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79화비올라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속에 사교계와 관련된 내용의 비중은 굉장히 적은 편이지만, 비중 있게 다룬 챕터가 존재하기는 했다.
벨라투 내에서 사교 내용을 다루는 경우는 대부분 헤라의 시점으로 진행되었다.
헤라를 제외한 다른 벨라투들은 사교 모임에 거의 불참했으니까.
어쨌든 소설 속에서 사교계 내용이 등장했다 하면 꼭 헤라가 등장했고, 헤라가 등장하면 또 꼭 등장하는 가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의 이름이 바로 ‘마리앙투’였다.
“마리앙투만큼은 철저히 짓밟아줄게.”
마리앙투 공작가.
중앙 대륙에 겨우 넷밖에 없는 공작가 중 하나.
중앙 대륙을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 ‘하인강’의 대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풍요로운 곡창 지대를 끼고 있고 가문 내에 금광까지 소유하여 굉장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가문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리앙투 3공녀와 언니의 일화는 잘 알고 있어.”
「“그러한 방식의 정책은 일견 가진 자에게 징벌적 훈계를 내리는 것처럼 보이나, 그들은 결국 그 모든 부담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킬 것입니다.
“헤라 공녀는 참으로 박학다식함을 뽐내고 싶어 하는군요. 책상에서 공부한 티가 많이 나요.”
」
마리앙투 3공녀인 세나는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론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느라 공사가 다망하신 것은 알고 있어요. 훗날 기회가 된다면 저희 공작령으로 초청하고 싶어요. 겨울성 덕택에 평안을 누리고 있는 제가 감사의 의미로 고도로 문명화된 성숙한 사회를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요.”」
비올라가 말했다.
“그 거지 같은 것이 언니한테 참 많은 개소리를 해댔더라.”
“거지 같은 것?”
헤라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부호인 마리앙투 공작가다.
그 공작가의 3공녀를 거지 같다고 표현하다니.
비올라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 일화를 들었을 때 세나의 초상화부터 수배했어.”
“왜?”
사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만 일단 비올라 벨라투답게 대답했다.
만나면 죽이려고.”
“그러면 문제가 커져.”
“티 안 나게 죽여야지. 마음부터 차근차근.”
“킥.”
헤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황당무계한 말이지만 기분 자체는 좋았다.
비올라가 내 편이 되어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뒷담화는 나쁜 거라고 배웠는데.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네.”
“게네가 언니 뒷담화 훨씬 많이 ㉮을 건데, 뭐.”
마리앙투 3공녀는 늘 헤라를 무시하고 조롱했다.
벨라투의 실세가 하얀 벨라투가 아니라 검은 벨라투라는 사실부터, 헤라가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라는 사실까지.
그런 주제에 벨라투의 순혈이며 같은 공작가의 공녀라는 사실 때문에, 세나는 늘 헤라를 싫어했다.
뿐만 아니라 ‘사교계에서 벨라투의 입지 자체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벨라투는 애초에 북방 끝에 위치한 가문이었고 중앙 쪽에는 그다지 진출하지 않는 가문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헤라에게 있어서 사교계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곳이기도 했다.
“세나가 언니한테 했던 말들을 곰곰이 곱씹어봤거든.”
「“그러나 세상은 이론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그 말은 곧 헤라가 책으로만 세상을 경험한 책상물림이라는 뜻이다.
너는 세상 경험이 적은 애송이라는 뜻을 돌려서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수호 하느라 공사가 다망하신 것은 알고 있어요.”」
그 누구도 헤라가 마물들과 직접 대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검은 벨라투들의 일이다.
그런데 인류를 수호하느라 공사가다망하다?
‘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실권도 없는 하얀 벨라투 주제에.
명백한 조롱의 의미였다.
거기에 화룡점정.
「“훗날 기회가 된다면 저희 공작령으로 초청하고 싶어요. 겨울성 덕택에 평안을 누리고 있는 제가 감사의 의미로 고도로 문명화된 성숙한 사회를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요.”」
겉으로는 겨울성을 치켜세워 올려 주지만 사실은 야만적이고 도태된 사회라는 뜻이다.
너희는 마물들 따위와 싸우느라 제대로 문명화되지 못했고 성숙하지 못한 사회이니, 우리처럼 선진화된 사회를 경험해 보라는 뜻이기도 했다.
“제일 화나는 건 언니가 거기서 차분하게 허브 티나 마셨다는 거야.”
그건 헤라의 방식이다.
훗날 헤라는 대상인이 되면서 스스로의 자질을 증명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벨라투의 그림자>
속 주인공인 ‘비올라 벨라투’의 방식은 아니었다.
“그럼 더 이성적인 방법이 있을까?”
비올라는 헤라를 쳐다보았다.
헤라는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부자 꿈나무인 주요 조연이며, 심지어 지금도 부자이며 건물주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도 조금 들었다.
벨라투 공작가가 여전히 무섭고 마음에 안 들며 요상한 것투성이기는 하지만 비첸과 헤라는 제법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잊지 마. 언니는 내 언니야.”
“이성적인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감성적인 대답을 하고 있네.”
“내 언니 건드리면 가만 안 됨.”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올라가 씨익 웃었다.
“머리를 잘라줄게.”
정확하게는 ‘머리카락을 잘라줄게’였지만 아무튼 대답은 했다.
헤라가 또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속은 시원하네. 어쨌든 파르아 자작령에는 같이 가는 거다?”
***
헤라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마침 헤라의 침대를 정리하고 있던 집사가 허리를 일으켰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응.”
“공녀님을 만난 지 1년. 그동안 봤던 표정 중 가장 환한 표정이신데요.”
“속이 시원해졌거든.”
“비올라 공녀와 대화를 나누고 오면 늘 표정이 좋으세요.”
헤라의 집사는 1년 전 새로 고용 되었다.
그녀는 새까만 검은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3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체구가 많이 작은 편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거나 얕잡아보지는 않았다.
“네 이명이 검귀(劍鬼)였다지?”
“5년 전까지는 그렇게 불렸지만 지금은 공녀님의 유일한 집사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따스한 눈동자와 어조로 대답했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양새와 분위기였다.
“검귀가 이렇게 따뜻해도 돼?”
“악마도 제 사람에게는 따뜻한 법이니까요.”
5년 전 검귀.
현재 헤라의 집사가 된 ‘에르사’는 빙그레 웃었다.
“공녀님이 즐거워하면 저도 행복해요.”
“너는 어째서 날 그렇게 좋아해?”
만난 지 1년밖에 안 됐다.
그것도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반드시 필요할까요? 공녀님이 비올라 공녀를 좋아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있지.”
“무엇인가요?”
“그 아이는 누구보다 벨라투스럽잖아. 언젠가, 하얀 벨라투로서의 한계를 부숴줄 것 같거든.”
에르사가 헤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주제넘지만, 공녀님은 조금 더 솔직해지셔도 좋아요. 저는 온전히 공녀님을 모시기로 작정했어요. 제게 당신의 마음을 조금 더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는 정말 기쁠 것 같아요.”
헤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집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잊지 마. 언니는 내 언니야. ”
‘내 언니 건드리면 가만 안 둬.
그 말을 들을 때 솔직히 조금 설레었다.
가족을 위해 저런 말을 해주는 벨라투라니.
그 어떤 벨라투도 가족을 위해 저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보통 저런 말을 하면 ‘넌 아무것도 못 하는 애송이야’ 라는 모욕에 가깝다.
원래는 그런데 비올라가 말하면 달랐다.
“비올라는 왠지, 늘 내 편이 되어줄 것 같거든.”
에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늘, 공녀님의 편이 되어드릴 게요. 저를 마음껏 사용해 주세요.
검귀로서든, 집사로서든.”
***
1년 전.
비가 오던 그날.
에르사는 피 묻은 손을 닦아내고 잡화점에 들어가 커다란 곰인형을 샀다.
‘조금 늦긴 했지만…… 괜찮겠지?’
집에는 여섯 살 딸아이가 유모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 휠체어에 탄 채, 작은 손을 흔들며 자신을 배웅해 주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끌고 문 앞까지 늘 마중 나오는 작은 아이.
내 소중한 딸아이.
그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4일 밤만 더 자면 생일이다!
알지? 빨리 와야 해!’
‘그럼. 그전에 올 거야. 걱정 말고 있어. 금방 올게.’
그러나 고위 귀족의 의뢰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결국 딸의 생일을 옆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줄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무렵, 강도가 침입하여 에르사의 어린 딸과 유모를 죽였다.
에르사의 집 안에 있는 금품이 목적이라고 했다.
유모는 에르사의 딸을 지키기 위해 손도끼를 들어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에르사는 3일 밤낮을 울었다.
“엄마가 미안해.”
매일같이 일에 매진해서 살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내 딸이 더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어서.
하루하루 악착같이 살았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버렸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까지 떠올랐다.
살고 싶지 않아.’
살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얄궂게 죽고 싶지도 않았다.
죽고 싶지 않은데 살고 싶은 이유가 없다.
“나를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
황당하게도 에르사는 그 말에 위로를 받았다.
“내가 널 필요로 하거든. 검귀로서.
그리고 내 사람으로서.”
누군가가 에르사를 필요로 했다.
당시의 에르사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했다.
“넌 필요한 사람이야.”
그것이 작은 불씨가 되어주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소녀는 딸과 유모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에르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헤라였으며 그 유명한 벨라투 공작가의 4공녀였다.
헤라의 집사가 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에르사가 이렇게 말했다.
“실례가 되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제 딸도 걷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공녀님을 자꾸 제 딸처럼 여기게 돼요. 무례하게도, 저는 공녀님에게 제 딸을 투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상관없어.”
헤라는 그런 사실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서 네 필요를 채워. 삶의 이유를 찾아도 좋고, 딸을 투영해도 좋아.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처로 삼아도 상관없어.”
“…….”
“나는 네가 필요해. 나는 네게서 내 필요를 채울 거야.”
헤라는 그다지 감정이 섞이지 않은 태도로 그렇게 말했고 에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라로부터 딸을 잃은 상실감을 채워갔다.
그게 에르사가 헤라를 섬기기 시작한 동기였고 이유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
“준비는 다 됐습니다.”
“그래.”
“비올라 공녀와 함께하는 일정이라니. 저도 설레네요.”
“네가 왜 설레?”
“우리 공녀님을 기분 좋게 하는 거의 유일한 분과의 일정이니까요.”
에르사는 빙그레 웃으며 헤라의 휠체어를 밀었다.
비올라와 헤라. 그리고 그들의 집 사인 제논과 에르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에르사가 한쪽 손을 가슴팍에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모두 아시겠지만 정식으로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번 일정을 주도하게 된 4공녀님의 집사 에르사입니다.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에르사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에르사는 이 일정의 총책임자로서 저 기운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비올라 공녀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