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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74화 (74/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4화헤론은 기다란 식탁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의외로군. 부인이 비올라와 함께 식사를 자처하다니.”

“순서가 틀렸어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비올라와의 식사를 청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의 오붓한 저녁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침 비올라가 함께하게 된 것이죠.”

“그렇군.”

헤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비올라 앞에서는 조금 더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세요. 서로의 이익을 위한 계약으로 묶인 관계라지만,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부부잖아요.”

“명심하겠소.”

“제가 비올라를 조금 다그칠지라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겠죠?”

“물론이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헤론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부인이 이런 걸 질문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이사벨라 공작 부인은 엄연히 이 공작가의 이인자이고, 누군가를 훈계하거나 다그칠 수 있다.

이사벨라는 공작가의 내정을 담당하며 각종 대소사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수행해 내고 있는 훌륭한 동료이자 동반자였다.

비올라가 아니라 메데이아라 할지라도 충분히 훈계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뜻이다.

‘나도 잘 알고 있고, 부인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헤론이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부인은 질문할 가치가 없는 것을 질문하는군.”

“제가 언제 질문할 가치가 없는 것을 질문한 적이 있던가요?”

헤론 공작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없소.”

“그럼에도 제 질문이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셨나요?”

“최초의 무가치한 질문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오.”

“그러도록 하지요.”

이윽고 비올라가 도착했다.

이사벨라가 먼저 말했다.

“늦었구나, 비올라.”

“약속 시각은 8시인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사벨라 공작 부인이 벽면에 걸린 마도 공학 시계를 살펴보았다.

0.1초의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명인의 작품.

시계는 정확히 7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가 늦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서 빨랐던 것 아닐까요?”

비올라는 사뿐사뿐 걸었다.

떨리는 속마음을 감추고 여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왜 이사벨라가 여기 있어?’

이사벨라는 보통 혼자서 밥을 먹는다.

아주 가끔 비첸과 함께 식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는 비첸에게 훈육이 필요할 때였다.

‘이사벨라가 특별히 제조한 독을 먹인다거나….’

그도 아니면,

‘비첸의 마음이 풀어질 때 세뇌가 필요하다거나….’

아무튼 이사벨라는 혼자서 식사하는 걸 즐기는 편이고, 때문에 이사벨라가 밤마다 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나한테 좋은 의미는 아닐 거야.’

어떤 의미로는 이사벨라가 이 공작가에서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아들인 2공자 가르시아가 후계를 잇기 원한다.

벨라투를 이을 자는 오로지 그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믿는 사람.

그래서 다른 형제들을 배척했고 자신의 친아들인 비첸마저도 괴물로 키웠다.

그의 형인 가르시아를 가주로 만들기 위해서.

‘절대적인 설정값을 가진 캐릭터니까.’

다른 캐릭터들은 어떻게든 회유하고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사벨라는 아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내 편으로 만들기 어려운 캐릭터.

태생부터 아군과 적을 확실히 구별하여 그 포지션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 캐릭터가 바로 이사벨라였다.

‘하얀 벨라투인 내게 직접 독을 먹일 생각은 아닐 테고.

그렇게 어수룩한 방법을 쓸 사람도 아니다.

이사벨라는 유능하며 벨라투를 다스리는 이인자다.

공작 앞에서 이상한 술수는 부리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이사벨라의 눈을 본 비올라는 생각했다.

‘어금니에 맹독을 숨긴 독사 같은 눈빛이구나.’」

원작 속 비올라도 이사벨라를 만날때는 늘 경계했다.

비올라가 본능적으로 꺼리고 불편해했던 사람이 바로 이사벨라다.

“물론 제가 2분의 여유를 남기고 도착한 것에 대해 불쾌하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빨리 오도록 하지요.”

헤론이 대신 말했다.

“앉지.”

“실례하겠습니다.”

제논이 의자를 빼주었고, 비올라는 자연스레 시중을 받으며 의자에 앉았다.

처음 나온 요리는 양송이 크림 수프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크림 수프를 보니 군침이 절로 돌았건만 분위기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냥 혼자 먹는 게 편한데.”

왜 굳이 불러서 이렇게 불편한 자리를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수프를 두어 번 떠먹은 헤론이 말했다.

“다쳤다고 들었다.”

“네. 조금요.”

비올라는 눈동자만 돌려 저만치 멀리 시립해 있는 제논 쪽을 쳐다봤다.

‘굳이 보고 안 올려도 되는데.”

꼭 이상한 데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

비올라는 자신이 다친 사실에 대해 헤론에게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헤론이 알고 있다.

그 말은 곧 제논이 스스로 보고를 올렸다는 얘기다.

“상처가 깊지는 않은 것 같구나.”

“네. 일부러 제 몸을 내줬거든요.”

수프를 몇 입 떠먹지도 않은 이사벨라가 스푼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술 주위를 톡톡 두드렸다.

모든 행동에 기품과 여유가 서려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보기에 그대와 제논 사이의 실력 차가 너무 뚜렷하지 않나요?”

“그렇게 뚜렷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지 않았을까요?”

“메데이아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

면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것은 제 잘못이었겠지요. 제 선택이었고 저는 제 목숨으로 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렀을 겁니다, 어머니.”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맞아요. 벨라투를 잘 이해한 말이군요.”

비올라는 그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순식간에 이해했다.

‘벨라투다운 말이군요’라고 말하지 않고, ‘벨라투를 잘 이해한 말이군요’라고 말했다.

그 의도는 뻔했다.

“제가 순혈 벨라투가 아니라는 사실을 굳이 짚으실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비올라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사벨라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어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이사벨라가 공작 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집사를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이사벨라의 의도는 명확했다.

이토록 벨라투다운 벨라투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잘 해내고 있는 벨라투인 비올라를, 집사인 제논이 공격하여 상처까지 입혔다.

그것이 아무리 비올라가 의도한 시험이었다 할지라도,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비올라는 울고 싶었다.

수프가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어.’

가족과의 식사가 이렇게 불편할 수 있다니.

늘 가족을 꿈꿨고 가족과 함께하는 단출한 저녁을 바라왔던 비올라지만, 이런 자리는 사양이었다.

다시는 함께하고 싶지 않은 저녁식사였다.

그 와중에 헤론은 자신의 수프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다.

‘아버지는 다 먹었네?”

어떻게 먹은 건지는 몰라도 그릇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마 스푼에 마나를 담아 미세한 컨트롤을 이어갔겠지.

저 정도로 정교한 컨트롤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공작은 지금 대단히 여유로운 상태라는 뜻이었다.

그게 좀 얄미웠다.

저 혼자만 배부르게 맘 편하게 먹는 것 같아서.

‘얄밉긴 한데……….’

그 와중에 잘생겼고, 저토록 잘 먹는 걸 보면 또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나 미쳤나 봐.’

덕질의 후유증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제정신은 아니야.

이 지경이 되어서도 최애캐가 잘먹으니 기분이 좋다니.

최애캐가 입을 열었다.

“제논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

“네.”

“그렇다면 처분은 결정했나?”

“방금 제논이 제 시중을 훌륭히 수행한 것으로 제 처분을 보여 드렸다고 생각해요.”

제논은 여전히 비올라의 시중을 들고 있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의자를 빼내주었다.

이곳까지 비올라를 에스코트해서 데려온 사람도 제논이었다.

공작은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옳고 그름을 따지지는 않았다.

“그렇군.”

“누구보다 벨라투스러운 그대가 어째서 제논에게는 그토록 무른 모습을 보이는 건가요?”

소설에서 말하는 ‘독사 같은 눈빛’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표정 자체는 온화했는데, 느껴지는 기세는 살벌했다.

마음속 구석구석을 훔쳐보고 염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작은 약점이라도 잡으면……

사정없이 물어뜯을 거야.’

비올라가 대답했다.

“무른 모습을 보이면 안 되나요?”

“무릇 지배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이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잔혹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너무나 슬픈 현실이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강이 해이해지고 지배자의 주변부터 천천히 썩어간다.

“그래서 지배자는 외롭답니다. 당신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남편처럼.”

“슬픈 일이네요.”

“슬프지만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비올라는 지금 응당 ‘감당해야 할 몫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대가 진정 벨라투가 되고 싶다.

면.”

손가락으로 제논을 가리켰다.

“제논의 수급을 베어 원리원칙을 바로 세워야 할 거예요.”

“그대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그대를 괴롭힐 거예요. 먼 훗날, 그 어떤 명분도 세울 수 없어요.”

벨라투는 그 어떤 가문보다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가문이다.

북쪽의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기 위해 자연스레 그렇게 형성되었다.

북쪽의 강대한 마물들과 상대하기 위해서, 마물들의 땅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

벨라투는 그 누구보다 원리원칙을 지켜와야 했다.

‘이사벨라는……… 어떻게든 내 약점을 찾아내서 찔러댈 거야.’

작은 틈도 보이면 안 된다.

어차피 이사벨라를 같은 편으로 회유하는 것은 포기했다.

이사벨라의 미움을 조금 받더라도 -이미 받고 있는 것 같지만-그 미움과는 상관없이 상황을 풀어가야 했다.

“명분은 약한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 아닌가요?”

“강한 자에게도 명분은 필요해요, 비올라. 그대는 아직 어려서 세상을 잘 모르시는군요.”

비올라는 이사벨라의 눈빛이 번뜩인다고 느꼈다.

약점을 잡은 모양이었다.

아직 어려서 제대로 모른다. 명분은 약한 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공작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지만, 명분 없이 행동하지는 않아요.”

맞는 말이다.

명분은 중요한 일이다.

헤론 공작이 아무리 강해도 인류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는 어려요. 아직 사교계조차 입문하지 못한 어린애예요.”

이사벨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비올라가 순순히 어리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은 몰랐다.

이사벨라가 본 비올라는 철혈의 공녀에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 자존심을 건드렸는데, 이렇게 인정해 버릴 줄이야.

열두 살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래서 저는 열두 살답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절대적인 강함을 갖추고 있다면, 명분 따윈 필요 없다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요?”

“철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짚은 거예요.”

“열두 살은 철이 좀 덜 들어도 괜찮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열두 살이잖아요.”

토마토소스 베이스의 파스타와 버터를 발라 노릇노릇하게 구운 조개구이를 맛있게 먹던 헤론의 포크가 멈췄다.

소리 나지 않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다음 비올라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강철 같은 벨라투는 이 공작가에 많아요. 제 바로 위의 오빠인 비첸도 그런 사람이죠.”

일부러 비첸을 짚었다.

방식이 좀 이상하기는 해도, 어쨌든 이사벨라는 비첸을 끔찍하게 아끼니까.

“그러나 그 단단함이 벨라투를 완성시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섯 명의 단단한 벨라투가 이미 계울성에 존재하니.”

비올라는 관자 버터 구이를 포크로 집었다.

헤론 혼자 맛있게 먹는 걸 보며, 사실 너무 먹고 싶었다.

관자 구이가 총 열 개가 나왔는데, 헤론 혼자 일곱 개를 집어 먹었다.

남은 것은 겨우 세 개였고 최소하나 이상은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열두 살 비올라의 육체를 지배했다.

“한 명쯤은 다른 방식으로 벨라투를 완성시킬 수 있겠지요.”

앙.

덥석.

오물오물.

‘이거지!’

빙의해서 좋은 점을 딱 하나만 꼽아보라면 바로 이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비올라를 버티게 해준 이 아름다운 음식들.

‘맛있어.”

비올라는 천상의 맛을 경험했다.

마법 식기 덕택에 여전히 따뜻한 관자를 한입 베어 먹자 조개 특유의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전혀 비리지 않고 고소했다.

식감이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여 마치 잘 만들어진 치즈를 먹는 것 같기도 했다.

비올라가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벨라투를 완성시켜 보려 해요.”

“철혈의 공녀인 줄 알았더니, 꿈꾸는 공녀군요.”

오히려 이사벨라는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꿈에 취해 헛소리나 늘어놓는 어린 여자애처럼 보였으리라.

사실 이사벨라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나쁘지는 않으나, 이 자리에는 이사벨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헤론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헤론 앞에서 마냥 그렇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자리에서 보여 드리죠.”

“……이 자리에서요? 그대의 포부는 아름답지만 지나친 자만은 없느니만 못해요.”

맞아요. 저도 알아요.

근데 저도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비올라는 속마음을 감춘 채 여유로운 척 씨익 웃었다.

“지나친 자만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아시겠지요.”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일게요. 단단하지 않은 방법으로 벨라투를 완성하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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