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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77화 (77/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7화세상사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 세상이 〈벨라투의 그림자〉라는 만만치 않은 세상 속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비올라!”

노크 없이 문을 활짝 열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비첸이었다.

비첸은 흰색 면 반팔 티와 검은색면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붉은 기가 보였다.

저녁 식사 때의 일로 이사벨라 공작 부인과 만남을 가진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나 다쳤다?”

다쳤다고 말하는 비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거 봐.”

비첸은 면 티를 훌러덩 들어 올렸다.

비올라에게 배를 보여줬는데 피부가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면 티에 가려져 있던 화상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 강도가 더 심해진 거 같은데.’

이사벨라 공작 부인의 훈육 강도가 더 높아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헤헤. 혼이 나버렸지 뭐야.”

웃으면서 비올라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그의 오른손에는 연고가 들려 있었다.

비첸은 잔뜩 기대하는 듯한 눈망울로 비올라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비올라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뭐?”

“발라줘야지.”

“그니까 뭘?”

“연고.”

비첸이 팔을 쭉 뻗어 연고를 건넸다.

자세히 보니 팔에도 화상 자국과 상처들이 보였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수준의 어마어마한 회복력으로 회복했을 텐데도 꽤 많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발라줘, 얼른.”

“어째 즐기는 거 같다?”

“그럴 리가 있어?”

비첸은 황당하다는 듯 비올라를 쳐다봤다.

“세상에 혼나는 걸 즐기는 변태가 어디 있어?”

비첸은 시치미를 뚝 뗐다.

과연 이것을 시치미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휴.”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 쉬어?”

너 같으면 한숨 안 나오겠냐.

어머니께 맞고 와서 싱글벙글 웃는 오빠를 보는 동생의 심정은 복잡 오묘했다.

‘나도 모르게 정이 들었나.”

비첸이라는 캐릭터에 정이 조금 들었나 보다.

이렇게 상처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약 발라달라며 헤헤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비첸의 심리 상태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연고를 발라주는 행동이 나와 친밀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

비첸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는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교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부나 경험이 전무했다.

‘어떻게 사람을 쉽고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천재겠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은 모두 백지장그 자체였다.

“오빠가 다치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네.”

“왜?”

“약 발라줘야 하잖아.”

“귀찮아서 그래?”

솔직히 귀찮지 않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너무 졸렸다.

그러나 귀찮다고 말하기에는 비첸의 순둥순둥한 눈망울이 조금 걸렸다.

“그냥. 네가 아픈 게 별로야.”

비첸이 싱글벙글 웃었다.

“다행이다.”

“또 뭐가?”

“귀찮다고 했으면 죽이려고 했는데.”

비올라는 또다시 이 세계가 벨라 투의 그림자> 속이라는 사실을 절 감했다. 저렇게 해맑고 깨끗한 얼굴과 표정으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돌아앉아.”

한숨을 내쉰 비올라는 비첸의 등에 연고를 발라주기 시작했다.

***

“자. 다 됐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아 있을 거야.”

안 그래도 초인적인 회복력을 가진 육체인데 거기에 최상급 마법 연고까지 더해졌다. 내일이면 말끔하게 나을 것이다.

“근데 나 안 졸린데?”

비올라는 비첸의 등짝을 한 대 때렸다.

찰싹! 하고 찰진 소리가 났다.

“왜, 왜 때리는 거지?”

“너 내가 약 발라줄 때 꾸벅꾸벅 졸았거든?”

“내, 내가?”

비첸의 표정은 늘 순수했다.

거짓말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지금 비첸은 확실히 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래. 계속 졸던데. 코까지 골면서.”

“코를 골았다고?”

비첸은 강하게 손사래 쳤다.

“나는 코 같은 거 안 골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래도 코를 골았다는 사실이 비첸에게는 상당히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인 것 같았다.

“진짜야. 비첸은 코 같은 거 안 곤대.”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비올라한테.”

비올라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비첸과 함께 있으면 한숨이 팍팍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비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방에 돌아가서 자도 괜찮아, 빠.”

“…응?”

“우리는 내일도 만날 수 있고 모레도 만날 수 있어.”

독자였던 한아린은 비첸이 졸립지 않다고 버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비첸은 지금 비올라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에 굉장히 서툰 비첸은 적당한 명분(약을 발라야 한다는)이 있을 때만 비올라와 만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냥 가끔 차나 마시자. 그러니까 오늘은 가서 자.”

“나는 차 같은 거 안 마셔. 차는 여자애들이나 마시는 거야.”

“아버지도 자스민 티를 즐기시는데?”

“그, 그건…!”

당황한 비첸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이내 화제를 돌렸다.

“아, 마, 맞다. 엄청 중요한 할 얘기가 남았어.”

“뭔데?”

잠 좀 자자.

나 졸려 죽겠다, 이 오빠야.

비올라는 저도 모르게 크게 하품을 했다.

“졸려?”

비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자장자장 해줄까?”

“엄청 중요한 할 얘기가 그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비첸을 보면 참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대화가 힘든 타입이었다.

“중요한 얘기가 뭔데?”

“그, 있잖아. 물망초 연회. 거기서 친히 이 몸께서 네 녀석의 에스코트를 좀 해보실까 하는데.”

비첸의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

비올라는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현재 시각 새벽 1시 15분경.

‘졸려.’

졸린데 잘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난데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판을 낼 때까지. 나는 절대 돌아갈 수 없어.”

“결판은 이미 났습니다, 공자님.”

툰드라와 비첸.

둘은 벌써 30분이 넘도록 대치 중이었다.

“겨울성 밖에서 싸우자.”

“저는 공녀님의 허락 없이는 사냥감을 물지 않습니다.”

“내가 사냥감이라는 말이야?”

“공녀님께서 명령하시면 그렇습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비첸은 당장에라도 단도를 꺼내 들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은 겨울성 안이고 실제로 툰드라를 베지는 못했다.

“내가 너보다 강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에스코트하는 게 맞지.”

“강한 걸로 치면 제논 집사가 공자님보다 강합니다만.”

“걔는 지금 손가락 하나가 없잖아.

그 정도로 완성된 무인의 밸런스가 깨졌으면 후유증 엄청 큰 거 알지?

어쩌면 내가 더 셀걸?”

비첸은 의기양양해졌다.

툰드라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런 논리라면 메데이아 공녀님께서 비올라 공녀님을 에스코트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헹! 메데이아 누나는 여자잖아.

에스코트는 남자가 하는 거라고.”

“구시대적 발상이군요. 남자만 에스코트하는 문화가 사라진 지 20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요.

“아, 아무튼!”

“비첸 공자님의 논리는 틀렸습니다. 비첸 공자님의 논리대로라면 공녀님의 에스코트는 공작님께서 맡으셔야겠군요.”

“아버지는 에스코트 같은 거 안해!”

비올라는 그냥 포기했다.

둘이 알아서 싸우라고 내버려 두기로 했다.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시끄러워.’

시끄러운 것이 싫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수면욕이 너무 강했다.

안 그래도 심력을 많이 소모하여 피곤했던 비올라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응?”

평소의 아침과는 다른 소음이 들려 왔다.

지!”

“……니다.”

비올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며 벽면에 걸린 마도 시계로 시간을 확인해 봤다.

오전 8시.

제논이 늘 깨우러 오는 시간이었다.

마침 제논의 얼굴이 보였다.

“공녀님, 일어나셨습니까?”

“응.”

제논은 여느 때처럼 마법 가루를 탄 양치 물을 건네주었다.

비올라가 이 세계에 와서 참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이 마법 문물이었다. 양치할 필요도 없고 그저 가글만 하면 입안이 깨끗하게 유지되었다.

“세숫물은 평소처럼 온도를 맞추어 준비해 놓았습니다.”

“고마…….”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가글을 하고 나니 정신이 또렷해졌고 저만치 구석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비첸 공자님. 공녀님께서는 저를 선택하셨습니다만.”

“아니라니까?”

제논이 빙그레 웃고서 말했다.

“공녀님께서 시끄러우실까 봐 화장실에 가서 언쟁하도록 부탁드렸습니다.”

“…응.”

그러니까 새벽 1시부터 오전 8시까지.

장장 일곱 시간 동안 서로 에스코트를 하겠다며 싸우고 있었다는 얘기다.

“칼부림은 안 났지?”

“네. 혹시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면 두 분 다 에스코트를 영영 할 수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 협박이 먹혔단 말이야?

비올라는 괜스레 머리가 아파왔다.

‘신경 끄자.’

당분간은 신경 끄고 있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손가락은 …… 좀 어때?”

“불편하긴 합니다만…… 차차 적응해야지요.”

“붙일 수 있잖아.”

“저를 채찍질하고 단련하는 의미로 그냥 두었습니다. 저는 공녀님께 더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그래.”

그냥 붙이지.

쟤도 참 이상한 고집이 있다.

그 고집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논이 말을 이었다.

“아참. 비첸 공자님과 툰드라가 에스코트 건으로 싸우게 된 경위와 내용을 공작님께 보고 올리려고 하는 데, 괜찮으시겠지요?”

“너는 네 일 해.”

“알겠습니다.”

제논은 툰드라와 비첸이 싸우게 된 경위에 대해 제법 상세하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제논은 매우 뛰어난 기억력으로 지난밤에 있었던 대화의 일부를 정확하게 복기해 냈다.

[“비첸 공자님의 논리는 틀렸습니다. 비첸 공자님의 논리대로라면 공녀님의 에스코트는 공작님께서 맡으셔야겠군요.”

“아버지는 에스코트 같은 거 안해!”

등의 언쟁이 오갔으며…….

그 언쟁은 약 일곱 시간이 넘도록 진행되었고, 현재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서 …….]

제논이 보고서를 올리고 2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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