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91화헤라는 책상에 앉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비올라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서류에 정신이 팔린 상태.
비올라는 성큼성큼 헤라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헤라 뒤에 시립해 있던 에르사가 약간 긴장한 태도로 비올라를 쳐다봤다.
“비올라 공녀님?”
그제야 헤라는 비올라가 찾아온 것을 알았다.
고개를 들고 가볍게 웃었다.
“비올라?”
짝!
비올라는 망설임 없이 헤라의 뺨을 때렸다.
“비올라 공녀님!”
헤라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에르사에게 손짓했다.
괜찮으니 뒤로 물러서라는 뜻이었다.
비올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때, 때렸어.’
사실 이렇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헤라를 때리기까지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의 뺨을 때리는 것은 비올라에게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더더군다나 헤라의 무서움은 익히 경험했다.
헤라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지금도 굉장히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해.’
비올라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헤라를 내려다보면서 서신을 툭! 던졌다.
“왜 나한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언니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지?”
“……07.”
헤라는 한 손으로 부풀어 오른 뺨을 어루만지면서 또 한 손으로 서신을 살펴보았다.
“겨우 이것 때문에 나를 때린 거야?”
“겨우 이것?”
“카를로 수석 디자이너에게 네 이름으로 선물을 보낸 건 맞아.”
그 선물이 사람의 목이었다.
“그러나 이건 네가 내게 고마워해야 할 상황 아니야? 네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너를 도운 건데? 너는 루이바르텐가에 큰 은혜를 입힌 거잖아. 내가 신경 쓴 덕분에.”
헤라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와 함께 약간의 서운함도 묻어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노력했는 데, 너는 나를 때려?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비올라는 속으로 굉장히 무서웠지만 겉으로는 전혀 다른 감정을 연기했다.
“언니. 나는 벨라투야.”
“네가 벨라투인 걸 내가 몰라?”
“내가 스스로 하지 않은 것으로 이득을 취하는 건 벨라투답지 않아.”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너는 메데 이아 언니에 비해 너무 늦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도, 언니를 쫓아갈 수 있을까 말까야.”
비올라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 마셨다.
‘이쯤에서…… 한 번 더 때려야겠지?’
아무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역시 사람을 때리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때리기 싫은데.’
그래도 해야 했다.
‘ ‘아마…… 언니도 이걸 원하고 있겠지.’
지금 헤라는 서운함을 내비치고는 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닐 거다.
비올라가 자신의 감정을 연기하고 있듯, 헤라 역시 마찬가지로 거짓을 연기하고 있다.
독자였던 한아린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짝!
또다시 뺨을 때렸다.
“내게 벨라투답지 않음을 강요하지 마. 천천히 걸어가도 옳은 길로 걸어가야 하는 거야.”
“나는 너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어.”
“그래서?”
“너를 위해 한 행동인데, 다짜고짜찾아와 뺨을 때릴 정도의 일이야?”
“서운해?”
“안 서운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서운해하지 마. 서운해할 자격 없어. 언니는 내게 벨라투답지 않은 방식을 강요했어. 내게 일말의 상의도 없이.”
헤라는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는 정말로 서운해 보였다.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까지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헤라 언니라서. 내가 사랑하는 언니라서. 겨우 이 정도로 넘어가 주는 거야. 이건 경고야.”
비올라가 몸을 돌렸다.
“사과할 마음이 들면, 에르사를 내게 보내.”
비올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비올라가 떠나가고 난 뒤, 헤라가 빙그레 웃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
몇 시간 전.
헤라가 말했다.
“오늘 밤 비올라가 찾아올 거야.
아니. 찾아와야만 해. 찾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비올라에게 실망하고 말거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비올라의 이름을 팔아서 정당하지 않은 이득을 쥐여 줬잖아. 비올라는 화를 내겠지.”
헤라는 즐거워 보였다.
“내게 어떤 방식으로 화를 내고 항의할지. 심장이 두근거려. 이왕이면 강력하게 항의해 주면 좋겠는데.”
“강력한 항의라면…….”
“글쎄. 내 뺨을 때린다든가?”
에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겨울성 안인데요?”
겨울성 안에서, 특히 공작저 안에서 물리적인 핍박은 금지되어 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오로지 가주인 헤론 공작.
그리고 헤론 공작의 특별한 명령을 받은 사람뿐이었다.
“겨울성 안이니까. 나를 때려주면 좋겠어.”
“저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에르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나 집사로 취직한 지는 1년밖에 안 되었다.
헤라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방법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게 신뢰를 보여주는 방법이잖아.”
겨울성 안에서의 폭력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폭력을 사용하여 헤라에게 항의한다?
비올라 스스로가 커다란 리스크를 짊어지고 항의한다는 얘기였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벨라투라는 뜻이거든.”
“얘기가 그렇게 되는군요.”
에르사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평범한 자매 관계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벨라투가의 가풍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최근 비올라와 많이 친해졌어.”
“네. 이번 파르아 일정에서 더욱 그렇죠.”
“정에 약해져서 짚을 것도 제대로 못 짚는 벨라투는 벨라투의 자격이 없어.”
그리고 비올라 벨라투는 벨라투의 자격을 훌륭히 증명해 냈다.
***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지만 헤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뺨은 괜찮으세요?”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아.”
마법 연고가 있지만 바르지 않기로 했다.
이 알싸한 고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 어느 순간에도 벨라투다움을 잃지 않는 모습이 참 예뻐.”
헤라는 집사를 한 번 잃어보았다.
헤라는 집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못 했거든.”
정에 못 이겨서.
결국 집사를 내치지 못했고, 집사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나는 못하는 걸 비올라는 해. 나와 비올라의 다른 점이지.”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벨라투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한 느낌 이네요. 앞으로 노력하겠습니……
공녀님?”
에르사는 이상함을 느꼈다.
“공녀님!”
에르사는 황급히 헤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을 잃었어.’
헤라의 몸속에 마나를 주입해 황급히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아공간에서 응급 포션을 꺼내 헤라의 입속에 흘려 넣었다.
조심스레 헤라를 안아 침대에 눕혀주었다.
다행히 에르사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사실 마나를 다루는 무인에게는 꽤 익숙한 일이어서 빠르게 잘 대처할 수 있었다.
‘그냥 뺨을 때린 게 아니라 마나를 실은 거야.”
그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뼈를 연결 통로로 삼아 마나로 뇌를 직접 타격했어.’
이는 최소 7급 기사는 되어야 가능한 기술로서, 기사 양성 아카데미에서 교관들이 자주 쓰는 체벌 방식 이기도 했다.
‘열두 살에 이걸 해냈단 말이야?’
단순히 이것만으로 그 실력을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이건 7급기사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그 어떤 예비 동작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검은 벨라투도 아닌 하얀 벨라투가 이런 걸 했다고?
에르사는 눈을 의심했다.
‘메데이아 공녀가 열두 살에 9급 정규 기사가 되었지.’
그렇다면 비올라 공녀의 성장 속도가 메데이아보다 더 빠르다는 뜻이 된다.
심지어 비올라는 ‘검은 벨라투’로서의 수련은 전혀 하지 않는데 말이다.
에르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건 천재의 영역을 넘어선 또 다른 영역이었다.
‘헤라 공녀님께 항의하고 신뢰를 보여주는 한편, 일부러 능력까지 드러낸 건가.’
정신을 잃었던 헤라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에르사를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에르사.”
헤라는 여전히 어지러운 가운데 빙그레 웃었다.
“봤지? 비올라가 이 정도인 거.”
봤습니다. 놀랍네요. 정말.”
“비올라라면 벨라투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거야.”
에르사는 어쩌면 저 말이 진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방으로 돌아온 비올라는 침대에 누웠다.
몸은 피곤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잘한 거야. 그래. 헤라 언니도 이걸 원했을 거야.’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두렵기는 했다.
헤라를 적으로 삼는 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니까.
‘언니가 미리 언질을 줬겠지. 그러니까 에르사가 나를 막지 않았던 거고.’
에르사의 실력이었다면 아마 헤라를 보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르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 괜찮을 거야. 나는 잘했어.”
헤라의 부풀어 오른 얼굴을 떠올려 봤다.
‘그래도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네.”
헤라가 무서운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여 있는 사람의 뺨을 때리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많이 아팠으려나?’
그래도 벨라투의 신체를 가졌으니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쳤더라도 마법으로 금세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미안하네….’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더 말똥말똥해졌다.
헤라의 부풀어 오른 뺨과 충혈된 눈이 자꾸만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새벽 1시가 되었다.
‘슬슬 졸려야 하는데?’
열두 살의 육체가 버티기에는 꽤 힘든 시간인데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해.”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너무하다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너무해! 나 화났어.”
침대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