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78화 (78/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8화벨라투의 총집사 칼튼의 눈에 한 장의 종이가 보였다.

칼튼은 저 종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비올라 공녀님에 대한 보고서.’

보통 후계자 후보에 대한 보고서는 한 번 읽고서 폐기 처분한다.

그래서 집사들이 올린 후계자 후보에 대한 정보들은 공작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게 된다.

‘저건 2주 동안 왜 안 버리셨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칼튼이 결국 묻고 말았다.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길래 2주 동안이나 보관하셨습니까?”

“아. 별 내용은 아니다.”

공작은 별로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보고서를 칼튼에게 건네주었다.

보고서를 다 읽은 칼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비올라 공녀의 사교계 입문. 그리고 그 에스코트와 관련된 보고라.

칼튼은 약간 의아했다.

이 보고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내용 같은데 왜 공작은 2주 동안이나 이 보고서를 폐기하지 않았을까.

‘이유가 있겠지.’

공작이 스스럼없이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총집사인 자신은 그 진짜 의중을 읽어내야만 했다.

‘보지 않았으면 몰랐으되, 나는 이미 보고서를 읽었다.

이 보고서 이면의 다른 내용을 떠올렸다.

그는 총집사였고 총집사다운 모습을 보여야만 했으니까.

“2주 동안이나 보고서를 버리시지 않은 이유를 알겠군요.”

“………..”

헤론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칼튼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헤론도 이 보고서를 왜 버리지 않았는지, 그 스스로도 잘 이해 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직접적인 경쟁자인 비첸 공자가 에스코트를 자처하고 있고, 스스로를 반려견이라 부르는 소년 검술가 툰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충분히 신성(新星)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비첸은 벨라투의 순혈이니 말할 것도 없고, 툰드라는 어마어마한 성장속도로 벨라투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힉슨 경도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비올라를 직접 에스코트했을 거라고 투덜대고 있다고 합니다. 또 메데이 아 공녀마저도 은근한 관심을 표출하고 있을뿐더러.”

하나 더 있었다.

“겉으로는 사교 모임에 매우 적극적이며 즐거워하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혐오하는 헤라 공녀마저도 비올라 공녀의 사교계 입문에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비첸. 툰드라. 힉슨, 메데이아. 헤라까지.

“이것은 비올라 벨라투가 ‘하얀 벨라투’로서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대로 하얀 벨라투는 검은 벨라투들의 보조 역할을 맡아왔었다.

벨라투의 주체는 늘 검은 벨라투였다.

“전무후무한 하얀 벨라투의 탄생.”

공작은 아마도 이 명제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보고서를 한참이나 간직하며 곱씹고 있는 것이겠지.

“공작님께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력만 가지고는 완전한 벨라투를 만들 수 없다고.”

“그랬지.”

“어쩌면 비올라 벨라투야말로 벨라 투의 완성을 이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판단하신 것 아닙니까?”

불과 5년 만에 저토록 많은 벨라 투의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제논도 은근히 비올라를 에스코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만약 제논의 몸이 멀쩡했다면 비올라의 에스코트를 자처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홀로 강해서는 벨라투를 완성할 수 없다. 공작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입니다. 비올라 공녀는 마치 공작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작님께서 보고서를 계속해서 살펴보시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총집사.”

“예, 공작님.”

헤론은 사실 사교 모임에 대해 잘 모른다.

대다수의 벨라투가 그렇듯, 사교모임에 관심을 두지 않아 왔다.

그래서 사교 모임의 규칙이나 암묵적인 행태들에 대해 전혀 모른다.

“데뷔탕트의 에스코트 자격이 따로 있나?”

“없습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자제의 선택에 오롯이 맡기게 됩니다.”

신분의 고하라든가 재력이라든가 성별이라든가.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살 소년 소녀들은 가장 훌륭하고 화려한 상대를 고릅니다. 에스코트를 해주는 사람이 곧 입문자들의 신분과 능력을 증명하는 신분증이 되니까요.”

그것이 사교계의 불문율이라고 했다.

누가 에스코트를 해주느냐.

그것이 곧 사교계의 권력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에스코트를 해주는 경우도 존재하나?”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흔한 일은 아닙니다.”

“어째서? 가장 훌륭하고 화려한 상대라고 하지 않았나?”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공작님 같지는 않으니까요.”

헤론은 평범한 아버지의 범주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

헤론의 몸속에 내재된 강대한 마나는 그의 노화를 완전히 멈추어 버렸고, 겉으로 보기에 삼십 대 초중반의 나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절대자로서의 기품과 위엄이 서린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다.

젊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절로 풍기는 아우라와 카리스마는 수많은 영애의 상사병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아참. 최근 어머니가 아들의 에스코트를 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

“마마보이라고 은근한 무시와 놀림을 받다가 결국 울어버렸다는군요.”

아마도 열두 살 인생 최악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나 어머니가 에스코트를 하는 것이 그 나이 또래의사교 모임에서는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칼튼이 가볍게 웃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영애들의 눈에 가장 멋있는 사람은 그 나이 또래의 공자들 아니겠습니까? 이를테면 미공자 제르미 같은.…….

“제르미는 내가 불허한다.”

“이유를 여줄 수 있을까요?”

“소폭풍이라는 이름보다 미공자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더군.”

만약 벨라투였다면 크게 혼이 났을 대목이다.

벨라투였다면 미공자라는 이름 따위보다는 소폭풍의 이름값이 훨씬 높았어야 했다.

“그건 제르미 공자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탓에 붙여진 오명 같……….”

말을 하던 칼튼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아름다웠음에도 불구하고 천살(千殺)로 불린 분이 여기 계시는군요.”

“비올라의 사교계 데뷔가 언제지?”

다시 말해, 비올라의 생일이 언제냐고 묻는 것이었다.

“2주 후입니다.”

“그때 내 일정은?”

“공식적인 일정은 없습니다만, 비공식적인 일정은 있습니다.”

칼튼은 내심 미소 지었다.

‘ ‘후계자 후보의 사교계 입문에 이토록 관심을 가지신 적은 없었다.

왜 공작이 관심을 갖고 있겠는가.

하얀 벨라투라는 특별한 특성을 가진 딸이 사교계에 입문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하얀 벨라투’로서의 능력을 입증해 낼지가 궁금하시겠지.

‘많은 것을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공녀님.’

비올라는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

이제 겨우 열두 살이다.

메데이아와 대적하기에는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다.

그러니 사교계에서 벨라투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공작님께서 이토록 ‘하얀 벨라투’에 집중하고 계시니까요.’

칼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

“나와 함께 파르아 자작령에 가줘야겠어.”

헤라는 반론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했다.

그녀는 휠체어에 앉은 채 비올라를 올려다봤다.

비올라의 눈동자에 헤라의 표정이 담겼다.

굳건한 의지를 담은 눈. 굳게 앙다.

문 입술, 뜻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단호한 태도,

“파르아 자작령? 언니랑 같이?”

“그래.”

파르아 자작령은 중앙 대륙에서도 굉장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다.

초대 파르아 자작은 본래 천민 출신으로, 120년 전 황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게 된 특출 난 여성이었다.

소설 〈벨라투의 그림자> 속에도 언급되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파르아가 만든 드레스와 가방은 귀부인들 사이에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곧 파르아의 브랜드가 되었고, 황후마저 파르아의 작품에 심취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파르아는 명인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황후의 총애를 얻게 된 파르아는 결국 천민 출신 최초로 자작의 작위와 특별한 영지를 하사받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파르아 자작령’이었다.

파르아 자작령은 120년 동안 대륙의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이너와 명인들의 성지였다.

「가장 아름다운 옷은 파르아에서 탄생한다.

빛나는 명품은 명인들의 손에서 탄생하고, 명인들은 파르아에서 태어난다.

일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파르아 자작령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꼭 가야 해?”

“당연하지.”

“왜?”

“사교계 입문을 앞둔 영애가 파르아에 가는 게 이상해?”

사실 파르아가 자작령을 하사받을 때, 수많은 귀족의 반대가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고심 끝에 험준하기로 소문난 에피르산 꼭대기에 위치 한 분지를 영지로 내렸다.

일반적인 체력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등산이 불가능한 곳.

처음 파르아 자작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미있게도 그토록 외지고 험준한 곳의 땅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파르아 자작령을 찾는 귀부인과 영애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120년 전.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파르아자작령으로 향했다.

당시만 해도 마나를 제대로 다루는 여성이 많지 않았다.

120년 전, 마나는 남자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었으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에피르산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는 여인은 거의 없었다.

귀부인과 영애는 반드시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산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마법 도구와 물품들의 보조도 있어야 했다.

그러니 파르아 자작령에 입장한 영애라는 것은 곧 재력과 권력을 충분히 갖춘 영애라는 뜻이기도 했다.

「120년이 흐른 지금도 그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는 여성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들이 파르아 자작령을 찾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마물로부터 인간들의 영토를 수호하는 것에 더욱 힘썼다.」

성별은 크게 관계없었다.

남녀를 떠나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은 대부분 귀족이고, 귀족들은 힘과 권리를 갖는 대신 인류를 수호 해야만 하는 책임도 함께 가진다.

「모든 인류가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파르아 자작령은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고위 귀족 계급만이 도달할 수 있는, 사치스럽고도 숭고한 곳이었다.」

거기 올라가기 엄청 힘들다던데.’

비올라의 축복받은 육체라면 어찌 어찌 올라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올라는 등산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거긴 마차도 못 다니는 길로 유명하잖아. 언니는 어떻게 가게?”

“마법사를 고용할 거야.”

“마법사를?”

마법사를 고용하는 것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따른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콧대와 자존심이 높고, 겨우 자신을 ‘이동 수단 따위로 생각하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들의 콧대와 자존심을 접게 만들만큼의 어마어마한 거액을 사용해야만 고용할 수 있다.

“꼭 가야 할까?”

“당연하지. 너는 내가 선택한 벨라 투고, 하얀 벨라투의 길을 선택한 이상, 사교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나는 네가 그날 가장 빛났으면 하거든.”

“언니 눈에 이상한 욕망 같은 게 보이는데. 나를 사교계에 던져놓고 언니는 한발 빼고 싶은 거 아니고?”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헤라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올라, 나는 말이야. 내 동생이 제일 예뻤으면 좋겠어. 그 누구보다다. 너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단순히 예쁘면 좋겠다.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헤라에게서 일종의 간절함까지 읽을 수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

순간, 비올라는 헤라와 관련된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헤라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언니, 잠깐만.”

비올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헤라가 그토록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