이름이지.”
‘이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켈베론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애애애애애!”
계약자가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그것은 정령의 영혼에 각인된다.
그것이 정령의 계약이었다.
“네 이름이 뭐라고?”
“내 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싫다.
내 이름은 그 이름도 위대한 켈!
베론이다!
외치고 싶었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켈베론이다!‘를 외쳤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퐁퐁이다!”
켈베론은 울상을 지었다.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 들었다.
***
제르미는 제르미 나름대로 기연을 얻었다.
마법진의 영향 때문인지 일시적으로 정령 친화도가 굉장히 높아졌고, 덕분에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비올라. 네 덕분이야.”
“응?”
“네 덕분에 나도 정령과 계약했어.”
“정령의 이름이 뭔데?”
“켈-테르타스, 스톰이라는 이름을 붙여줬어.”
그 말에 퐁퐁이는 절규했다.
“그깟 바람 냄새 폴폴 날리는 놈에게 폭풍이 웬 말이냐!”
퐁퐁이는 억울했다.
내 이름은 퐁퐁이인데, 저놈은 스톰이라니.
“당장 나와라. 나와 승부를 가르자.
위대한 정령 왕의 후보로서!”
제르미가 가볍게 웃었다.
“스톰은 수줍음이 많아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대.”
제르미도 신기했다.
바람의 형태로 떠다니는 작은 요정이 보였다.
저 요정은 계약자인 제르미의 눈에만 보였다.
한편, 잠시 생각에 빠졌던 비올라가 물었다.
“켈 테르타스라고?”
“응. 왜?”
“아무것도 아냐.”
아닌데.
제르미가 계약한 정령은 ‘켈’의 성이 없었는데.
‘켈’의 성을 부여받지 않고 정령왕이 된, 거의 최초의 정령 왕이라는 설정을 봤었는데.
“네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높은 정령 친화도 덕택에 이곳으로 넘어왔나 봐.”
“그런 것 같네.”
“고마워.”
제르미가 비올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비올라랑 함께해야 즐겁네.”
생각지도 못했던 기연을 얻었다.
정령 친화도가 굉장히 뒤떨어지는 제르미가 무려 정령후와 계약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일반 정령과 계약해서 그 정령을 정령 왕까지 올려놓는 인물이 제르미 팔라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켈의 성을 가진 정령인 ‘정령후’와 계약을 해버렸다.
“비올라랑 함께하지 않았다면 난 이런 행운을 얻지 못했을 거야.”
씨익 웃고서 질문을 이어갔다.
“우리 약혼할래?”
“켁.”
비올라는 헛기침을 했다.
아니, 얘기가 왜 거기로 새냐.
“아니 2년만 지나면 너도 혼인할 수 있잖아. 정령후와 계약한 벨라투.
그리고 또 다른 정령후와 계약한 폭풍 검의 계승자. 둘이 혼인하면 얼마나 멋지겠어?”
“됐어.”
“왜?”
제르미 넌 나름 이 세계관의 영웅이고, 영웅들은 역경을 몰고 다닌다고,역경을 극복해야 영웅이니까.
난 그런 역경과 고난 같은 것에는 관심 없어.
그렇게 대답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던 사이, 제르미가 오묘하게 웃었다.
“아! 알겠다.”
뭘 알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왕이면 모르면 좋겠는데.
괜스레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비올라는 제르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네가 보기에 내가 아직 부족해서 그렇지?”
아뇨. 차고 넘칩니다.
“하긴. 메데이아 공녀를 가까이에서 본 것은 물론이고, 네 스스로의 능력이 이렇게나 출중한데 내가 아직은 눈에 차지 않을 수도 있어.”
제르미는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무려 정령후를 불러내서 계약시켜 준 장본인이다.
제르미는 절대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연이면 더 무서운 결과였다.
‘저 정도 잠재력과 통찰력. 하얀 벨라투로서의 뛰어난 능력이라면…… 내가 부족해 보일 수 있지.
암.’
제르미가 씨익 웃었다.
비올라가 너무 대단해서 격이 안맞는다면, 내가 더 대단해져서 격을 맞추면 된다.
그것이 제르미의 긍정 이론이었다.
“그럼 내가 훨씬 더 대단해져서 청혼하면 되겠다.”
왜인지.
저 말이 ‘더 어려운 역경과 고난을 극복할게! 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비올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제르미에게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판타지 세계에 빙의한 것이 다시금 실감되었다.
사교계에 입문하는 열두 살이 되면 여기저기서 혼약이 오간다.
귀족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기대해 줘. 훌륭한 기사가 될 테니까.”
안 그래도 영웅급 조연이었던 제르미가 깊게 다짐했다.
***
비올라는 퐁퐁이를 정령계로 돌려 보냈다.
인간과 계약한 정령은 언제든지 정령계로 돌아가 쉴 수 있었고, 필요할 때에 호출하면 되었다.
“나가는 길을 찾아야겠네.”
들어올 때는 퐁퐁이가 안내해 줬지만 나가는 길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이곳은 사방이 막힌 네모난 방.
출구를 찾아야 했다.
“제논의 기운을 찾아.”
“오. 그러면 되겠네.”
제논은 이곳에 함께 들어오지 못했다.
‘아마 일부러 우리랑 떨어졌겠지?’
어쩌면 어딘가에 숨어 이쪽을 훔쳐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논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이쪽 어디인 거 같은데.”
제르미는 벽면 한쪽을 더듬거렸다.
어느 순간, 벽면이 푹-저절로 꺼져 버렸다.
스르르릉~
벽면이 기하학적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넓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어두웠다.
그렇지만 군데군데 마법 횃불이 걸려 있어 시야를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 길이 출구 같은데.”
비올라도 제논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통로 끝에 제논이 느껴졌다.
‘이 몸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비올라의 육체는 이런 것도 가능했다.
역시 작가가 설정하는 게 장땡이다.
타고나는 게 최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앞쪽으로 걸었다.
제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만치 멀리 제논 씨가 있을 거 같기는 한데, 묘하게 이상하단 말이야.”
비올라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제르미의 말이 맞았다.
묘하게 이상했다.
‘ ‘이건… 살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 멀리서 살기가 느껴졌다.
반짝.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잠깐 반짝거렸다.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위험한데.’
음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끈적한 살기를 내포한 바람이었다.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제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로 가장 살떨리는 순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