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88화비올라는 머뭇거리는 대신 거꾸로 물었다.
“왜 그런 거야?”
마치 다 알고 있지만 대답의 순서를 넘긴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 좋아. 자연스러웠어!
아니나 다를까.
헤라는 굉장히 흡족해했다.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네.”
헤라의 시선은 카를로에게 향했다.
그 눈빛은 마치 ‘봤죠? 내 동생이 이 정도인 거?‘라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너도 다 알다시피 나는 루이바르텐가의 차남과의 친분을 고려해야 했어.”
비올라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카를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루이바르텐가는 명가 중 하나이고, 우리 벨라투는 루이바르텐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중이야. 첫째인 세르사 공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어.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으니까.”
첫째인 세르사.
둘째인 세르폰.
헤라는 둘을 놓고 저울질해야 했다.
루이바르텐의 실세라 할 수 있는 가주와 카를로는 이제 너무 늙었다.
다음 세대를 대비해서 끈을 만들어 두어야 했는데, 세르사보다는 세르폰이 다루기가 훨씬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둘째인 세르폰 공자에게 접촉해 본 거야.”
명가는 자신의 후계자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설령 치부가 있더라도 숨기거나 감춘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접 접촉하는 것이 최고였다.
“만약 세르사 공녀였다면, 적어도 내 휠체어가 명인의 작품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
세르폰은 탈락이라는 표현이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비올라의 등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서 이런 상황들을 연출했구나.’
좀 더 만만해 보이는 세르폰을 파악해 보고 관계를 트기 위해서.
만약 세르폰이 생각보다 훌륭한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아마 다른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헤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을 계획해 온 것 같았다.
카를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그 망나니는 헤라 공녀님께 선택받지 못했겠네요.”
“저는 누군가를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지나치게 겸손한 말씀이시군요.”
“겸손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비올라는 괜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목덜미가 싸했다.
헤라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 동생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요.”
헤라의 애정 가득한 눈이 비올라를 향했다.
“카를로 디자이너께서도 방금 보셨겠지요.”
카를로도 봤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
모든 요소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아우라.
비올라에게서 그 모든 것을 느꼈다.
“제 동생은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될 거랍니다. 저는 지배자가 될 수 없지만 제 동생은 될 수 있어요. 오늘은 제 동생을 카를로 경에게 소개하는 날이 되었지요.”
헤라의 애정 가득한 눈에는 무한한 신뢰도 담겨 있었다.
왕을 만들어가는 자.
킹 메이커가 킹을 보았다.
“하하. 만나 뵙게 되어 진정 영광입니다. 벨라투를 이끌어갈 분은 메데이아 공녀님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요.”
카를로도 가슴속에 ‘비올라 벨라 투라는 글자를 새겨넣었다.
카를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동생을 위한 것들은 준비가 되었겠지요?”
“물론입니다!”
이미 오래전, 헤라는 비올라를 위해 수많은 것을 주문 제작해 놓았다고 했다.
“주문하신 것들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어딘가를 다녀온 카를로가 아공간을 열어 물건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을 때, 비올라는 결국 기함하고 말았다.
‘세상에나…!’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사치스러운 물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다이아를 극세 가공하여 실의 형태로 뽑아낸 뒤 디테일을 살린 구두입니다. 이미 알고 있으시겠지만, 이 가공 기법은 오로지 헤르페스 가문의 가주만이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헤르페스 가문의 가주와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의 오랜 우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상태.
아무래도 카를로가 헤르페스의 가주에게 부탁하여 구두를 특별히 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건 금과 붉은 세론 광석을 특수 처리하여 만들어낸 귀걸이로서…….”
네 잎 클로버 형태의 작은 귀걸이였다.
불이 없는 곳에서도 희미한 붉은 빛을 내는 특수 광석인 세론 광석이 함유되어 있어 영롱한 빛을 내었다.
“금과 세론 광석을 함께 제련하는 기술은 비안도 킬라프 가문만이 가능한 기법이지요. 그리고 귀걸이와 세트를 이루는 목걸이도 특별히 제작하였습니다.”
비올라는 놀라움을 감추려 애써야 했다.
벨라투의 철혈 공녀가 이런 것들을 보고서 입을 쩍 벌리면 모양새가 안사니까.
‘이게 도대체 다 얼마야?’
부자 언니를 둔 것이 좋기는 한데.
아마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할 물건들이 틀림없었다.
‘조, 조금 부담스러운데.’
친구가 됐든.
남자 친구가 됐든.
심지어 남편이나 부모님이 됐든.
돈이 있어도 못 구할 초고가 사치 품들을 선물해 주면 부담스럽기 마 마련이다.
그런데 헤라의 성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방금 세르폰 공자를 용서하겠다는 말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카를로의 등에도, 비올라의 등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그럼요. 아직도 보여드릴 것이 많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하마터면 실망할 뻔했네요.”
“그럴 리가요! 으하하하핫!”
사실 거짓말이었다.
‘빌어먹을 망나니 놈!’
그놈 때문에 있는 재산 없는 재산다 털리게 생겼다.
하필이면 헤라 공녀를 건드려서는.’
헤라에게 잘못 걸리면 뼈 한 조각 남지 않는다.
헤라 한 명만 해도 그렇다.
‘헤라 공녀에 비올라 공녀까지 줄줄이 달고 와?’
그런데 오늘 보니 헤라보다 비올라가 더 무서웠다.
지금도 보라.
저 무표정하고 성의 없는 태도를!
속을 알 수 없는 저 무미건조한 표정은 어쩐지 권태로워 보이기까지했다.
철혈의 공녀라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젠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최고의 명품을 내보여야 할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이, 이것까지는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헤라는 이번 무례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 루이바르텐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카를로는 생각보다 루이바르텐을 사랑했고, 가문을 위기에 몰아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두 벌의 드레스를 꺼내놓았다.
하나는 눈처럼 하얀 드레스였고, 또 하나는 피처럼 붉은 드레스였다.
카를로가 진정 숨기고 싶었던 것은 붉은 드레스였다.
‘제발 하얀 드레스를 선택해라!’
“어떤 것이 취향에 맞으실지 몰라 두 벌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드실까요?”
왼손에는 하얀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오프 숄더의 형태였고 굉장히 고급스러운 원단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물처럼 찰랑거리는 순백의 드레스에 은실로 세공된 레이스 장식은 세밀하고 정교했다.
‘와…….’
이런 쪽 옷이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올라는 속으로 감탄했다.
‘예쁘다.’
취향을 떠나서 이 드레스는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명품이었다.
패션에 관심이 없거나 안목이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다른 건 몰라도 정말 고급스럽고 아름답다는 건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짜 예쁘다.
머릿속으로 저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 너무 애기네.’
갑자기 환상이 깨졌다.
영혼은 20대의 한아린인데, 몸은 12세의 비올라였다.
게다가 또래의 열두 살보다 성장이 많이 느리기까지 했다.
원래 내 몸보다 훨씬 예쁘기는 한데…….’
10대의 한아린은 늘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얼른 어른이 되어야 강한준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여자로 봐줄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갓 20대가 되었을 때, 한아린은 30대가 되고 싶었다.
20대보다는 30대가 조금 더 성숙한 어른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한아린이다 보니 지금의 육체에 저 드레스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에휴. 난 언제 크냐?’
그 모습을 본 카를로의 등에 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한숨 쉬었지?’
사실 백색 드레스도 명품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붉은 드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분명 한숨 쉰 것 같은데.’
일부러 들으라고 한숨을 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를로는 두려운 마음을 숨기며 너 스레를 떨었다.
“이것도 살펴봐 주십시오.”
제발 살펴보지 마.
그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올라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피를 머금은 것 같은 붉은 드레스였다.
겉감은 화려한 붉은색이었고 안감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강렬하네.’
하얀 드레스에 비해서는 조금 더 캐주얼한 느낌이었다.
정확한 재질은 알 수 없었다.
물처럼 찰랑거리며 흐르되 약간의 광택이 묻어나는 소재였다.
앞선 드레스에 비해 고급감도 덜했고 디테일도 떨어졌다.
‘이건 뭐랄까……. 무서운 이모가 입을 거 같아.”
작중에 등장하는 마녀 하이디가 입을 것만 같은 옷이었다.
‘응? 하이디?’
생각해 보니 하이디가 딱 이런 옷을 입고 있었다.
겉감은 붉은색.
안감은 검은색.
‘금실로 수놓은 문양들.
그냥 보면 잘 모르지만 집중하면 보이는 희미한 문양들.
그 희미한 문양들이 조화를 이루어 간단한 마법 술식을 완성한다고 표현되어 있었다.
불현듯 소설 속 한 대사가 떠올랐다.
「 “세르사의 목숨을 살려준 대신 얻은 전리품이야.”
소설 속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내용은 아니었다.
루이바르텐가와 관련된 일화들 자체가 비중 있는 에피소드는 아니었으니까.
‘세르사는 루이바르텐의 첫째 공녀고.
악녀 하이디가 세르사의 목숨을 인질로 아티팩트를 빼앗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럼 그게 이 옷인가?
“이거. 자세히 좀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