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1화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제논의 오른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제르미도 검을 뽑아 들었다.
산 넘어 산이네. 집사가 환상에 걸릴 줄이야.”
“그러게.”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논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존재감을 뿜어낼 줄은 몰랐다.
이 공간 전체를 제논이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뾰족뾰족한 칼날의 공간이 된 것 같아.’
앞뒤 좌우.
어느 한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였다가는 날카로운 칼에 살이 베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 집사는 꽤 유능한데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제르미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검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는 인정사정없었다.
정말로 제논을 죽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아직 농익지 못하셨군요.”
스윽.
제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르미의 검을 옆으로 흘려 버렸다.
최소한의 힘을 사용하여 검로를 바꾸었다.
마치 물처럼 부드럽고 고요한 움직임이었으나 제르미는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나보다 몇 수는 더 뛰어나.’
단 한 번의 겨루기였지만 제르미는 제논과 자신의 현격한 실력 차를 깨달았다.
그때, 비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유능한 집사가 왜 환상에 걸렸지?”
저 정도로 강한 무인은 심지가 굳고 외부의 힘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심신 미약이나 알코올 중독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비올라가 말을 이었다.
“일부러 걸렸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네.”
비올라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제르미가 본 비올라는 이 상황에서도 굉장히 여유로웠다.
“날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걸린 거야?”
제논은 비올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비올라가 아닌 비올라 너머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환상을 보고 있는 듯했다.
제논은 평소의 따스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제가 죽이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외부의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상태인 것 같네.”
비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을 무는 개는 매로 다스려야지.”
물론 비올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올라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강아지를 어떻게 때린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곳은 판타지 세계이고, 그녀는 벨라투였다.
그에 걸맞은 화법과 태도가 중요했다.
“퐁퐁.”
비올라의 몸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몸이 하나의 정령 문이 되어 정령계의 정령을 소환해 냈다.
쏴아아~!
물보라가 일었다.
물보라가 걷히고 푸른 머리의 소년 퐁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 괴물 같은 건?”
“물 싸다귀.”
“응?”
“정신 차리게 만들어.”
순간, 제논의 몸이 사라졌다.
자세를 낮추고 비올라에게 달려들었다.
비올라의 눈은 그것을 발견했지만 크게 반응하지는 못했다.
‘너, 너무 빨라.
제논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비올라가 아닌 비올라의 수호령인 퐁퐁이가 반응했다.
퐁퐁이의 손이 물로 변해 제논의 손을 장갑처럼 감쌌다.
제논이 화들짝 놀라 단도를 회수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잔재주를 부리시는군요.”
제논이 마나를 일으켜 손을 감싸고 있는 물을 분해했다.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마치 믹서기 같았다. 그의 손을 감싸고 있던 물이 박살 나서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사이, 제르미가 폭풍 검을 운용했다.
“정신 차려요!”
어느새 제르미도 스톰을 소환한 상태였다.
정령후 스톰과 함께하자 제르미는 온몸이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훨씬 가벼워.’
가볍고 빨랐다.
‘정령의 도움에 너무 의지하면 안될 것 같네.’
이건 본인의 힘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검이 가볍고, 평소보다 움직임이 훨씬 가벼웠다.
폭풍 검은 패도를 지향하는 검이며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 대신 무겁고 둔탁하여 속도가 느린 검술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체력 소모가 심한 편이다.
“하압!”
그러나 바람의 정령은 폭풍 검의 단점들을 모조리 상쇄시켜 주었다.
푸욱!
제르미의 검이 제논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제논이 빠르게 반응하여 부상을 최소화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작은 부상은 아니었다.
“재미있어요.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꽤 뛰어난 무인이었습니다.”
제논의 눈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비올라는 기함했다.
‘저건…?’
비올라도 익히 알고 있었다.
‘살성?’
비올라도 살성을 타고났다고 했다.
그런데 제논도 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았다.
‘작품 속에서 저런 내용은 묘사된 적이 없는데?’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제논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여러분을 진정한 무인이라 생각하고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
비올라의 몸 여기저기에 가벼운 상처가 났다.
제논의 단도는 날카롭고 정교했다.
비올라는 그의 움직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비올라는 그저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이게 최선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게…… 제논의 진짜 실력.’ ‘
이 세계가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저건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유령 같았다.
‘ ‘제르미와 퐁퐁이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로 죽었을 거야.’
제르미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르미는 복부 쪽에 꽤 큰 부상을 입은 상태.
정령후의 도움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논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헉…… 헉…!”
제르미는 검을 거꾸로 쥐고서 억지로 일어섰다.
그는 폭풍 검의 계승자다.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폭풍 검의 계승자에게 ‘포기’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비올라의 여유로운 태도였다.
‘비올라는 하얀 벨라투야.’
비올라는 어느 순간에도 늘 벨라투였다.
벨라투다움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벨라투스럽게 진행했다.
지금의 비올라는 하얀 벨라투의 역할을 수행 중인 것 같았다.
‘ ‘단 한 차례도 물러서지 않았어.’
제르미가 본 비올라는 굳건했다.
가벼운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상태로 서 있었다.
하얀 벨라투 비올라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저토록 여유롭고 고고하게 서서 상황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이겠지.
‘비올라가 하얀 벨라투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나는 폭풍 검 계승자의 능력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그래야 서로 격이 맞지 않겠는가.
비올라의 존재가 있어, 제르미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최소한의 희망과 빛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에 ‘스톰’은 감동했다.
[멋있어.]
스톰 역시 ‘켈’의 성을 이은 정령이었다.
사실 스톰은 제르미가 탐탁지 않았다.
정령 친화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고, 결국 스톰 자신의 힘을 활용하는 것에 분명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었구나.]
그렇지만 이 정도 정신력이라면 뒤 떨어지는 정령 친화도라는 페널티를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정신력이 이렇게 굳건하고 강대할 줄 미처 몰랐다.
[미안해. 나도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열게.]
사실 스톰은 제르미가 여기서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러면 새로운 계약자와 계약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다.
이런 마음가짐과 굳센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함께해도 좋을 것 같았다.
후우웅~!
제르미의 몸을 둘러싼 기류가 더욱 강렬해졌다.
한편, 비올라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떡하지?’
제논을 환상으로부터 꺼내와야 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하얀 벨라투로서의 지능과 지력이 아니라 검은 벨라투로서의 무력이었다.
‘그건 무리.’
무력으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쯤 되니 비올라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시험치고는 너무 과한데.’
소설 속에서 제논은 자신의 살성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제논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그 비밀을 소설 초반부인 지금 공개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일부러 걸린 게 아니라…….
모골이 송연해졌다.
제논이 반쯤은 일부러 환상에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정말 정말 강력한 정령의 존재가 제논의 의식을 잡아먹은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상황이 말이 되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 공간은 정령 친화도가 낮은 제 르미조차 정령후와 계약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정령 친화도가 말도 안 되게 높은 비올라 자신이 있었다.
스톰만 정령 문을 통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미친 정령 왕 블러드라든가……….’
피에 미친 정령 왕.
속성도 알려져 있지 않고 계약자도 알려져 있지 않은 정령 왕이 하나 존재했다.
그저 인간을 살육하고 미치게 만드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잔혹한 정령왕이었다.
말하자면 블러드가 1세대 피의 정령 왕이었고 하이디와 계약한 정령(퐁퐁이)이 2세대 피의 정령 왕인 셈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꾸만 말이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논은 애초에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을 거야.”
아주 가볍게.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 블러드처럼 강력한 정령왕이 나타나서 제논의 의식을 잡아먹는다면?
‘그렇지 않고서야 제논을 이렇게까지 지배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제야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논은 어중간한 정령에게 의식을 내준 게 아니었다.
굉장히 강력한 정령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 정령력이야.’
어딘지 모르게 ‘살성’이 비올라 자신의 ‘살성’과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이제야 명확해졌다.
‘살성을 타고난 정령.”
블러드가 맞는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도 그렇게 표현되었다.
블러드는 살성(殺星)을 지니고 태어난 정령이라고.
그래서 정령들에게 배척당했고 홀로 외롭게 성장했다고 했다.
‘인간의 원혼을 잡아먹고 정령계를 망가뜨리는 게 블러드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진짜 블러드가 나타난 거라면 지금 시점의 제르미나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상대였다.
‘방법이…… 보이질 않아.”
비올라는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과 난관에 봉착했어도, 그래도 뚫고 갈 길이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이건 자연재해였다.
“말하자면 이건 자연재해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벨라투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아.
그러나 자연재해를 상대로 승리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단다.”
누군가가 걸어왔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제논의 존재감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토록 거대한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 여인은 이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메데이아 언니?’
벨라투의 1공녀.
메데이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동생. 다쳤네.”
메데이아의 존재감이 제논의 존재감을 완전히 밀어냈다.
메데이아가 비올라에게 가까이 걸어와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비올라의 피부 여기저기에 난 가벼운 상처들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녀가 따뜻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와달라고 말하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네 자연재해를 막아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