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73화 (73/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3화

“진정 그것을 원하신다면 저는 언니께 벌을 받겠어요. 제 두 팔을 가져가셔도 좋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메데이 아는 살기를 거두었다.

메데이아가 보기에 비올라는 여전히 작았다.

공작가에 입양된 이후로 영양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유년기 시절에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큰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비올라. 내게는 너 말고도 네 명의 동생이 더 있단다.”

갑자기요?

다 아는 사실을 갑자기 왜…… 비올라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나는 너 말고도 동생이 많으니, 한 명쯤은 팔이 없어도 괜찮겠지.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언니?

“나는 그 아이들의 모습들을 대부 분 다 기억해.”

그러시겠죠.

언니는 현 세대의 전무후무한 천재니까요.

“그 아이들의 열두 살이 어땠는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어.”

비올라의 걱정과는 달리 메데이아의 눈에 온기가 서렸다.

“그 아이들의 열두 살보다 네가 훨씬 작고 여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인으로서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

“그런 너를 보면 이상하리만치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비올라는 현대식으로 그 감정을 해석했다.

저 감정을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짠함’이다.

‘애정이 밑바탕 된 짠함 같은 건가….’

아무튼 비올라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메데이아의 이쁨을 받으면 받을수록 장밋빛 미래에 좀 더 가까워질 테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벌할 수가 없겠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감사해요 말고.”

네?”

“고마워요면 안 되겠니?”

“뜻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있습니다만 말고, ‘있는데요’는 어때?”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분명 후계 경쟁을 하는 경쟁자이지만, 그래도 가족이잖니? 나를 너무 상사처럼 대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

비올라는 제논을 용서했고 그제야 제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제논은 송구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다.

게다가 지금 겨우 마음을 돌려놓은 메데이아가 신경 쓰였다.

자꾸 메데이아 언니를 자극하지 마..

메데이아는 집사가 벨라투를 공격한 것이 처형까지도 가능한 중죄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 때문에 겨우 용서한 상태인데….’

그런 메데이아 앞에서 자꾸 ‘죄송하다’를 연발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자꾸 아까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꼴밖에 안 되지 않는가.

“한 번만 더 죄송하다고 말하면 혀를 잘라 버릴 줄 알아.”

“알겠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제논의 ‘죄송합니다’를 막아야 했다.

제논 앞에 섰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논은 비올라보다 한참 컸다.

비올라가 손을 높이 뻗어 제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시험한 거라고 말했잖아.”

“…….”

“너는 내가 내린 시험을 받은 거고, 내가 내린 시험을 통과한 건데, 왜 자꾸 죄송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할 뻔했다.

비올라가 몸을 돌렸다.

자연스레 몸을 돌리며 메데이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메데이아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번 용서를 한 사람에게는 뒤끝을 가지지 않는 캐릭터답네.

괜히 혼자서 마음 졸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메데이아는 평온한 상태였다.

비올라가 물었다.

“그런데 언니는 어쩐 일이세요?”

“근처에 오우거 떼가 출몰했거든.”

“오우거 떼요?”

오우거는 마물 중에서도 상급 마물로 분류되는 강력한 몬스터.

인간과 비슷한 형태인데 그 크기가 작게는 3m, 크게는 5m에 이르는 괴물들이다.

코끼리조차 맨손으로 찢어버릴 만큼 강력한 아귀힘과 근력. 그런 힘을 가지고 표범보다 날쌔게 움직이는 무서운 포식자였다.

“그럼 벨라투의 기사들과 함께 오신 건가요?”

“아니?”

메데이아가 빙그레 웃었다.

“고작 오우거 떼를 사냥하는 데 정예 기사들이 모두 올 필요는 없겠지.”

메데이아는 혼자서 서른여섯 마리의 오우거를 학살했다.

서른여섯 마리의 오우거는 호랑이 앞에 선 개처럼 도망쳤다고 했다.

“한 마리를 놓쳐서 돌아다니던 중 힉슨 아저씨를 만났어.”

“힉슨 경을요?”

“내가 놓친 오우거를 사냥하고 있더라.”

“힉슨 경이요?”

“아니.”

메데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메데이아는 재미있는 기억을 떠올렸다.

“네 개. 이름이 뭐였지?”

“툰드라요.”

“툰드라가 사냥하고 있더라.”

비올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우거는 일반적인 사람은 절대로 사냥할 수 없는 개체다.

코끼리보다 강한 근력과 표범보다 빠른 민첩함을 갖춘 강력한 마물이니까.

“만신창이가 되기는 했지만 결국 사냥에 성공했어.”

그 정도면 무려 메데이아의 십 대초중반과 비슷한 성취였다.

메데이아는 벨라투의 피를 이었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온갖 영약과 약으로 단련되었으며, 체계적인 검술을 익혀왔다.

그것도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벨라투 검식을 익히면서 말이다.

그런데 툰드라는 열두 살부터 검을 익히기 시작했고, 이제 검을 익힌지 겨우 5년밖에 안 됐다.

‘역시 남주.’

과연 남주다운 성장 속도였다.

‘버프 중 최고는 주인공 버프라더니.’

그 말이 정확한 것 같았다.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메데이아의 시선과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제법 나쁘지 않은 성장이네요.”

“그렇지?”

거기서 비올라는 기가 다 빨렸다.

메데이아는 정말로 그냥 ‘제법 나쁘지 않은 성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재 중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인 메데이아이기에 툰드라의 성장이 아주 놀랍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언니야말로 가주에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야.’

천재 중의 천재.

저런 사람이 벨라투를 이끌어야 하지 않겠는가.

비올라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메데이아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 중이었다.

‘제법 나쁘지 않은 성장?’

비올라의 생각과는 반대로, 메데이 아는 툰드라의 성장 속도에 진심으로 감탄하던 중이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단순히 타고난 재능만으로 천재라 불릴 수는 없다.

메데이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범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해왔다.

툰드라의 성장이 그저 재능만으로는 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올라는 하얀 벨라투로서 방향을 잡고, 그에 따라 성장하고 있어.”

하얀 벨라투이면서 검은 벨라투일수는 없다.

반대로 검은 벨라투이면서 하얀 벨라투일 수 없다.

천재인 메데이아이기에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다.

사람의 몸은 한 개니까.

어느 분야에서 정점을 찍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 ‘검은 벨라투로서의 성장은 반쯤 포기했을 텐데. 그러한 비올라가 보기에 제법 나쁘지 않은 성장이라니.’

도대체 이 아이의 눈높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잠재력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

보면 볼수록 똑똑하고 지혜로운 아이다.

검은 벨라투로서의 잠재력도 어마어마하다.

‘어쩌면 이 아이야말로…….’

벨라투에 가장 어울리는 아이가 아닐까?

벨라투의 이름을 이어가기에 가장 합당한 후계자가 아닐까?

‘마침 욕심과 야망도 있어 보이고.’

후계자가 되기에 욕심과 야망은 필수다.

메데이아에게 없는 것이 비올라에게는 있었다.

메데이아는 그렇게 오해했다.

어느덧 유적지에서 빠져나온 비올라 일행은 붉은 나무 숲을 걸었다.

붉은 나무 숲에서 빠져나와 세알자작령에서 휴식을 취한 뒤 겨울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제르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메데이아 경을 동경해 왔습니다.”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다소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다가 제논에게 물었다.

“혹시 펜을 좀 갖고 계십니까?”

“물론이죠.”

제논이 아공간에서 펜을 꺼내 제르미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제르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비올라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인 하나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누군가에게 사인을 해준 적이 없어요.”

비올라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언니가 제르미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물론 겉으로는 온화했다.

예의에 어긋난 부분도 없었다.

이건 그냥 사람으로서의 감이었다.

‘왜지?’

딱히 이유는 없을 텐데.

제르미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눈길 한번 안 주네.”

제르미는 사실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몇 번은 훔쳐볼 정도의 외모였다.

최소한 귀여워할 정도는 되었다.

‘언니 입장에서는 엄청 귀여운 아이돌 같은 느낌일 텐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소폭풍 제르미.

아마 메데이아 입장에서는 깜찍하고 귀여운 소년 같은 느낌일 터.

그런 소년이 자신을 동경한다며 수줍게 종이와 펜을 내밀고 있는데 왜 저렇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걸까?

“제 사인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원한다면 해드릴 수는 있어요.”

메데이아가 대검을 뽑았다.

재빠르게 휘둘렀다.

비올라는 순간 기겁했다.

‘헉!’

제르미마저도 눈을 질끈 감았다.

한바탕 바람이 일었다.

메데이아가 일으킨 검풍(劍風)이었다.

한 차례 돌개바람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제르미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펜으로 써준 사인이 아니라 검으로 새겨준 사인이 생겼다.

저 얇은 종이에 메데이아의 친필(?) 사인이 새겨졌다.

[메데이아 벨라투.]

그 이름이 필기체로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이름이 보였다.

[비올라의 큰언니.]

비올라는 황당했다.

보통은 사인을 크게 하고 그 밑에 서명을 작게 하지 않나?

대한민국도 그렇고, 이곳 〈벨라투의 그림자) 세계 속에서도 그렇다.

‘그중에서도…….’

‘비올라의’라는 글자가 가장 컸다.

마치 대놓고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걸 굳이, 다 아는 사실을 말로 또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비올라의 큰언니예요.”

“물론 알고 있지요.”

뭐가 어찌 됐든 제르미는 신이 난 것 같았다.

동경하던 사람으로부터 사인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벅차고 감동적인 듯했다.

“비올라는 착하고 순진한 아이랍니다.”

제르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비올라에게서 약간의 귀여움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착하고 순진하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앞으로 모든 행실을 바로 하시길.”

선배 무인으로서 후배 무인에게 해줄 수 있는 의례적인 조언이었다.

그러나 비올라는 저 조언이 그저 의례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메데이아라는 캐릭터는 남에게 함부로 조언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굳이 조언할 때면 진지함을 300스푼쯤 담아서 진심으로 조언하는 캐릭터인데.’

그렇다는 말은 메데이아는 지금 완전히 진심이라는 얘기였다.

‘혹시 제르미가 뭐 실수했나?’

사인해 달라는 게 기분이 나빴나?

자기를 동경하는 게 싫은가?

왜?

원작에서도 이랬던가?

“행실을 바로 해야 그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르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동경하는 상대를 만나 반쯤 미쳐버린 것 같기도 했다.

“물론입니다. 모든 행실에 앞서 두번 세 번 생각하고 조심하여 걸어가겠습니다.”

“비올라의 큰언니가 저라는 사실을 부디 잊지 않으시길.”

자작령에서 휴식을 취한 뒤, 비올라는 메데이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겨울성으로 돌아왔다.

겨울성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제논이 보고를 올렸다.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아버지가?”

“네.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셨습니다.”

후계자와 사적으로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캐릭터가 헤론이다.

그런데 또 사적으로 저녁 식사를 하자니?

‘또 왜?’

괜히 긴장되었다.

자꾸 만나면 흠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 작은 흠 때문에 인생사가 피곤해질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는 최애캐였지만, 현실이 되니 피하고 싶은 존재 1순위이기도 했다.

그래도 대답은 착실히 잘 했다.

“알았어.”

그날 저녁.

비올라는 헤론이 따로 식사하는 공작 전용 식당을 찾았다.

‘응?’

그곳에 헤론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