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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딸 역할을지나치게 잘 해버렸다-95화 (95/201)

입양딸 역할을 지나치게 잘해버렸다 095화힉슨은 황당한 장면을 마주했다.

“이게 다 뭐냐?”

발목까지 물이 찰랑거렸다.

엉엉-서럽게 우는 목소리도 들려 왔다.

“돌려놔. 내놓으라 그래!”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제논이 쳐둔 소음 제거 마나 막을 뚫고서 힉슨의 귓가에도 똑똑히 들렸다.

“비올라. 수영에 취미 생겼어?”

“딱히.”

비올라는 무신경한 눈으로 침대 위에 앉아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쳐다보기만 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그 물은 이제 무릎까지 차올랐다.

제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퐁퐁이가 더 울면 물이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은걸요.”

제논이 검을 한 번 휘둘렀다.

콰드득~ 소리와 함께 방문 주변이 꽁꽁 얼어버렸다.

라스본 빙검식을 활용한 방수 작업이었다.

퐁퐁이는 떼를 쓰며 반쯤 울부짖었다.

“내가 죽여 버릴 거야.”

힉슨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니까, 쟤가 죽이겠다는 사람이 네 아버지 맞지?”

“응. 아마도.”

“그래서 제논이 필사적으로 소음제거 막을 펼쳐서 그 소리를 막아내는 중이고.”

“응.”

“아무리 그래 봐야 이 소식이 헤론에게 전해질 거라는 것도 알지?”

“응.”

다 알고 있다.

퐁퐁이는 자신이 물을 주고 정을 준 예쁜 꽃들을 살해한(?) 범인이 헤론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헤론을 향해 엄청난 화를 쏟아냈다.

“이야. 겨울성 안에서 헤론을 진짜로 죽이겠다고 설치는 미친 녀석이 나타날 줄은 몰랐네. 살기까지 뿌리면서.”

“그러게.”

“비올라. 너는 왜 이렇게 태평해?”

“내가 태평해 보여?”

“엄청.”

아니다.

그것은 힉슨의 오해였다.

비올라는 사실 굉장히 고민하던 차였다.

다만 비올라가 여태껏 쌓아온 이미지와 행동들 때문에 냉철하게 앉아 상황을 분석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어떻게 하려고?”

힉슨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짜증이 났다.

‘헤론 그 요망한 놈은 ……!’

비올라에게 꽃을 선물한 자식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꼬투리 삼아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왠지 서재에서 이 내용을 보고받으며 웃고 있을 것 같은데.’

앙큼하고 귀염 뽀짝한 비올라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그것을 한껏 기대하며 시간을 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힉슨 아저씨가 내 아버지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나였으면?”

힉슨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기뻤겠지.”

“왜?”

“딸이랑 대화 한 번 더 할 수 있으니까? 명분도 분명하겠다, 귀여운 딸의 재롱도 볼 수 있겠다, 아주 좋은 기회잖아?”

“.……퍽이나.”

비올라는 괜히 물었다 싶었다.

힉슨에게 보냈던 시선을 그냥 거두었고 힉슨은 힉슨 나름대로 상처를 받았다.

“왜 그래? 진짜야.”

“응. 그래. 고마워.”

“야. 진짜라니까?”

“알았어.”

힉슨은 어딘지 모르게 서운했으나 좋은 어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그 섭섭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 맞다.

퐁퐁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비올라의 손목과 팔 상태를 체크해 보기 위해서였다.

“너 팔은 괜찮아?”

“응.”

“어떻게 괜찮지?”

힉슨이 물살을 가르며 걸어와 비올라의 손끝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진귀한 것을 관찰이라도 하듯 열심히 살펴보았다.

“뭐야? 진짜 괜찮네?”

“안 괜찮길 바랐어?”

“그건 아닌데…….”

비올라가 무인으로서 수련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무재(武材)라는 사실은 힉슨도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비올라는 천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저 쿠룸쿠룸의 반지는 지금의 비올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과한 아티팩트였다.

“움직임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갑갑해져야 하는데.”

“그런 건 없던데.”

“그래?”

비올라는 괜찮은 척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힉슨은 불가사의하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또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놈, 또 웃었겠지? 역시 내 딸은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리는군. 뭐 이딴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안 들던 친구 놈인데, 오늘은 유독 더 거슬렸다.

어쨌든 비올라가 저 반지를 끼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퐁퐁이가 답을 내려주었다.

“흐어어어어엉!”

퐁퐁이는 서럽게 울면서도 제 자랑은 해야겠는지 히끅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 힘이잖아, 바보 녀석들아!”

자기 자랑에 바빠진 퐁퐁이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었고 그사이 제논은 마나를 끌어올려 정령수를 통째로 얼려 버린 뒤 가루로 만들었다.

가루의 형태로 깔끔하게 잘려 나간 그 얼음들을 특별히 제작된 마법 항아리에 담아냈다.

“깨끗하고 맛 좋은 정령수로 만든 얼음을 획득했군요.”

제논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훨씬 맛좋은 딸기 에이드를 만들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3급 기사 이상의 힘을 얼음 채취에 낭비한 제논은 꽤 흡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제논은 한없이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고, 퐁퐁이는 제 자랑에 급박해 보였다.

“내가 물을 준 예쁜 꽃들은! 내가 정령계에서 제일 제일 좋은 물을 준 덕에 무럭무럭 자랐어.”

얘기를 들어보니 퐁퐁이 입장에서는 서러울 수도 있기는 했다.

정령 왕에게 혼나가며 가져온 물이란다.

그리고 그 정령수는 ‘아레나’ 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불렸고 인간계로의 반출이 딱 한 번으로 제한된다고 했다.

“내가 그거 가져오느라고 얼마나 혼났는데.”

“그게…… 아레나였어?”

비올라조차 황당했다.

원래부터 악당이었던 하이디를 세계 최정상급 악당으로 키워낸 것이 바로 ‘아레나’ 였다.

아레나는 아주 특별한 물로서 소설 속에서는 거의 불로장생의 영약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불로장생을 시켜주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기적을 일으키는 물로서 굉장히 유명했다.

“아레나를 알아?”

“기적을 일으키는 물. 정령계에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생명수잖아.”

세상에나.

그걸 꽃밭에 뿌렸단 말이야?

비올라는 황당했다.

‘도대체 꽃을 얼마나 사랑하면 인간들에게는 보물 중의 보물로 취급되는 아레나를 꽃밭에 뿌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벨라투의 그림자) 속 등장인물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맞아. 나는 늠름이들에게 아레나를 선물했어.”

“늠름이는 또 뭐야?”

“내가 이름을 주었어. 늠름하고 씩씩하게 자라라고.”

얘기를 들어보니 정령의 가호를 받게 된 마거리트 꽃들은 ‘늠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아레나의 축복에 힘입어 정령화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 과연 그렇군. 그래서 비올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 반지를 들어 올릴 수 있던 거였어.”

“맞아. 비올라는 정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령 친화력이 좋으니까.”

그래서 정령계의 꽃인 정령화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퐁퐁이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헤론은 언제 죽이러 갈까?”

“못 죽여.”

“왜?”

“너보다 훨씬 강하고 나보다도 훨씬 강하시거든.”

“그럼 얼른 우리도 강해지자. 얼른 죽여 버리자.”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내 행복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에 초 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공작저 안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소유야. 실제로 마거리트 꽃밭을 만드신 것도 아버지이고, 나는 마거리 트 꽃밭을 만드는 데 어떠한 일조도 하지 않았어.”

아, 몰라!

그런 거 난 모르겠고!

늠름이들의 복수를 해야겠어!!

퐁퐁이는 투정을 부리려 했다가 이 내 입을 다물었다.

“가자.”

“어딜?”

“아버지께.”

“지, 진짜 죽이게?”

순간 퐁퐁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죽이겠다 어쩌겠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는 했지만 그건 허세였던 모양이다.

퐁퐁이는 이미 꽃들이 사라진 마거리트 꽃밭에 남아 있던 마나의 잔향을 느낀 상태였다.

간접적으로 헤론의 가공할 만한 힘을 느꼈고, 막상 비올라가 헤론에게 간다니 덜컥 겁이 났다.

“무, 물론 난 겁 같은 건 나지 않지만 말이야. 그래도 역시 죽이는 것까지는 좀 그렇겠지?”

비올라는 퐁퐁이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제논에게 말했다.

“제논, 아버지와 약속을 잡아. 내가 찾아갈 거야.”

연유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턱턱 만날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매사에 태평한 제논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걱정이 되는 듯했다.

“사과를 요구할 거야.”

“예?”

힉슨이 이마를 짚었다.

“제정신이냐?”

그 요망한 친구 놈이 딸을 제법 아끼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꽃밭의 꽃을 베어버린 것으로 헤론에게 사과를 요구하겠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사사로운 감정 같은 건 둘째 치고, 가주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목을 내려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헤론이었다.

힉슨이 파악한 헤론은 그랬다.

“제정신이야.”

“정신 차려. 너 그러다 큰일 나.

아니. 아니다. 내가 같이 갈게.”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적어도 비올라에게 도망갈 시간은 벌어줄 수 있겠지.

힉슨은 그 나름대로 비장한 마음가짐을 가졌다.

““공작님께…… 공녀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

공작의 서재에는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칼튼은 속으로 한숨을 수백 번도 넘게 쉬었다.

‘비올라 공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요즘 비올라 공녀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맞았다.

칼튼은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성장과 성과에 취해 일을 그르치고 마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올라는 그런 축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공녀가 잘하고 있다고 해도, 어찌 공작님께 사과를 요구하겠다며 약속을 잡는단 말입니까!”

사실 칼튼은 비올라를 굉장히 좋게 보았다.

가주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벨라투가에 큰 힘이 될 수 있는 재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호해 주지?’

서재 안에 감도는 이 무거운 기운은 헤론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 이 공간에 들어서면 아마 숨이 턱턱 막 힐 것이 분명했다.

운이 나쁘면 질식사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농밀한 기운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퐁퐁이가 서 있었다.

“가자.”

헤론을 죽이겠다며 펄펄 날뛰던 퐁퐁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비올라의 치맛단을 붙잡고 쭈뼛거리며 함께 들어왔다.

“다시 뵙네요, 아버지.”

“그래. 내게 사과를 요구했다지.”

헤론은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마거리트 꽃밭에 물을 준 것이 저 퐁퐁이라는 정령이고, 퐁퐁이가 자신을 죽이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것도 알았다.

“사과를 요구하며 다짜고짜 나를 찾은 아이는 처음이로구나. 힉슨은 어디 있지?”

“저는 힉슨 경의 힘을 빌릴 만큼 나약하지 않아서요.”

비올라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칼튼이 보기에는 너무나 위태로운 자신감이었다.

‘용기는 좋지만 만용과는 구별하여야 합니다, 6공녀.’

사실 비올라는 자신감이 가득하지 않았다.

지금도 무서워 죽겠다.

그렇지만 담대한 척하는 연기에는 이제 도가 텄다.

그 누구도 비올라가 겁먹었다고 보지 않았다.

“저는 아버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요. 혹여 기분이 나쁘시더라도, 상대의 말이 옳다면 그것을 인정해 주는 어른이지요. 그리고 저는 하얀 벨라투로서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따지러 왔어요.”

“말해보거라.”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올라는 그 눈을 마주 보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헤론은 ‘맞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빠도 인정하는 타입이지만, 반대로 ‘틀린 말을 하면 기분이 좋아도 용서하지 않는 인물이다.

‘어차피 퐁퐁이가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설칠 때부터 답은 하나였어.’

비겁하게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한다면 이렇게 부딪쳐야 했다.

심장이 달달 떨리는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며 움직였다.

저벅저벅 걸어가 공작 앞에 섰다.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손바닥 위에 공손히 받쳐 들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모욕하신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합니다.”

칼튼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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