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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75화 (75/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5화이윽고 제논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첸을 데려왔다.

“아부지!”

아부지라고 해맑게 말했던 비첸은 어머니인 이사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진지해졌다.

“어머니도 계셨네요.”

“비첸, 어쩐 일이니?”

어머니 앞에서 진중한 척을 하기는 하지만 천성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야….”

비첸의 눈이 비올라를 향했다.

비첸을 이 자리에 부른 사람이 다름 아닌 비올라였기 때문이다.

비올라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제가 정령을 보여준다고 했거든요.”

“맞아요. 비올라가 정령을 보여준 댔어요.”

비첸은 꿈과 희망에 부풀었다.

세상에 정령이라니.

벨라투가에 정령사가 탄생하다니.

벨라투의 순혈이 보기에는 굉장히 희귀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물이 퐁퐁 솟아난다고 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앞이라 최대한 자제하고는 있지만 비첸은 신이 난 강아지 같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입에서 침이라도 질질 흘러나올 것 같은 모양새였다.

분수와 폭포를 쏟아내는 멋진 물의 정령. 그것도 무려 정령 왕 후보 중 하나라는 켈 정령후라는 말이 비첸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제 오빠를 초대한 적이 없으시지요?”

“그래요. 나는 비첸을 초대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시고요.”

“그래.”

“이 자리의 주권자는 두 분이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죠.”

이 자리를 주관하는 사람은 비올라가 아니라 헤론과 이사벨라다.

주관자들이 비첸을 초대하지 않았다.

“비첸 오빠는 철저하게 예절 교육을 주입받은 후계자 후보이고, 그런 그가 제 부름에 응답하여 이곳까지 달려왔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은 자리에.”

“그랬네요.”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라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지금 건은 비첸이 너무 천방지축으로 날뛴 꼴이 되었다.

벨라투답지 않은 모양새였다.

“하나 비첸은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지요. 그것은 곧 탐구욕이 되고, 탐구욕이 뛰어난 아이는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답니다. 저는 저 아이를 질책하고 싶지 않네요.”

“질책하라고 말씀드린 게 아니었어요.”

어차피 비올라도 비첸이 혼나는 바란 게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비첸 오빠를 불렀다면, 비첸 오빠가 이 자리에 달려왔을까요?”

비올라가 비첸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빠도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그, 그건…….”

비첸은 약간 당황했다.

정령에 정신이 팔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들떠서 실수를 해버린 셈이었다.

비올라가 빙그레 웃었다.

‘맞다고 대답은 못 할 거야.’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초대받지 않은 식탁에 찾아왔다?

차라리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물꼬는 터줬다.

호기심이 강하다. 탐구욕이 강하다.

때문에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고 하나에 깊게 파고들었다.

‘그게 낫겠지.

당황한 비첸 대신 비올라가 계속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찾아온 건, 정령을 가진 사람이 비올라 벨라투여서 그런 거 아니야?”

“………..”

“오빠와 가장 직접적으로 후계 경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고, 내가 정령후와 계약했다는 사실은 벨라투로서 당연히 파악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거야.”

“마, 맞아.”

교묘하게 비첸의 감정도 건드렸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었을 거고.”

“맞아. 나는 비올라가 보고 싶었어.”

비첸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비올라의 말이 전부 맞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고민하던 차였다.

나는 왜 비올라가 없으면 심심할까?

비올라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지?

비첸이 혼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비올라랑 겨뤄서 누가 더 강한지 결판을 내고 싶다.

하지만 비올라의 말을 들어보니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비올라랑 겨뤄서 누가 더 강한지 결판을 내고 싶다기보다는, 새로운 힘을 획득한 비올라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비올라가 미소 지은 채 이사벨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질문을 던졌다.

“오빠. 아직도 나를 죽이고 싶어?”

“응?”

비첸이 멈칫했다.

후계자 후보들끼리는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웠다.

머리로는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비올라를 죽이고 싶지 않아졌다.

속마음은 그랬는데 어머니의 존재가 걸렸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엄마는 실망하겠지?”

실망한 엄마는 가슴이 아플 거야.

너무너무 슬플 거야. 비첸은 그게 두려웠다.

“당연히….”

“솔직하게 말해줘. 나는 거짓말하는 오빠는 싫으니까.”

비첸은 심각하게 갈등해야만 했다.

어떤 게 솔직한 것인지 비첸 스스로도 잘 몰랐다.

“죽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해도 좋아.”

그래. 죽이고 싶다고 말하자.

그게 맞는 거니까! 비첸이 입을 열려는 그 순간.

“나는 오빠와 함께하고 싶지만 말이야. 나는 하얀 벨라투니까.”

“…….”

비올라는 이사벨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솔직한 오빠가 좋아. 솔직하게 말해줘.”

한참 후, 비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안 죽이고 싶어졌어.”

***

이사벨라가 말했다.

“비첸은 방에 돌아가 있으렴.

정령을 보지 못한 비첸은 시무룩해졌지만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비첸은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방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조금 흘렀고 식사가 마무리 되었다.

헤론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라 그 누구도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부인이 한 방 먹었군.

이게 비올라가 말하는 ‘단단하지 않은 방식’ 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올라는 결국 비첸으로부터 ‘죽이고 싶지 않아’라는 대답을 이끌어냈다.

더 나아가 ‘함께하고 싶어’라는 말까지 끄집어냈다.

‘비올라는 하얀 벨라투니까.’

하얀 벨라투로서 좋은 선택을 했다고 봤다.

결국 비올라는 비첸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헤론과 이사벨라 앞에서 직접 보여준 셈이었다.

“저는 오빠를 죽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첸은 제 사람이 되었죠.”

“제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조금 있네요. 비첸은 검은 벨라투고 비올라는 하얀 벨라투죠. 서로 협력 관계라고 보는 편이 좋아요.”

“제가 불러서 왔잖아요.”

“그것만으로는 주종 관계가 성립되지 않죠.”

“알겠어요. 어머니의 말이 맞는 걸로 하죠. 협력 관계라고 할게요.”

협력 관계여도 상관없었다.

“핵심은 비첸 오빠가 제 부름에 예의를 어겨가면서까지 응답했고, 결국 저와 함께하고 싶다고 얘기한 사실이라고 봐요.”

헤론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러한 제 방법이 틀렸나요? 열두살이 잘못된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벨라투라면 제논을 엄히 벌했어야 했다.

원래는 그게 맞다.

그러나 헤론은 비올라의 방법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틀리지 않았구나.”

제논은 비올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고, 스스로의 과실을 모조리 보고했다.

‘비올라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제논은 도망쳤을 것이다.

대륙은 넓고 광활하다.

바다 건너 서대륙과 동대륙도 존재한다.

멀리 도망쳐 버리면 제아무리 벨라 투여도 제논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했고 내 앞에까지 나아와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신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지.”

“그러면 제논의 처분은 제 뜻대로 해도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벨라투를 공격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헤론은 벨라투의 수장으로서 벨라 투의 기강을 바로잡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감봉 3개월.”

이사벨라는 헤론을 쳐다보았다.

‘겨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사벨라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러면 벨라투의 기강이 무너진다.

그런데 제논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공녀님의 제약이나 약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공작님.”

만약 이번 일이 훗날 문제가 된다.

면 비올라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제논은 스스로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당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헤론이 피식 웃었다.

“스스로 벌을 내리고 내게 보고하도록.”

제논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린 후 겨울성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이번 일은 분명한 실수였고 저의 잘못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나부꼈다.

“그리하여 저는 그에 걸맞은 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아공간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스스로 베었다.

“훗날, 제 손가락이 다시 의미를 찾을 때, 접합하겠습니다.”

제논은 빙그레 웃고서 다시 겨울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근데…… 제 손을 보시면 공녀님께서 가슴 아파 하실까요?”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네요. 마음 아프신 건 싫은데.”

제논은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절 단했다는 사실을 보고 올렸고, 이번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헤론은 7중첩 마법진으로 둘러싸인 야수의 관을 찾았다.

마법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이 공간 안에서, 고슴도치들이 뛰놀고 있었다.

고슴도치들 앞에서 헤론은 유일하게 사람 헤론이 될 수 있었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장 가까운 경쟁자인 비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5공자 비첸, 4공녀 헤라.”

모두 비올라에 굉장히 우호적이다.

뿐만 아니라 1공녀 메데이아까지 비올라를 좋게 보고 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비올라를 직접 구해 오기까지 했다.

‘위기에 빠진 벨라투를 벨라투가 구해주다니.’

생소한 일이었다.

그는 고슴도치들에게 속마음을 터놓았다.

“나는 이러한 변화들이 싫지 않구나.”

아주 오래전, 힉슨이 말했었다.

자신의 꿈은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내가 내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서 내 사람들을 지켜주고 함께 하는 것이라고.

그때 헤론은 힉슨을 비웃었었다.

‘벨라투는 절대 그렇게는 될 수 없어.’

벨라투는 벨라투다.

인류를 지키는 북방의 방패..

물러지고 여려지면 절대로 안 되는 철혈의 공작가.

그래야만 한다.

‘분명히 그래야만 하는데.

헤론은 고슴도치 여섯 형제 중 막 내를 손 위에 올려놓고 핸들링했다.

손과 손을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막내의 이름은 비올라의 이름을 따서 ‘올라’ 였다.

“올라야.”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따뜻한 시선으로 막내 올라를 쳐다보았다.

올라는 헤론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았다. 털이 포근했다.

“형제들뿐만 아니라 제논과 제르미. 툰드라마저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더구나.”

그리고 또 한 명.

“힉슨까지.”

사실 이건 좀 마음에 안 들었다.

비올라를 마음으로 낳은 딸로 삼겠다니.

“좀 웃기는 일이지. 딸이라니?”

올라의 작은 몸이 움찔했다.

두다다!

헤론의 손에서 도망쳤다.

헤론의 몸에서 새어 나온 살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과정상으로도, 성장 배경상으로도.

더더군다나 서류상으로도 내 딸인데 말이지.”

***

며칠 후, 밤이 깊었다.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수많은 물의 정령이 창문에 노크하는 것 같았다.

“후후, 위대한 이 몸이 등장하셨다.”

비올라가 소환한 것이 아닌데 퐁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얘기를 들어보니 수기(水氣)가 이토록 풍성해질 때에는 자연스레 소환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몰랐는데 벨라투라는 녀석들 정령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던데?”

“그래?”

“응. 아주 악명 높아. 수많은 정령을 베었대.”

“그, 그래?”

하기야, 역사적으로 벨라투가 베어 넘긴 정령사가 많으니까.

정령들도 많이 베었겠지.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어차피 위대한 정령 왕이 될 몸이고, 사소한 일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한 성정을 가졌으니까.”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젤리처럼 변해 창문 쪽으로 다가가 창틀사이로 스르르-스며들었다.

“크-비 좋다.”

걸쭉한 목소리였다.

마치 사우나에 들어간 동네 아저씨같았다.

“음?”

그런데 퐁퐁이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쟤는 누구야?”

비올라가 창문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툰드라였다.

‘힉슨 아저씨는 어디 가고?’

힉슨은 보이지 않고 툰드라 혼자서 돌아오고 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주자 비에 쫄딱 젖은 툰드라가 보였다.

비올라를 보자 툰드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반려견이 보호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툰드라는 비올라를 그리워한 모양이었다.

“다녀왔…… 습니다.”

털썩.

툰드라가 쓰러졌다.

젤리처럼 변한 퐁퐁이가 물이 흐르듯 툰드라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사람의 형태를 갖춘 퐁퐁이가 검지로 툰드라를 콕콕 찔렀다.

“얘. 피 엄청 나는데?”

진득한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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