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84화잠시 자리를 옮긴 비올라는 에르사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세알 자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르쳐 주었다.
“내가 이 모든 얘기를 꺼내놓는 이유. 알겠지?”
이러한 내용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 내용이 유출될 경우, 세알 자작가의 명예는 땅으로 실추될 것이고 그런 명예조차 명예라고 지켜준 헤론 벨라투의 입장이 우스워질 것이다.
에르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아서는 안 될 비밀로 저를 옭아매셨군요.’
에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아요.”
“뭔데?”
“루이바르텐가의 차남은 남의 소중한 가정을 파탄 내는 파렴치한이라는 것을요.”
비올라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에르사에게 있어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자는 병균같은 자였다.
“그래. 그래도 너무 경멸하는 표정을 보이지는 마.”
“알겠습니다. 전쟁터에 임하는 무인의 자세로 늘 긴장하며 대비하겠습니다.”
비올라는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에르사의 표정과 태도를 보아하니 세르폰 공자에게 농락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
비올라가 말했다.
“결정을 내렸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르폰 공자.”
루이바르텐가의 차남.
세르폰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일행의 실질적인 리더가 저 어린 영애인가?’
저 영애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대략적인 소문에 의하면 벨라투의 입양 딸이며 철혈 공녀라는 이명으로 불린다고 했다.
다만 세르폰은 그런 이명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어린애지.’
소문은 늘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소문은 변질되고 과장된다.
‘소문은 소문일 뿐.’
세르폰은 비올라에 대한 관심을 거 두었다.
사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에르사를 향해 있었다.
에르사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을 초대하게 되어 기쁩니다.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벨라투의 친우들.”
비올라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초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레이디가 바로 벨라투의 6공녀.
비올라 공녀님이시겠지요?”
“저를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몸 속에 차가운 피가 흐른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답니다.”
세르폰은 시선은 헤라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앉아 계신 레이디는 그 유명한 헤라 공녀님이시겠지요?”
“제가 유명했던가요?”
“우아함과 기품이 서린 십일화 같은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예. 실제로 뵈니 은빛 머리카락은 마치 비단 같고, 은빛 눈동자는 눈덮인 호수 같아요. 누구보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레이디로 성장하실 것 같군요.”
“칭찬 고마워요.”
비올라는 아주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
‘십일화?’
십일화는 이 세계에 서식하는 특별한 꽃이었다.
황무지에서 힘겹게 자라나 단 10일 동안 아름다운 은색 꽃을 피우는 화초.
10일 동안 꽃을 피운 십일화는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세르폰이 헤라를 십일화라 표현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 ‘벨라투가가 척박하고 야만스러운 토양이라는 것.
세르폰은 무인들을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인간들로 생각한다.
그래서 무인들을 거의 경멸하다시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이 무인들 혹은 무인들이 익히는 학문(검술등)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 척박한 곳에서 피어나지만 결국 10일 만에 저버리는 꽃, 용도는 관상용.
십일화는 짧은 시간 동안 귀족들의 눈요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뒤 바스러지는 꽃이다.
‘겉으로는 헤라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경멸하는 말이지.’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곳에서, 심지어 절름발이로 태어나 아등바등 살아봤자 너는 결국 10일짜리다.
이런 뜻이었다.
세르폰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에르사를 이 야만스러운 집단에서 탈출시키고 싶은 것 같네.”
아마도 세르폰은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웃기는 말이지만 세르폰은 매사에 늘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세알 자작 부인을 유혹하여 잠자리에 들 때도, 그는 진심으로 세알 자작 부인을 사랑했다.
그 사랑의 지속시간이 하루밖에 안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 아름다운 에르사, 피에 미쳐버린 야만 집단에서 빠져나와 나와 아름다운 사랑을 하지 않겠습니까?’ 정도가 되겠다.
비올라는 곁눈질로 헤라를 살폈다.
‘헤라 언니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세르폰이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애초에 헤라라면 7번 쉼터에서 세르폰과 만날 거라는 사실도 알았을지 모른다.
‘별 반응이 없네.’
평소의 헤라와는 조금 달랐다.
다만 헤라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폭풍전야 같았다.
‘으. 무서워.’
원작 속 비올라를 정말 괴롭게 만들었던 헤라다웠다.
역시 적으로 만들면 안 될 언니다.
헤라와 친해진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일단은 뭐 별일 없고.’
파르아 자작령 입구까지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세르폰이 말했다.
“지금 지나치고 있는 곳은 파르아로 향하는 두 번째 길. 실버 로드입니다.”
실버 로드를 지나쳐서 걸었다.
‘사람 엄청 많네.’
찾아오기 척박한 이곳에, 저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줄이야.
세르폰 공자는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한 걸음을 옮겼다.
파르아 자작령에서만큼은, 그는 황가 못지않은 권세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실제로 쑥덕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느 가문이길래 루이바르텐가의 VIP로 초대된 거죠?”
“그러게요. 잘 모르는 가문인데.”
개중 몇몇은 헤라를 알아보기도 했다.
“휠체어에 앉은 영애를 알아요. 벨라투의 4공녀 헤라예요.”
“벨라투요?”
실버 로드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비올라 일행의 정체를 깨닫고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벨라투라면 북방 끝에 위치한
“맞아요. 겨울성. 겨울성의 공작가의 자제들인 것 같아요.”
대부분의 귀족에게 있어 겨울성은 신비롭고 전설적인 곳이다.
그곳은 ‘눈이 부는 곳’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최전선의 방패이나, 실제로 겨울성을 방문한 사람은 극히 적었다.
특히 위험을 꺼리는 귀족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벨라투 공작가가 파르아 자작령에는 어쩐 일일까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상한 일이 네요.”
벨라투가 신비로운 공작가가 된 것에는 그들이 사교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나마 최근 헤라가 사교계에 참석하고는 있지만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언제부터 벨라 투 공작가가 루이바르텐가와 친분을 다졌을까요?”
그들에게는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야만적이고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마냥 그렇지는 않은가 보지요?”
“어쩌면 세르폰 공자는 지금 협박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일각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의심을 하고는 했지만 그 의심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보기에 세르폰 공자의 표정이 너무나 아름다운걸요?”
“정말요.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아요.”
아직은 세르폰의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고,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현혹된 많은 사람이 세르폰을 보며 감탄했다.
개중 한 소년이 투덜거렸다.
“누군 여기서 13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비올라도 그 투덜거림을 들었으나 그냥 못들은 체했다.
‘이거 엄청 부담스럽네.’
파르아 자작령에 입장하기 위하여 3일 밤낮으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시선이 엄청나.’
부러움과 질시 섞인 시선.
한편으로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사교계에 제대로 입문하기도 전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이야.
헤라의 경우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 웃어주며 고개를 숙였으나, 비올라는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냥 무시하자.’
앞만 보고 걸었다.
실버 로드를 지나쳐 골든 로드 앞에 섰다.
그동안 세르폰은 자신감이 더더욱 충전된 것 같았다.
에르사에게 물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괜찮습니다.”
비올라는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겨우 이 정도 길을 걷는데 검귀가 불편함을 느낄 리가 있겠어?’
세르폰 딴에는 에르사를 배려한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무인인 에르사는 오히려 불쾌했을 것이다.
‘벨라투의 집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나 보네.’
마음이 조금 더 놓였다.
비올라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세르폰이 자신 있게 말했다.
“이쪽이 파르아로의 가장 찬란한길. 골든 로드입니다.”
거기서 세르폰이 황당한 한마디를 더했다.
“십일화 레이디께 한 가지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골드 로드는 파르아 자작령으로 향하는 가장 고귀한 길이었다.
명가의 직계들.
명가와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아왔거나 명가들에게 은혜를 입혔던 가문.
그리고 명가의 초대를 받아 입장하는 VIP들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다.
“어떤 부탁이죠?”
“휠체어는 아공간에 잠시 넣어주실 수 있을까요?”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도록 설계 되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선례가 없던 일이라서요. 파르아 자작령은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고, 저는 루이바르텐의 직계로서 전통을 깨는 것이 부담스럽답니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저 말의 진의는 간단했다.
휠체어 같은 건 고귀한 골드 로드에 어울리지 않으니 아공간에 숨겨 달라는 얘기였다.
비올라는 또 남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번지수 진짜 잘못 잡았다.
아마도 세르폰은 자신이 루이바르텐의 고귀한 혈통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내가 벨라투에게도 이러한 요구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대 오, 아름다운 에르사여, 저 야만스런 벨라투에게서 벗어나 나의 안전한 그늘로 오시오,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소, 대략 이런 뜻인 듯했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비올라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